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2) 교갱협 제27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이사야 40장 27~31절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들어가면서

유한한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요즘 주목을 받는 미래 학자들은 마치 예언자처럼 미래를 이야기한다. 해가 바뀔 때마다 미래학자들의 화두는 새로운 트렌드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2019년 코로나가 시작되던 해에 발간된 『초 예측』이라는 책에서 미래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인류는 향후 수십년 안에 ‘핵전쟁, 지구온난화, 그리고 과학기술에 의한 실존적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1) 유발하라리 공저 외 5인, 정현옥, 오노가즈모토 역, 『초예측』,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9.

그러나 그의 예측에서 COVD 19위기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당면한 코로나의 위기는 미래학자나 AI도 예측하지 못한 초유의 일임을 뜻한다. 이럴 때 사역자는 전 세계를 위기 상황에 몰아넣은 코로나가 이 시대에 주는 교훈과 그 대안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기도하며 그 답을 성경에서 찾아 전해야 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지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과거 역사 속에 현재가 있고 그 역사를 통해서 당면한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예언적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몇몇 학자들에 의해 예언자적 설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제시되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인 윌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예언자적 목회의 임무는 우리를 둘러싸고 지배하는 문화에 익숙해진 의식과 인식에 대응하는 의식과 인식을 낳고 키우고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또 지배적인 문화에 대응하는 대안적 의식을 깨우치기 위한 ‘비판(criticism)과 동력화(energizing)’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2) 김창훈, “예언자적 설교의의와 중요성,” 리폼드 뉴스, 2013.10.18.

따라서 우리는 이사야 40장의 연구를 통해 당면한 우리의 문제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찾고자 한다.

 

1. 위드 코로나의 상황과 교회

COVID 19는 우리에게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서 반복되던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변이 바이러스의 출몰과 경제 불황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등으로 인해 이전과 전혀 다른 ‘고환율, 고유가, 고물가’라는 3고 시대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세계의 장기불황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한국경제는 1997년 IMF 사태 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예측을 하기도 한다.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한국 기업들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충격을 약 30% 정도 더 크게 체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 한국 경영자 총협회, 한겨레, 2020.5.10.

교회는 위드 코로나 상황에서 대면 예배는 회복되었으나 교인 출석과 재정은 감소 추세이며 대내외적인 상황을 종합할 때 이전 상태로의 회복은 요원 하기만 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역자들이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될 때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미 해군 중장으로 예편한 ‘제임스 본드 스톡데일(James Bond Stockdale)’은 월남전에서 포로로 가로 90㎝, 세로 275㎝ 독방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가 8년 만에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기자들이 그가 무사히 살아남은 비결을 묻는 인터뷰 요청에 상당수의 포로들이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손꼽으며 “나는 곧 풀려날 거다”라고 낙관하며 기다렸지만 지연이 되자 실의에 빠져 죽었다. 그러나 스톡데일은 자신이 쉽게 풀려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장기간 버텨야 한다는 각오로 하루 하루를 견디다 보니 마침내 살아 돌아왔다는 역설적인 답변을 하였다.

이러한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의 교훈은 위드 코로나 상황에서 막연한 낙관론보다 어려움을 인정하고 현실을 이겨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역설적인 교훈을 제공한다.4) 나무위키, 2022. 05. 13.

 

2. 성경 계시의 점진성(Progressive Revelation)

핫지(Hodge, Charles)는 ‘신적 계시의 점진적 특성은 처음에는 모호했던 계시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명확해짐을 볼 수 있다’고 했다.5) Hodge, Charles, Systematic Theology, 1, Peabody: Hendrickon, 2003. 446.

특히 이사야서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에 대한 경고가 점진적으로 잘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2.1. 이사야의 고발장

이사야가 초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해 신랄하게 고발하는 내용을 보면 그 백성이 얼마나 배은망덕한지 심지어 가축만도 못하다고 책망하였다.

(이사야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그들이 1) 하나님을 거역하고(1:2, פָּשְׁעוּ, פָּשַׁע, 파샤), 2)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며(1:3, לֹא הִתְבּוֹנָן, בּין, 빈), 3)하나님을 업신여기는(1:4, נִאֲצוּ, נָאַץ, 나아쯔)이라고 한 동사들은 돌이키기 어려운 확고한 상태를 뜻하는 완료형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거창한 기도를 드렸으나 하나님은 도리어 가증히 여기시며 견디지 못하겠다고 거절하셨다(사 1:11, 13,15). 

 

2.2. 죄악에 대한 심판 경고

이사야는 그에 대한 여러가지 징벌들을 예고하였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방인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사야 1:7)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그러나 유다와 예루살렘은 그와 같은 심판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돌이켜 회개하지 않고, 열왕들이 바뀌어도 이방 나라의 문화와 종교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었다. 그 대표적인 왕이 아하스로 바알 신상을 만들고 이방 제단을 본떠 만들어 그 위에서 제사하고 심지어 힌놈 골짜기에서 어린아이를 불사르는 희생제사까지 하였다(왕하 16:1-14).

