(2022/08/23) 교갱협 제27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신명기 1장 30~32절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1.  사람은 보행 동물에 불과할까? 사람이 보행 동물이지만 하늘의 새들을 다스리라고 명령을 받았으니(창 1:26-29), 분명 하늘을 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인간의 타락 후 하늘을 다스릴 능력을 잃어버렸지만, 바벨탑을 쌓아서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는 야망에서 보이듯이 그 본성 속에 하늘을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고, 결국 인간은 비행 도구를 만들어서 하늘을 비상할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싶다. 지금은 대기권을 벗어 난 우주를 항해하려는 꿈까지 키워 나가고 있다. 그러나 우주 과학이 발달해도 범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인간 비상의 능력은 우주의 크기에 비해서 그 범위가 너무나 작다는 것을 더 명확하게 깨닫고 있다. 물론 인간의 비상에 대한 희망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인 창공까지 올라가려는 의지이기 보다는, 인간의 처지와 환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뛰어 넘어 보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뜻이 성공했을 때 사람들은 오만에 빠지고, 그로 인하여 획득된 권력을 독점하여 이웃을 지배하고 억압하려는 죄성을 여지없이 보여주며 달려온 것이 곧 인류 역사가 아닐까?

 

2. 이번 수련회의 주제가 비상인데, 앞에서 언급한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어보자는 뜻보다는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처한 한국사회와 교회의 당면한 많은 문제들을 품에 안고 짓눌려 씨름하기 보다는 특단의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외쳤던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된다’(슥 4:6)는 탄식을 우리들도 지금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6)

 

3. 출애굽 이스라엘의 길이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모습을 엿보여 주는 듯하지 않은가? 종에서 자유인이 되긴 하였지만 그들이 들어가 살 땅엔 이미 다른 족속들이 차지하여 살고 있었고, 그들은 네피림이어서 이스라엘이 감당할 수 없는 대적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면초가였기에 지도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었다(신 1:26-28).

“26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27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28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신명기 1:26~28)

이런 원망은 결국 애굽의 해안 도로를 따라 가나안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의 길로 나가게 되었고, 그 광야 40년을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픈 극한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었다. 이로써 모세는 끝없을 것 같은 광야 길과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안고는 눈물을 뿌리며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었다. - ‘이 백성들을 내가 배었나? 내가 낳았나? 왜 나에게 저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십니까? 나 혼자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민 11:12-14)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민수기 11:12~14)

 

4.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부르짖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아무리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고 외쳐도 세상 현실 앞에서 주저앉아 믿음을 잃은 채 저마다 자기 길로 가고 있는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목회자의 무기력함, 무능력을 절감하고 있다. 예배당에 모여 아멘을 외치고 나가도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온다. 마치 사울의 군대가 블레셋 군대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 병영에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삼상 17장)과  같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뱉어내었던 그런 모욕을 지금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모욕을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스스로 자책만 하고 있다. 당연히 욕 얻어먹을 교회가 되었으니 할 말이 없다고 하며 숨소리조차 내지 말자고 한다.

 

5. 팬데믹 코로나 19가 지난 3년 가까이 한국교회를 아사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 한국 전쟁 가운데서도 멈추지 않았던 주일 공예배가 오랫동안 비대면 예배로 전환되어 예배 공동체인 교회가 그 생명을 잃어가는 듯 했다. 간간이 집회를 갖던 교회들 안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하면서 한국교회는 공공의 적이 된 듯 낙인이 찍혀 버렸다. 더구나 대구의 신천지 집단에서 시작된 대규모 집단 감염이 코로나19의 역사에서 한국교회가 덤으로 모욕을 받았다. 가장 이기적인 종교, 공공성을 상실한 광신도의 종교, 심지어 서울의 모 교회의 극렬한 저항으로 인하여 교회의 이미지는 반사회적인 범죄 집단처럼 인식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기가 죽어서 더 이상 세상을 향한 구원의 복음을 외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이때 들려오는 주의 말씀이 있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예레미야 12:5)

 

6. 우리는 보행자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말과 경주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할 수도 있다. 어떻게? 말보다 빨리 가려면 독수리를 타면 된다. 어떻게 독수리를 타는가? 그것이 오늘 본문이다.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신명기 1:30~32)

우리가 올라타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오셔서 우리를 안아 옮기신다. 이것이 비상의 길이다. 비상의 길은 주를 앙망하며 그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일어난다. 이사야 선지자가 매우 분명하게 선언했다.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28~31)

 

7. 천지창조의 대 서사시 같은 창세기 첫 머리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혼돈(formless)과 공허(empty) 그리고 흑암(darkness) 뿐이었던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여기서 운행이라 한 우리말은 영어 성경에서는 hovering으로 묘사했다. 곧 두 날개를 쫙 펼쳐서 비상하는 독수리 같은 비행의 모습을 그려준 것이다. 이것이 창조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였다.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 위를 비상하시면서 창조가 시작되었는데,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후 가시와 엉겅퀴가 수풀을 이루며 인간의 이마에 땀을 흘려야 살아가게 된 이 세상을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다시 hovering해 오신 것을 믿는다. 그 증거가 바로 출애굽의 이스라엘을 안아서 광야를 지나게 하신 하나님의 행위였다. 하나님께서 안아 비상시키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갈 수 없는 길이었다. 

