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2) 교갱협 제27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오늘 이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너무 잘 아는 말씀이지요. 지난 7월말에 사무국으로부터 설교 본문과 제목을 정해 달라는 소식을 듣고 사실 당시 제 마음을 가장 많이 붙잡고 있고 제가 몰두되어 있던 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 더 긴 말씀이 필요 없는 그런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영성수련회로 모였는데 좀 더 편하고 좋은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았겠는가 어젯밤까지 후회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이 말씀 전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제가 이 본문을 선택하게 된 것은, 우리만큼은 사람들이 가는 길, 달려가는 그 넓고 편한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한 길로 가보자 해서 시작하게 된 운동으로 이해합니다. 나 자신을 갱신하고, 나 자신의 갱신을 통하여 내가 목회하는 교회, 그리고 교단과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자는 기치를 내어들고 작고하신 옥한흠 목사님과 여러 선배 목사님들이 시작한 운동입니다.

당시 우리 교단이나 한국교회의 상황이 이 운동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다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우리는 주께서 원하시는 그 길로 가보자 해서 교갱협이 시작하게 되었는데, 처음 시작될 때 보다 지금의 상황은 훨씬 더 안 좋은 거 같아요. 그래서 더 교갱협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그런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좁고 협착한 길로 가도록 주님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 길로 들어가는 자는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보시는 대로 말씀의 핵심이 뭐예요? 좁은 문 협착한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길이다. 큰 문,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항상 지금 내가 서있는 이 길이 좁고 협착한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마지막이 생명이냐 멸망이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생명이냐 멸망이냐 하는 문제는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와만 관련이 되지, 다른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만 생명이냐 멸망이냐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도 이에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고 이 길로 가야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를 믿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은 고행주의나 남들보다 힘들고 어렵게 예수를 믿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좁고 협착한 길로 걸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7절 보면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느니 나는 양의 문이라"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면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문이시고, 생명의 문이십니다. 그런데 좁은 문이십니다. 왜 예수님이 좁은 문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왜 예수 믿는 것이 쉽지 않아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 이유가 뭡니까?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죄인이기 때문이지요. 죄인은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도록 되어있어요.

본문의 크고 넓은 문은 세상의 타락된 길을 걷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본래가 다 그 길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본래 그 길에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 길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냥 살던 대로 살면, 그게 넓은 길로 가는 거예요. 그렇지만 멸망에 이르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속히 결단하고, 그 넓은 길을 떠나서 좁은 문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되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 무엇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느냐,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고백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죄인이 아닌 의인은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요. 그렇지만 죄인은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인인 줄 깨달았고, 그래서 인정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일 자체가 어렵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기숙사 생활을 했었는데, 제 방에 나이가 많은 선배님이 한 분 계셨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예수를 안 믿겠다는 거예요. "기독교는 기분이 나빠서 예수를 못 믿겠다." 그래서 제가 "뭐가 기분이 나쁘단 말입니까?" 그러자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나쁜 짓 안 했고 착하게 좋은 일만 하면서, 법도 아주 잘 지키면서 살았다. 그런데 왜 나보고 죄인이라고 그러느냐? 불교는 나름대로 착하게 살고 선행을 많이 베풀고 살고 덕을 세우고 살면, 내가 수석 지주가 될 수 있다고 그러지 않느냐, 능력을 인정해 주지 않느냐? 한데 기독교는 죄인이라는 전제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게 기분이 나빠서 나는 예수를 안 믿겠다."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바로 그 부분입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로움, 가능성, 유능함이 완전히 부정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과 잘 맞나요? 아니예요. 참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노력을 쏟는 모든 일들이 다 무엇을 위한 것들입니까?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입증하기 위한 것들 아닙니까? 말은 겸손한 척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지만, 심지어 예수 믿는 우리까지도 기회만 있으면 스스로를 능력 있는 사람,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유능한 사람으로 입증하고 싶어합니다.

세리와 함께 성전에 올라갔던 바리새인의 주장도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런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는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는 그 자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하는 사실이지요.