 

2.3. 깨닫지 못하는 백성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처럼 선지자를 통해 거듭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였지만 오히려 왕들이 바뀔수록 죄악이 가중되었다. 

(이사야 6: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여기서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식별하다, 이해하다, 주의하다, 통찰력이 있다(תָּבִינוּ, בּין,빈)’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답답한 상태이다. 하나님이 심판을 미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 회개할 때를 기다리며 은혜를 베풀기 위해 불쌍히 여기며 계속기다리는 것이다.

(이사야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여기서 ‘기다리시나니’라는 말은 돌이키기를 대망한다(יְחַכֶּה, יְחַכֶּה, 하카)는 미완료 동사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3. 히스기야의 아이러니

히스기야는 부왕 아하스가 세웠던 이방신의 산당과 우상들을 깨뜨려 버리고, 무너진 제단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세에게 준 여호와의 계명을 힘써 지킨 극소수의 왕 중에 한 사람이었다. 

(열왕기하 18: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3.1. 기도의 사람 히스기야

앗수르 왕 산헤립은 아하스와 달리 앗수르를 등지고 친 애굽 정책을 쓰는 히스기야를 압박하기 위해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왕과 백성을 이간질하는 편지를 써 보내었나 항복하지 않고 성전에 올라가 편지를 펼쳐 놓고 하나님께 눈물로 통곡하며 기도한 것은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이었다.

(열왕기하 19:19)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의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과 십 팔만 오천 명을 몰살시키자 앗수르 왕은 낙담하고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니스록 신전에서 암살을 당함으로 히스기야는 나라를 구하였다. 

또 히스기야는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십오 년이나 연장시키고 또 앗수르의 손에서 예루살렘 성을 구원하여 주겠다는 응답을 받았다.

(열왕기하 20: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기도의 사람 히스기야는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위기를 만났을 때 최상의 대안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임을 가르치는 반면교사이다. 역시 신약 성경도 동일한 맥락으로 위기 상황에서 최선책은 기도임을 가르치고 있다.

(야고보서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여기서 ‘구원하리니(σώσει, σῴζω 소조), 일으키시리니(ἐγερεῖ, ἐγείρω 에게이로)라는 구체적으로 약속을 의미하는 미래 능동태이고 ‘받으리니 (ἀφεθήσεται, ἀφίημι 아피에미)’ 역시 약속을 뜻하는 미래 수동이다. 영어 번역 성경 NIV는 ‘구원하리니, 일으키리라, 사하심을 받으리라’ 모두를 약속을 뜻하는 ‘will’ 로, KJV 성경은 ‘shall’로 번역하였다. 

 

3.2. 히스기야의 치명적인 실수

히스기야 왕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앗수르 제국의 세력이 기울고 신흥 바벨론 제국이 득세하였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이 자기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의 사절을 통해 보낸 편지와 예물을 받고 크게 감동하여 왕궁의 보물과 군기고의 무기와 창고까지 남김없이 다 보여주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이사야 39:2)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여기서 ‘기뻐하여’는 매우 흡족해하는 모습이고, ‘보여 주었으니’는 ‘주목하다, 지각하다, 바라보다, 조사하다’라는 뜻의 바브연속법 미완료로(וַיַּרְאֵם, רָאָה, 라아) 군사 기밀에 속하는 것까지 공유하는 것으로 친 바벨론 정책으로 선회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를 짐작케 한다.

히스기야의 그 같은 저의는 지금까지 하나님만 의지하던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그로 인해 후일에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최악의 실수이다. 하나님은 즉시 이사야를 보내어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절에게 개방했던 그 모든 것들이 남김없이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최악의 위기가 올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이사야 39:6)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3. 최악의 시나리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 싸인 약소국의 공통점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중 외교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안에는 친 앗수르, 친 애굽, 친 바벨론파로 사분되어 외세를 불러들임으로 패권경쟁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 같은 등거리 다자외교는 오히려 배신자로 몰려 사방으로 공격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 같은 현상은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동족이 양분되어 대결하고 평화 유지를 위해 열강들 사이에서 다자 외교라는 줄타기를 하고 있는 현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결국 유다와 예루살렘은 이사야와 예례미야가 예언한대로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이사야의 예언대로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에게 보여주었던 모든 것들이 바벨론으로 이거 되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열왕기하 24:13) “그가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칠십 년은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면서 조상대대로 지켜온 이스라엘의 종교와 문화와 전통이 점차 약화되어 바벨론 화 됨으로 이스라엘이 소멸될 위기상황이기도 하다. 이는 교회가 마땅히 지켜야 할 전통 가치를 소홀히 하고 점차 세속화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교훈해 주는 것이다. 

