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9) 교갱협 제20차 영성수련회 새벽기도회

요한복음 1장 6~8절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여러분, 9회말 투아웃 이후에 등장한 타자의 두려움을 아십니까? 앞에서 홈런 다 치고 사이클링히트 다 치고 또 나서서 무언가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설교자의 부담감, 그렇지만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줄 믿습니다. 

제20차 영성수련회는 실컷 얻어맞다가 돌아간 것 같은 해가 된 것 같습니다. 개회예배 시간에 존경하는 최기채 총회장님을 통해서 "제발 자존심 좀 지켜라! 목회자의 자존심, 교갱협의 자존심, 자존심 좀 지키라"고 가볍게 잽을 날려주시더니, 저녁시간 김인중 목사님이 올라오셔서 드디어 올게 왔다 했지요. "유혹에서 벗어나라. 향락의 유혹, 교만의 유혹, 이기심의 유혹에서 벗어나라." 엄청 얻어맞았습니다. 다음날 새벽시간 예수님만큼 인자로 오셨다고 생각했던 장영일 목사님이 올라가셨을 때 그래도 이번에는 낫겠지 했는데, 맞은데 또 맞으며 더 아프거든요. "금년 한해만 내버려두고 내년에는 찍어버리소서!" 아침 첫 강의 시간에 조성민 목사님, 노골적으로 "목회 그 따위로 하려면 목회 그만두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나도 이제 목회 접어야 할 때가 되었는가? 나도 신당동에 커피숍 보러 다녀야 하는가?' 일련의 말씀들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이런 걸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이러시는 걸까요?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가지 중요한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응답입니다. 사실 죽은 놈은 때려 보아야 아무 소용없거든요. 그렇잖아요. 죽은 놈 때려 보아야 아프다고들 해요. 정신 차리고 벌떡 일어나기를 해요? 아무 소용 없어요. 살아 있는 사람이라야 말을 알아듣습니다. 아플수록 더 깊이 알아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갱협을 그렇게 인정해 주시는 거구나. 그래도 이 시대에 있어 살아있는 사람이지 않니? 그러니까 내가 너희에게 아픈 이야기하는 거야. 제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이야기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알아듣고 우리 통하여서 정말 우리가 말할 수 없이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이 시대에 있어 살아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아픈 말씀들을 주셨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먹고 각 지교회와 우리 교단과 조국교회를 섬겨 가면 하나님께서 다 죽어버린 것과 같은, 이제 그루터기만 조금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조국교회를 다시 살리시고 영광 거두실 줄을 믿습니다. 왜 이런 말씀 미리 드리느냐? 사실 저도 많이 얻어맞으며 마음으로는 우리 모두 위로받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미리 정해둔 말씀의 제목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안 들어봐도 무슨 이야기인지 다 아시겠지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우리 하루 이틀입니까? 척 이면 척이지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우리 교갱협의 출범 이유였고, 어쩌면 핵심가치였습니다. 한국교회와 우리 합동교단의 상황을 그대로 두면 괜찮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 존경하는 옥한흠 목사님을 포함한 선배 목사님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목회를 한번 살려 보자, 갱신시켜 보자, 그러면서 우리 교갱협을 20년 전 출범시켰던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교갱협이 발간하던 기관지가 '소리'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물론 불가피해지던 상황이었어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만은 안 되고 뭔가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개혁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문제의식이 생겨났고, 약간의 교갱협의 방향 전환이 있었습니다. 링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지 말고 링 안으로 들어가자, 링 안에서 갱신시키자, 들어가서 개혁시키자... 물론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혹시 처음이 옳았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끝까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남아야 했었던 것은 아닐까? 잘 아시는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는 것은 세례 요한의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내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했던 말이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세례 요한이 누구입니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세례 요한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은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내용이 다 차이가 있지만 그걸 다 말씀드릴 수 없겠고, 세례 요한의 대한 이야기만 살펴본다면 그렇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모습이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광야에 있으며 먹는 음식은 메뚜기요 석청이었다. 그는 광야에서 사람들이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풀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 세례를 받았다. 그중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었는데 세례 요한은 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치며 독설을 퍼부었으며, 또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했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며 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이르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음성이 들려왔다."

대개 그런 기록이 세례 요한에 대한 공관복음의 기록이지요. 하지만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그는 그런 기록들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대신해서 이런 기록들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바로 이것이 세례 요한에 대해 요한복음이 기록한 방식입니다.