그러면 협착한 길은 뭐예요? 달리 구별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만, 주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것 자체가 좁고 협착한 길로 걸어가는 일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왜 신앙 생활이 좁고 협착한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까? 우선 신앙 생활 자체가 만만치가 않아요.

여기에 협착하다고 하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압박하다, 억압하다, 괴롭히다'는 뜻인데 그게 예수 믿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억압하고, 압박하고, 괴롭히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선 신앙 생활의 환경, 세상의 구조, 세상의 시스템 자체가 반신앙적입니다. 세상은 절대로 신앙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세상은 누구의 지배하에 있습니까? 세상 신, 어둠의 영, 사탄의 지배하에 있잖아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에베소서 6:12) 그러므로 그런 세상 한복판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만 그래요? 아니에요.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가 너무 세속화되어버렸어요. 목회가 너무 세속화되어 버렸어요. 어떤 분이 하셨던 말씀인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세속화는 위를 향해야 할 우리의 관심을 땅으로 끌고 내려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위에 것을 찾아야 할 우리가 세상의 것을 찾고 추앙하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세속화이고 교회의 세속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목회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위에 것입니까 땅의 것입니까? 그게 목사들이 함께 모였을 때, 노회로 모이고 총회로 모였을 때, 무엇을 위해서 다투고 토론합니까? 교회가 너무 세속화되어버렸어요. 교권의 장악을 위해서는 모든 편법과 방법을 다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만큼은 좁고 협착한 길로 가보자 해서 시작한 운동이 교갱협 운동입니다. 쉽고 편하게 살고, 목회한다면 교갱협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하나, 신앙의 길이 좁고 협착한 길인 이유는, 사실 이 말씀은 보다 본질적인 의미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잠언 3장 5~8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본문은 지혜의 왕 솔로몬이 그 아들들에게 혹은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주었던 말씀입니다.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는가 하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내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성경에서 이 '명철'이라고 하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곳은 이 구절밖에 없습니다. 다른 데는 다 명철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명철'이 뭐지요? '명철'은 이해력, 통찰력이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세상살이를 통해 얻은 자신의 이해력, 자신의 통찰력, 삶의 노하우, 삶의 지혜, 그것이 명철입니다. 우린 누구나 세상을 살아본 경험에 의해서 내 안에 나름대로의 명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그 '명철'이 어떠하던가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들 많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우리의 명철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 살면 망한다. 세상 살아가는 방법은 따로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 가운데에서 우리 신앙인들의 갈등이 있고 고민이 있는 것이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 바로 그 상황에서 자신의 명철을 버리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길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쉽지 않다는 거예요. 내 명철을 포기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체가 좁고 협착한 길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신의 명철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신뢰하면서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지도해 주십니다.

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기 이 '지도하신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야, 이 길로 가, 저 길로 가" 하고 가르쳐 주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명철'이라고 하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울퉁불퉁한 것을 평탄하게 만들어준다, 구불구불한 것을 곧게 펴주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함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나의 울퉁불퉁한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거예요. 구불구불한 길을 곧게 펴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는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살아. 여호와를 신뢰함으로 살아"라고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특히 목회가 더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목회 노하우를 쌓아 놓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가 되면 생각할 필요 없이 '아, 그때는 이렇게 해야 돼.' 하는 것이 우리 안에서 튀어나오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냐? 하는 문제에요. 그때 나로부터 나오는 이해력과 통찰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함으로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목회의 길도 평탄하게 만들어주시고 곧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목회의 길을 지도해 주십니다.