 

4. 최상의 반전

이스라엘은 소멸될 위기에서 스스로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지킴으로 소멸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언약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는 말이 212회 언급되어 있는데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위기 중에 있을 때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고 위기에서 건진 대표적인 사건이 출애굽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애굽의 고센 땅을 가리켜 ‘내 백성이 거주하는 땅’이라고 구별하였고(출 8:22), 애굽 사람에게 멸시와 차별을 받고 있는 최하위 계층인 노예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며 구원을 약속하였다.

(출애굽기 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4.1. 거듭된 위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칠십 년간 노예가 된 근본 원인은 여호와를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릴 자격을 상실하였지만 하나님은 한결같이 그들을 ‘내 백성’이라 불렀다.

(이사야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벨론 포로가 되어 징벌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거듭 ‘위로하라 위로하라(נַחֲמוּ, נחם, 나함)고 한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심정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강조용법이다.

 

4.2. 따뜻한 위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이 길어지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소망이 보이지 않게 되자 마음을 굳게 걸어 잠겄으나 하나님은 ‘마음에 닿도록’ 포로에서 자유하게 되고 죄악을 사함 받았다는 선포는 시기 적절한 따뜻한 위로이다.

(이사야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위로는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고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욥 5:18, 합 3:2)’. 6) 폴하우스, 장세훈역, “이사야서의 정경 해석법 구원하시는 하나님(2)”, 「성서 사랑방」 겨울 14호 (2000): 82.

어느 시대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불경기와 같은 재난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가장 큰 위기는 이전으로 되돌아갈 소망이 단절된 때에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인 아름다운 소식이 가장 절실한 때이다.

(이사야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칼빈(Calvin)은 이 위로가 역사적으로는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죄에 포로가 된 영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위로라고 하였다(J. Calvin, Commentary, The Book of Is, pp.200-220). 7) 유재원, “이사야 40장 주해-이스라엘의 해방과 오실 왕,” 「신학지남」 (1983): 8.

지금 세계는 COVID 19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건강과 재물을 잃고, 코로나가 종식되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의 소식이다.

 

4.3. 이스라엘의 불신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된 것은 갑작스럽거나 우연이 일어난 일이 아니다. 지난 날 선지자들의 예언을 경청하지 않고 불순종했던 것처럼 고난 시간이 길어지고 회복의 소망이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마저 받아드리지 않고 불신하였다.

(이사야 40: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이 부분을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면 바벨론의 포로들이 불신과 실의에 빠져 절망하고 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사야 40:27) “우리는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고 탄식들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들이 이렇게 탄식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온갖 고난을 다 당해도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 두신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절망적인 말을 해야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육신적으로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불신의 감옥에 갇힌 포로가 된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기도하였으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고 미래의 희망이 없어지자 기도 소리는 잦아 들고 점차 마음문을 닫고 기도마저 중단하였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위기 상황이 지속되고 내일의 소망이 보이지 않게 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4.4. 믿음의 회복

하나님이 바벨론 땅에서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무기수로 버려 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칠십 년의 기한이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기한이 끝나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 이미 예언되었다.

(예레미야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설령 그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해도 상황과 처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 같은 맥락이 성경에 자주 나오는 ‘그 날, 그 때, 이르지 아니하였고’라는 말이다. 바른 기도는 내 때에 하나님을 맞추려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나를 맞추며 인내하며 중단하지 아니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이 불신에 쪄 든 이스라엘을 보실 때 가장 시급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회복이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을 상기시켰다.

(이사야 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이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땅에서 피곤에 지치고 매우 곤비한 상태요 회복의 소망이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는 것이 위기극복의 최선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믿음의 출발도 나약해진 믿음을 회복하는 것도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믿음 없는 자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이 연약해질 때 그 믿음을 회복시켜 주는 자비로운 하나님임을 믿고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모든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최선책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사백 년간 종살이를 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구원하고자 할 때 모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바로 왕의 권세가 아니라 자기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보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질문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답변하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이지만 창조주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자’라는 믿음은 위드 코로나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하는 이유이고 또 모든 의구심과 불신을 단번에 열 수 있는 마스터 키이다.

 

5.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끌려가 칠십 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그 육체와 영혼이 매우 피곤하며 곤비(困憊)해질 수밖에 없다.

(이사야 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여기서 ‘곤비하며(야가)’라는 말은 ‘수고하다, 피곤하다, 싫증나다’라는 뜻의 미완료 상태이다. 소년은 하루 종일 뛰어 놀고도 피곤함을 모르며, 장정은 가장 혈기 왕성한 때로 군인으로 징집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바벨론의 포로 생활은 소년이나 청년일지라도 피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와 같은 피곤함은 바벨론 포로들 만이 아니라 위드 코로나 시대에 소년, 장정, 노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매일 경험하고 있으며 누구보다 교회 회복의 소망이 보이지 않는 이 시대의 사역자가 가장 많이 겪는 것이다.