 

8. 인류에게는 스스로 구원의 능력이 없었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각기 제 길로 가며 파국을 향하던 이 세상에 마침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냥 머물러 있지 못하신 것이다(요 3:16). 우리의 세상이 죄악으로 인하여 다시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이 깊은 가운데로 빠져 들고 있음을 아시고도 하나님이 그냥 두실 리가 없다. 예수님 대속의 죽으심과 그 이후 약속하신 대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어 세상 끝 날 까지 우리 가운데 운행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는데, 그 땅 끝까지 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이 오시어 우리를 품고 비상하실 때 가능한 것이다. 주님의 날개 아래 안기면 혼돈과 공허함과 흑암의 천지를 뛰어 넘을 비상이 가능하다. 선지자의 외침대로 하나님이 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6)

 

9. 인생은 짧고 목회는 길다. 이 말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란 말을 패러디 해 본 것이다. 예술가들의 수명은 대체로 짧았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작품은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이어진다. 그처럼 목회자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생은 풀과 그 풀의 꽃과 같다(시 90:5,6).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시편 90:5~6)

그러나 우리가 행한 목회가 주의 뜻을 좇아 했다면 그 일은 영원하다. 목회자가 자기 인생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지 말자. 아무리 아름다운 인생도 늙어 쇠하면 지나가는 바람 같이 곧 안 보인다. 그러나 목회자가 간 뒷자락에 목회는 남아 있다. 영원하다. 그래서 목회가 목회자의 영광이다. 목회는 목회자가 하는 것이지만, 목회자 역시 보행자이기에 목회의 길엔 수많은 말들이 주위에서 같이 달리는데 그 말들 때문에  놀라거나 기죽어서 목회를 적당히 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회를 주께서 안고 가도록 맡기면 된다. 갈 길이 멀고 험할수록 비상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인생보다 더 긴 목회를 하고 가는 것이다. 

 

10. 목회가 비상하려면 성령께서 주인이 되시고 나를 안으시도록 맡겨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아덴 사람들처럼 새로운 무엇을 찾으려 하지 말자(행 17: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사도행전 17:21)

그 길이 가능하고 쉬운 것은 우리의 열망 때문에 일어나는 기적이 아니라, 주님이 이미 오셨고, 그렇게 하시려고 우리보다 더 열망하면서 우리의 문 곁에 서 계심을(계 3:20) 인식하고 믿으면 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때로는 금식도 필요하고 산기도도 필요하고 성령 집회에 참석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령은 우리가 가진 성경을 펼치면 역사하신다. 바울은 외쳤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

이것만 믿고 펼치자. 믿음으로 펼치며 말씀을 들으려고 하자. 어린 아이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펼쳐 읽으면 주님은 기록된 말씀에서 들리는 말씀이 되고, 그 때 그 말씀이 살았고 활력이 있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주신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이 말씀의 역사가 곧 우리를 안아서 약속의 땅으로 옮겨주실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의 hovering이다.

 

11. 목회자가 하나님의 hovering을 누리면 교회는 비상한다. 목회자가 보행자가 되면 교회는 걸려 넘어지고 터지고 찢어지기 쉽다. 목사가 hovering을 앙모하며 믿음으로 비상을 누릴 때 그를 따르는 교회도 보행자에서 비행자가 될 수 있다. 목사가 먼저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자가 되자. 설교를 위한 공부로 성경을 열었다가 닫지 말고, 지금 자신에게 말씀하시며 곁에서 문 두드리시는 주님을 영접하자. 목사의 가슴에 말씀을 통하여 주의 영이 충만하면 교회는 말씀을 사랑하면서 주의 영을 앙모한다. ‘교회는 목사만큼 큰다’는 고전 같은 명언을 잊지 말자. 누구도 탓하지 말고 누구에게 윽박지르지 말고, 자신을 탓하고 자신을 윽박질러야 한다. 말씀으로! 말씀은 검이다. 그 검을 교회나 세상을 향하여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목사인 우리에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먼저 목사 자신에게 그 칼이 사용되어 아프게 하고 울게 하고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목회자가 죽으면 비상하게 된다. 교인들에게 죽는 게 아니다. 말씀으로 죽으면 다시 살게 하신다.

 

12.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려 하신다’(고후 1:4)고 하셨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린도후서 1:4)

구약의 선지자를 부르시고 하나님은 명령하셨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1)

우리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hovering안에서 교회를 hovering하는 자들이다. 망한 것 같고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이 그에게 명령하셨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다(요 21:15~17).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15~17)

우리도 배신자요 실패자인 베드로와 같지만, 그를 다시 찾아오셨듯이 주님은 낙망 중에 빠진 우리도 다시 찾아오신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주님의 양들을 떠나지 말고 다시 가서 먹이고 치며 그들을 위로하라고! 그러면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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