쉽지 않은 결단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지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똑같은 내용이 시편 1편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가 다 잘 아는 말씀이지요? 이 시편의 1편 1절에 말씀하는 그 악인이 누구이고, 죄인이 누구며, 오만한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말씀을 받을 때마다 “아, 그 악인? 죄인? 오만한 자?” 우리 밖에 있는 어떤 사람을 생각하거든요.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 '아, 그 사람들 뒤를, 그 방법을 쫓아가지 말아야 돼. 그 사람들이 앉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우리가 앉지 말아야 돼.'라고 생각을 합니다. 근데 정말 그래요? 아니예요. 지금까지 살펴본 이 말씀에 따르면, 그 악인, 그 죄인, 그 오만한 자는 바로 나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너무 쉽게 자신의 명철을 따라 살아버리고 마는 우리 자신이 악인이고 죄인이고 오만한 자인 거예요. 오만하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냐, 그 방법으로는 안돼 이렇게 해야 돼.' 목회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나를 꺾어야 되는 거예요.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서도 나를 꺾어야 되고, 목회 생활에서도 그 나를 꺾어야 됩니다. 나 자신의 가장 큰 적은 나라고 그러잖아요. 바울 사도도 그게 제일 어려웠어요. 그래서 그것을 제일 많이 고민했어요.

로마서 7장 19절 말씀이지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래서 탄식하잖아요.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신앙생활에서 가장 심각한 싸움은 세상과의 싸움도 아니고 마귀와의 싸움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에베소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에베소서 4:22)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거듭난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아직도 내 안에 썩어져가는 구습을 쫓게 하는 우리의 옛사람의 본성이 살아있다는 말이예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요. 누군가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돌려 대라고 했어요. 누군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가라고 하셨어요. 내 겉옷을 갖고자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구원받을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예요.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돼요? 안돼요. 그런 삶은 아주 낯설어요. 예수 믿는 10년이 되고 20년이 되고 50년이 되었는데도 그게 가능해요? 목사 되고 전도사 되어도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예요. 신앙생활은 그 썩어져가는 구습을 벗어버리고 사람의 인격과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은 외부에 있는 적과 싸우기 전에 나 자신과 싸우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투쟁적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성령을 거스르고 살고자 하는 날 복종 시켜야 합니다. 내가 극복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 생활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좁고 협착한 길이게 때문에 쉽지 않아요. 쉽게 할 수 있는 신앙 생활은 없어요.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는 목회 생활은 없어요. 쉽고 편한 길은 넓은 길이고, 신앙인은 좁은 길입니다.

이 길은 좁고 협착한 길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 길에는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은 여기 없습니다. 권력 없고, 세속적인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여기 없습니다. 이 길을 걸어간다 하면서 그것을 찾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없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들은 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들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들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서고 좁고 협착한 길로 들어선다고 하면서, 자꾸 여기에 없는 것들을 찾는 거예요. 없는 것들을 추구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어떤 분들 때문에 교회가 어렵고 교단이 어려워집니다.

개혁 신앙을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지 않아요.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행하고자 해요.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할 때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고백하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되도록 해드려야지요. 우리는 이미 좁은 문안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겠다고 결단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면 저쪽에 있는 것들은 포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길에서 찾고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 길로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지막은 멸망인 거예요. 오늘 주님이 하신 말씀의 결론은 그겁니다. "그리로 가는 자가 많다" 뭐예요? 이 길로 가는 사람들은 적다는 거예요. 이 좁고 협착한 길, 압박이 있고, 방해가 있고, 공격이 있는 바로 이 길...

코로나 때문에 목회가 많이 힘들어졌단 말씀들을 합니다. 그런데 목회는 본래 쉽지 않아요. 본래 어려워요.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는 목회 생활은 없어요. 우리는 오늘도 어느 길로 갈 것인가의 싸움터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쉽고 편한 길인가, 좁고 협착한 길인가. 인생 쉽게 사는 방법?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마지막이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생명에 이르기 위하여 이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번 수련회의 주제가 ‘비상’인데 비상은 본질의 회복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힘으로 비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비상시켜 주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좁고 협착한 길로 걸어가라고 선택받은 사람들이고, 좁고 협착한 길로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견고히 서서 개인의 신앙적인 삶을 살고 목회적인 상황들을 감당해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비상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결단하고 이겨내고 걸어가시면 하나님이 분명히 여러분이 가는 길을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 은혜를 우리 모두가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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