 

5.1. 평탄한 길을 약속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피곤함에 지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좋은 소식은 포로에서 자유를 얻고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자유와 해방을 얻어도 피곤함에서 자유 할 수 없는 까닭은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광야와 사막과 골짜기와 언덕과 험한 골짜기를 지나야만 하는 험난한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을 평탄케 하여 큰 길을 만들고 산과 언덕을 깎아 흙으로 골짜기를 메워 높은 곳은 낮게 하고 낮은 곳은 높여 평탄케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사야 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2. 새 힘을 약속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간 길이 다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는 길이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여정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고 갈 수 없는 그 길을 피곤하지 않고 갈 수 있는 새 힘을 약속하였다.

(이사야 40:4)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새 힘’이란 말(할라프)은 ‘관통하다, 갈아입다, 대신하다, 갱신하다, 새롭게 하다’는 뜻의 미완료로 선천적인 체질이나 운동으로 얻는 체력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공급해주는 새로운 힘을 덧입는 미완료이다.

 

5.3. 독수리 같이 날아오르는 힘

장차 바벨론 포로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과해야 할 길은 1,200km에 달하기 때문에 가다가 지쳐 포기하기 쉬운 고난의 여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길을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힘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이다. 후일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 예언대로 예루살렘 귀환이 이루어졌다.8) 김정우, 「이사야 세미나 강의안 2」, 한국신학정보연구원, (2022): 85.

 

5.4. 새 힘을 얻은 이스라엘

예루살렘 귀환은 삼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길이 힘들지만 칠십 년간의 수고하여 얻은 재물과 온 가족과 가축을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설레 임에 피곤이 오히려 보람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새 힘’ 이다. 후일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바사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귀환할 때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당도하여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것은 하나님이 약속한 평탄케 한 길과 독수리가 날개 치며 비상함과 같은 새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느헤미야 2:6)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2:9)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위드 코로나가 ‘종식될 것인가 아니면 더욱 악화될 것인가?’ 라는 피곤한 길을 가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그와 같이 하나님이 덧입혀 주시는 새 힘이다. 더구나 교회의 침체와 감소로 회복의 소망이 없어 보이는 목회현장에서 가장 절실한 것도 성장 한계상황라는 먹구름을 뚫고 독수리처럼 솟구쳐 ‘비상’할 수 있는 새 힘으로 갱신하는 것이다.

 

6. 새 힘의 진원지

문제는 어떻게 해야 독수리처럼 비상할 수 있는 새 힘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역자들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독서하고 때로 좋은 세미나를 찾는 이유도 이 같은 새 힘을 얻기 위한 자구책일 것이다. 그러나 독수리처럼 비상하는 새 힘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하지 않고 오로지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but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they will walk and not be faint.”

여기서 ‘앙망(וְקוֹיֵ. קוה, 카바)’이라는 말은 ‘기다리다, 기대하다, 바라다, 소망하다’라는 뜻의 현재 분사형으로 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하지 말고 기다리기만 하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 소극적으로 보이고 심지어 게으르게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약속하고 기다려본 사람은 가만이 있는 것 같아도 그 마음은 설레 임과 간절함으로 쉴 사이가 없다.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다. 소극적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모습이 된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는 앙망이 우리가 무엇을 하는doing이 아니라 무엇이 되는 being으로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doing 하겠다는 약속이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기다림은 앞서간 시대에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품었던 마음이고 지금도 성령을 기다리고, 기도 응답을 기다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 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모습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과 바벨론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피곤한 삶을 사는 동안 그들이 해방을 얻기 위해 무엇을 했으며 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자유를 위해서 무엇을 하다 가는 더 고통스러워졌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단지 하나님을 앙망하며, 하나님을 기대하며 약속을 믿고 그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어려운 현실을 견디어 내는 중에 때가 되니 출애굽과 출 바벨론의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셨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달리 곧 나타날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이 올 것을 믿고,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사는 것이다. 나의 주장과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자체가 바로 신앙생활이며 신상의 교육현장이다.” 9) 정중호, 『성서주석 이사야2』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83-85

마치 우리가 죄에서 자유 함을 얻기 위해서, 구원함을 얻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앙망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역자들이 위드 코로나 상황에서 현재가 피곤하고 미래가 암담하게 생각되는 위기 상황에서 해야 할 최선의 일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해야 하는 것임을 교훈하고 있다.

 

7. 한국교회의 현주소

위드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위기는 과연 무엇인가? 세상이 경제적인 침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교회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 보다 나은 부흥과 성장을 꿈꾸며 역동적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위기 중에 위기이다.

“모든 시스템은 본래부터 성장 요인(Growth factor)과 성장 한계요인(Limit factor of Growth)이 존재한다. 성장 초기에는 성장 요인이 강하게 작동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성장의 한계 요인이 강하게 작동한다. 성숙기에 접어들면 성장의 한계 요인이 더 강하게 작동하면서 성장 요인의 힘을 상쇄시킨다. 성장 속도는 느려지고 종국에는 성장이 멈춘다.” 10) 최윤식, 최현식, 『앞으로 5년 한국교회 미래 시나리오』,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0.

그렇다면 창공을 덮고 있는 먹구름처럼 현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장 한계요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돌파하고 독수리처럼 비상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풀어가야 할 숙제이다.

 

7.1. 전체 인구 감소

한국의 전체 인구는 2017년에 5,194만명을 최고치로 정점을 찍은 후 점차 감소세로 들어서서 2021년 에는 9만 1천 명이 감소했는데 이는 정부가 수립된 후 첫 인구 감소이다. 오는 2067년에는 총인구가 3,929만명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정점을 찍었던 2017년 보다 무려 1,265만명(24%)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KBS S 뉴스, 2022. 07. 28). 

 

7.2. 교회 인구 감소

문제는 그 같은 국민 전체인구 감소는 교회인구 감소와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한국교회의 미래 세대인 주일학생 숫자의 급격한 감소로 한국교회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다.

2021년 9월 주요 장로교단 총회에 보고된 통계를 보면 교인 감소가 예장합동 17만 3378명, 예장통합 11만 4066명, 예장고신 1만 750명, 기장 7594명, 기감 5만 6729명, 기성 3만 741명 감소했다. 이를 종합하면 주요 교단만 40만 명 감소하였고 10년 전보다 176만 명이 빠져나갔다.11) 뉴스엔조이 2021.10.07. 최승현 기자

“예장통합은 지난 10년 동안 어린이 교육부서가 38만 명에서 28만 명, 성결 교단은 30% 감소했다. 대도시 절반 이상이 주일학교 자체가 없고 2035년에 한국교회 주일학교는 미전도 종족에 해당하는 숫자로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12) 최윤식, 최현식, 『앞으로 5년 한국교회 미래 시나리오』,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0. 88, 89, 195.

 

7.3. 교회에 대한 대 사회 이미지

교회에 대한 사회적인 호감도는 지역 전도와 교회 성장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에 관한 조사 결과 1) 한국교회가 영적인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8.4%). 2) 교회 지도자의 자질이 부족하다(76%). 3)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관심이 많다(71.1%). 4) 지역 봉사와 사회적 역할을 못하고 있다(69.9%)고 답했다.13) Ibid., 90.

 

7.4. 해외 선교의 침체

지난 날 한국교회의 자랑 중에 하나는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해외 선교의 확장이었다. 그렇다면 교단 선교의 현주소는 어떠 한가? GMS는 지난 115년 동안 3,5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2022년 3월 30일 현재 100개국에 2,563명이 사역을 하고 있다. 90%는 대도시 및 지방도시에서 사역하고, 나머지 기타지역에는 단지 10%정도만이 사역하고 있다. GMS는 선교사 숫자로만 보면 대단히 자랑할 만하다. 그러나 GMS는 내면적으로 전략적 배치 혹은 재배치, 전문 선교동원과 훈련, 사역의 다양한 전문영역 개발과 선교전략, 그리고 선교사들의 은퇴와 복지 등,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다. 현재 50대 이상이 전체 선교사의 74.2%%이다. 이는 향후 20년 이내에 75%가까이 되는 선교사가 은퇴를 하게 된다. GMS는 코로나로 인해 89개국에서 1402명의 선교사가 귀국했고, 그 중에 재 귀임한 선교사는 69개국에 638명에 불과하다. 코로나 확진도 43개국의 135명이나 되었고, 그 가운데 6명이 소천하였다.” 14)  전철영(GMS 선교사무총장), “펜데믹에서 GMS의 전환과 미래,” GMS 선교대회, 2022.6.23.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미래 한국교회 선교의 성장한계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모든 교회는 1) 지속적인 성장, 2) 현상태로의 정체, 3) 지속적인 감소 중에 지속적인 감소는 선교의 위축과 철수와 진단의 단계를 거쳐 서구교회와 같은 침체의 위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적신호이다.

 

8. 유럽교회의 침체가 주는 교훈

서구 유럽 중에 영국과 독일은 세계 개신교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나라들로 세계 열방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신학을 정립하여 세계 교회들에게 새로운 신학을 보급하는 도서관이다. 

 

8.1. 영국교회의 부흥과 쇠퇴

영국교회의 부흥의 원인에 대해서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회심, 지속적인 기도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 복음 설교와 능력 있는 설교자들, 성경적인 교리의 강조, 구속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전도와 영혼 구원에 대한 불타는 열정, 피 묻은 십자가 자랑,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하심에 대한 갈증, 거룩한 삶과 경건 추구, 성령의 부어 주심” 임을 강조하였을 때 부흥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는 쇠퇴하여 형식적이고 많은 사람들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일뿐 많은 수가 교회 출석을 하지 않고 있다. 영국교회의 출석 교인이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주일학교에 나오는 수도 떨어져 나가고 있다. 또한 교회 수와 목회자 수, 선교사 수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 모든 것이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신학교들이 문을 계속 닫고 있다.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다. 교회 건물은 점점 팔려 나가 상가로, 술집으로, 공연장으로, 절로 변해버렸다.

영국교회의 쇠퇴의 원인을 1) 성경의 권위 상실 2)개혁 신학의 퇴조 3)복음주의의 추락 4) 철학의 우위 사상 5) 설교 권위의 하락 6) 지나친 지적 관심 7) 영성의 상실이라고 손꼽았다. 있다.15) 김현배, “영국의 부흥운동사,” newspower , 2014.7.4.

 

8.2. 독일교회의 부흥과 쇠퇴

각 시대마다 참된 설교자들을 통하여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으로 가득했었고 교회는 회심자들로 가득했으며 곳곳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상실하고 예배를 등한시하고 형식적이고 하나님, 성경, 교회라는 의미를 잃어가고 예배 참석자 대부분이 노인들이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전반적으로 교회 수와 교인 수, 목회자 수, 선교사 수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

독일교회가 쇠퇴하게 된 주요 원인은 18세기 말부터 밀려온 이성주의, 계몽주의 합리주의, 현대주의, 이신론, 찰스 다윈의 진화론, 자유주의 신학, 세속화 등이다. 또 성경고등비평으로 인해 성경의 권위와 영감성이 무너지고, 개혁 신학의 퇴조, 복음주의 추락, 인간의 철학 우위 사상, 설교 권위의 하락, 지나친 지적 관심, 영성의 상실, 성령의 거역, 거룩 상실, 첫사랑이 식어지고,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가 잊혀 가고, 주일성수가 무너지고,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럽교회가 쇠퇴하는 원인 중 하나는 일 세대가 다음세대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실패함으로 다음세대들은 교회에 관심이 없고 교회를 떠나고, 교회는 다음 세대 준비에 속수무책이며, 교회에 젊은이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또한 신학교에서 지극히 작은 인원이 공부하고 있다. 교회는 다음세대들에게 말씀과 교리,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세계관, 세계선교, 복음적 평화통일의 비전 등을 잘 가르쳐 영적 리더로 양육해야 한다. 다음세대 없이는 통일도, 부흥도, 선교도 없을 것이다. 반면 이민자들의 증가로 무슬림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복음이 거부된 수많은 난민과 이주민들이 대량 유입되는 사태는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선교의 엄청난 기회이며 도전이다. 이제 무슬림들을 향한 선교는 피할 수 없는 사명이 되어 다가오고 있다. 유럽이 선교지가 되어가고 있다.16) 베르린 비전교회, “유럽교회의 쇠퇴의 원인,” 2021.07.25.

 

9. 여호와를 앙망하는 한국교회

위드 코로나는 위기가 아니라 더 큰 위기를 감지하게 하고 그 대안을 찾아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한국교회를 세계 교회 앞에 비상하게 하는 대 반전의 기회이다.

 

9.1. 어게인 처치(again church)가 아닌 어나더 처치(another church)로

성경의 역사와 교회사를 돌이켜 보면 한번 지나간 역사는 계곡에 흐르는 물처럼 역류하지 않고 흘러가버림을 알 수 있다. 지상 교회의 롤모델인 예루살렘 교회나 안디옥 교회는 사도행전에만 있을 뿐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그 교회들이 추구하던 성경적인 원리와 역동적인 삶의 교훈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오늘의 교회에 계속 공급하고 있다.

한국교회사에 보화와 같은 1907년 평양대부흥은 아무리 ‘어게인 1907’을 외쳐도 반복되지 않고, 1970년대 여의도광장에서 100만명이 모였던 빌리 그래함 집회와 같은 부흥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COVID 19로 침체가 가속화되고 있는 세계 교회가 이전상태로 회복되는 어게인 처치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발전과 쇠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전 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로 발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350년대 흑사병이다.  유럽을 강타하여 인구 3분의 1정도가 목숨을 잃었지만 쇠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로 발전하는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는 한 겨울 눈밭에서 옹이와 나이테와 마디를 만들며 겨울을 버틴다. 한 여름 태풍에도 꺾이지 않는 것은 그 나이테와 마디의 힘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는 위드 코로나 상황에서 위기를 맞고 있지만 이로 인해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뉴 모럴 교회로 전환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어야 한다.

 

9.2. 무엇을 하는(doing) 것이 아닌 무엇이 되는(being) 것

물론 한국교회는 위드 코로나 상황에서는 성장 장애물이 더 많아졌고 서구교회의 전철을 뒤따르는 것 같은 위기가 몰려오고 있다. 그 같은 위기는 사역자들을 더욱 피곤하고 곤비하게 하는 상황에서 최선의 일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일이다.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를 놀라게 했던 부흥과 민족과 국가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던 이전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을 하는 것보다 무엇이 되는 일에 집중하는 사역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후 세대의 사역자들은 보다 더 좋은 성장 조건속에 무엇을 하느냐 에 집중하면서 교회는 크고 화려해지고 사역은 다양화되었지만 부작용과 문제가 속출하며 갈등하는 교회들이 많아졌다. 교회가 정치적으로는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도덕적인 영향력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어느새 교회는 정체상태에서 감소상태로 바닥을 모르고 계속 하향 곡선을 그리는 위기 상황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역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방법론보다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 집중하는 사역자가 바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역자이다.

스펄젼은 ‘우리가 두 코스를 선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주님을 기다리며 우리의 힘을 새롭게 하거나, 아니면 나약함에 압도되는 것이다, 숨을 쉴 수 없다면 기절하듯이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기절할 수밖에 없다. 기도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은혜와 힘을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17) A Sermon of C. H. SPURGEON, “He giveth power to the faint”-Isaiah 40:29, At the Metropolitan Tabernacle Newington, On Thursday Evening, June 7th, 1877. 이는 아주 오래 지난 설교이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사역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다.

스코필드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은 고요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조용히 손을 뻗어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믿음이라고 하였다.18) Cyrus Ingerson Scofield, In Many Pulpits with Dr, C. Scofield, Wentworth Press, 2019, 11-20. 이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내면의 집중임을 교훈 한다.

오스왈트는 ‘높이 나는 독수리는 자기의 강한 날개 때문에 높이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날개를 받쳐 주는 기류 때문에 떠 있는 것이다. 앙망하는 자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들려져서 높이 날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을 말한다.’ 19) 존 와츠, 강성철역, 『이사야 하』 WBC 성경주석 24, 서울: 솔로몬. 2002, 184. 이는 성공했다는 사역자들이 그 성공을 왜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추락하는지에 대한 원인을 가르쳐주고 있다.

위기에 처한 교회의 참된 회복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동안 여호와를 앙망하기보다 다른 무엇을 앙망하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여호와를 앙망하여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비상하는 사역자들로 새로워져야 한다.

 

10. 비상하는 한국교회

위드 코로나는 출몰하는 변종 바이러스와 곤두박질하는 세계경제와 교회 성장의 위축과 회복의 소망을 잃은 시대에 목회를 하는 사역자들을 더욱 피곤하고 곤비하게 만들고 있다.

 

10.1. K-Church 비전

위드 코로나 상황에서 사역자들은 교회 성장을 위해 모든 기술과 방법을 동원해 보아도 침체하는 서구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 같은 위기에 마땅한 대안이 없다. 이 때가 바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여 이전과 다른 새 힘으로 갈아 입고 뉴 노멀 시대에 걸맞은 한국교회로 전환하여 세계 교회 앞에 비상할 최선의 기회이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세계의 문화를 선도해 나가고 방산 수출 국가가 되고 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지금 세계 교회는 위드 코로나라의 장애물을 뚫고 비상하는 ‘교회다운 교회, 예배다운 예배, 선교다운 선교’의 모델 교회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비상 시대에 비상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그 교회는 ‘방법이 아닌 본질과 외형이 아닌 내면’에 집중하는 사역자가 섬기는 교회이다.  

 

10.2. 여호와 앙망과 경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이방나라의 포로가 되어 고난을 받게 된 근본원인은 경건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만일 경건을 회복하면 다시 하나님과 소통이 회복된다고 약속했다.

(시편 4: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여기서 경건(חָסִיד, 하시드)이란 말은 ‘친절한 충실한’이란 뜻으로 하나님이 탄식하시는 시대는 세상에 경건한 자가 끊어진 시대로 ‘살인, 노략, 탐욕, 부정부패, 부도덕’이 만연한 세상이다(미 7:2-6). 

미가 선지자는 불경건한 시대와 야합하거나 비판하고 정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를 우러러 앙망하는 경건한 기도를 다짐하였다.

(미가 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여기서 여기서 ‘우러러(אֲצַפֶּה, צפה, 차파)’라는 말은 ‘바라보다, 주시하다’ 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는 경건한 자들의 공통된 모습으로 하박국 선지자도 위기 중에 하나님만 우러러보았다. 성경은 그같이 하나님만 우러러보는 자들을 경건한 자라고 일컫는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만 우러러보는 자이다.

 

10.3. 칼빈의 경건 신학

신구약 성경에 경건이라는 말이 73회 언급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경건은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어떤 종교적인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칼빈(Jean Calvin, 1509-1564)은 기독교강요(I.2.1.)에서 ‘경건(pietas)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온갖 은혜를 깨닫게 해주는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하나로 결합한 상태를 뜻한다’고 하였다.

유해룡 교수에 의하면, 칼빈은 ‘경건이 수도원적인 신비가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을 근거로 한 경건으로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주어지는 거룩한 선물이며, 경건이 증진되는 것도 자기 만족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역사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께 예배하도록 세워주고 또한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확립하게 하고 나아가 그것이 우리에게 인내와 겸손과 우리가 존경하는 이웃들에 대한 모든 사랑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우리를 일깨워 줄 때, 그것은 경건과 일치하는 것이다.’고 하였다.20) 유해룡, “칼빈의 영성학 소고,” 「장신논단」, (2000), 549. 참조. 

한편 김광묵 교수에 의하면, 칼빈이 말하는 경건은 단지 절대자를 향한 자기 초월만의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통해 그분과의 깊은 사귐을 누릴 뿐만 아니라, 이웃을 향한 겸손과 인내와 사랑의 섬김을 지향하는 ‘삶으로 서의 경건’임을 말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며, 사람의 생활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칼뱅의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주님으로 섬기며, 그분의 피조물인 인간과 그의 세계를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서의 거룩한 삶을 위한 경건이며, 그러한 측면에서 칼뱅의 경건은 “통합적 영성”으로서의 경건이다.21) 김광묵, “장 칼뱅의 경건과 현대신학적 과제”,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2013), 64-65.

위드 코로나 시대에 더욱 깊은 침체에 빠져 들고 회복의 희망을 상실한 한국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였는가를 냉정하게 돌이켜 보아야 하겠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내면에는 간절함과 감동과 설레임이 메말라가는 오늘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참된 경건은 칼빈이 말한 것과 같은 성경적인 경건이요,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다.

 

나가면서

이제 마무리를 하면서 교인 수는 때에 따라 증가할 수도 있고 감소할 수도 있다. 문제는 현재 남아 있는 교인이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은 건강과 재물을 잃었지만 교회는 그 보다 더 소중한 경건을 상실하였다. 1)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상실, 2) 교회와 예배에 대한 애착을 상실, 3) 설교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의 상실, 4) 불신 영혼에 대한 긍휼함과 구령심의 상실, 5) 대 사회적으로 교회에 대한 호감과 사역자들에 신뢰의 상실이다

위드 코로나 비상(非常) 시대에 세계를 향해 비상(飛上)하게 될 K-Church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경건한 교회이다. 왜냐하면 경건은 세계 교회의 요구와 필요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위기 시대의 사역자는 칼빈이 말한 통합적인 경건을 어떻게 목회에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기도하는 사람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경건한 사역자가 되는 것만이 창조주 하나님이 기뻐하고 성령이 입히시는 새 힘의 날개를 달고 한계상황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비상하는 K-Church로 만들어 갈 사역자의 자세이다.

“1) 하나님께 만 영광이 돌려지는 경건한 예배가 회복되어지는 교회, 2) 소수의 남은자를 통해 세계 교회를 선도할 다음세대의 종자씨(DNA)로 키워내는 교회, 3) 세계 각나라에서 모여들 500만 이주민을 섬겨 역선교사로 파송하는 교회, 4) 교회를 떠난 가나안 교인과 비호감의 불신자를 찾아 세상으로 내려가는 교회, 5) 여호와만을 앙망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소문난 교회”

그 비전은 우리가 원하는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역자들에게 약속하는 비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과 무관하며 약한 자는 도리어 창조주 하나님의 도움으로 비상하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K-Church는 건축물처럼 완성된 교회가 아니라 날마다 갱신되어가는 뉴 모럴교회(another church)이다. 지금은 세계선교가 꺼져가는 심지 같지만 그 날에는 쉽게 끌 수 없는 산불처럼 미전도 종족 선교와 이주민 선교를 통해 세계 열방이 하나님을 앙망하며 예배하며 영광을 돌리는 교회이다.

(이사야 60:9)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

그것은 야망이나 이룰 수 없는 황당한 꿈이 아니라 이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같이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감 같으리라고 비상을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약속하신 하나님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 약속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우시고 붙잡아주겠다고 거듭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약속들은 이미 준비가 끝난 완료형의 동사(아자르)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역자로 더불어 시작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땅은 주셨으나 인간이 길을 만든 것처럼 사역자는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시면 그 힘으로 세계를 향해 비상하는 경건한 미래의 한국교회(K-Church)를 세우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