그 다음에 나타난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29절로 34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그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빛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이 세례 요한의 존재 이유이자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것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세상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고 생명이고 유일한 구원이심을 나타내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왜 그런 증언에 필요하지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서언으로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사람들에게 쉽게 알아듣고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나사렛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똑같은 동네에서 살아가시면서 철수, 막둥이, 순자 그런 애들하고 똑같이 친구 먹고 자라신 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어요?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아버지는 요셉이에요. 유다, 시몬이 다 그의 형제입니다. 그의 누이도 우리가 다 아는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하나님이라고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니에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그 사실을 증언해 줄 증언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이 실제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그들과 똑같이 친구 먹으며 전혀 별다를 게 없는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 나사로에서 자라나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계시고 가장 연약한 죄수의 몸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증언해줄 증언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와 같은 증언이 쉬운 일입니까? 사람들에게 "여러분, 보십시오. 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이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계시고, 똑같은 모습으로 자라나셨고, 가장 비참한 죄수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러나 이 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을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이 분이 구원자이십니다." 사람들이 쉽게 믿어지느냐 말이에요. "이 분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했는데 사람들이 믿어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바로 거기에서 세례 요한에게는 자신의 증언에 신뢰와 권위를 더해줄 어떤 극적 요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게 뭐였어요? 약대 털옷을 입고 광야에 거하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사는 그런 모습이었지요.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세리 바리새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독설을 내뿜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회개를 선포하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러 온 사람이라면, 우리 또한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세움 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목사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주님 없는 교회의 사역자 된 것은 다른 것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명령하신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땅 끝까지 이르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부어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여러분, 그것이 가롯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들만을 향한 명령이었냐고요.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명령이었잖아요. 오늘 우리도 예수님에 대하여서 증언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게도 세례 요한처럼 증언의 신뢰와 권위를 더해 줄 수 있는 그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강단에 서서 검은 양복을 입고 고함만 지르면 사람들이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우리가 약대 털옷 입고 광야에 나가서 외쳐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요. 우리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세례 요한처럼 살아야 한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우리도 이 시대에 바리새인처럼 독사의 자식들아! 독설을 내뿜는다고 그 사명을 다 감당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한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이 있는 동네가 숨기어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빛이 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추기 위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 여러분, 우리가 왜 착한 행실이 필요하고 우리가 왜 빛 된 삶이 필요합니까? 우리 자신을 영광스럽게 드러내기 위해서요? 자신 주목 받고 칭찬받기 위해서요? 그것이 목적이라면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을 수 있는 착한 행실이 필요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고 증언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그만큼 달라야 하는 거예요. 약대 털옷을 입지 않더라도 약대 털옷을 입은 것만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석청과 메뚜기를 먹고 살지 않더라도 석청과 메뚜기를 먹고 사는 것만큼 구별되어야 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독설을 외치지 않더라도 그만큼 세상과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사는 모습이 달라야 해요. 우리가 세상 앞에서 그런 모습이 드러날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인 것을 우리의 구주이신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길거리에 나가 휘장을 두르고 전도지 나눠 뿌리면서 뱀장사 목소리로... 그거 아니구요. 세상을 사는 나 자신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의 행실 속에서 세상 사람과 다른 그리스도를 닮아 있는 착한 행실로 살아갈 때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모습에, 한국교회에 그리스도인들이 있느냐? 왜 우리가 아무리 외칠지라도 세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지요. 이게 유일한 길이고 구원의 방법인데 다른 방법은 없잖아요. 그런데 절망 가운데에서 몸부림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아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그렇게 교회를 향한, 목사를 향한 별별 소리가 다 나옵니까? 우리가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사는 자체로도 쉽지 않지만 이런 모습에서도 쉽지 않습니다.

다시 세례 요한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세례 요한이 이런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다 그를 선지자로 알고 그에게 나아왔습니다. 마태복음 3장 5~6절에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세례 요한 앞에 나아왔고 그 세례 요한 앞에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악한 왕 헤롯까지도 세례 요한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쯤 되면 사람이 어떨까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까지라도 그의 독설 앞에 두려워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증언자는 실체에 대해서 증언하는 그림자일뿐입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러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그냥 광야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의 소리라는 뜻인가요? 세상의 잘못에 대해서 독설과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자기는 링 밖에 있으면서 링 안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선수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소리만 지르면 그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의 세례 요한의 소리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여러분, 소리가 뭡니까? 이 소리는 실체가 없는 거예요. 실체는 없고 전하는 메시지만 있는 것이 소리입니다. 그것이 세례 요한의 자기 인식이고 자기 정체성이요, 확인입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라고 했을 때 '나'라는 존재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증언하는 메시지,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만 중요한 거예요. "나는 소리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나에게 관심을 갖거나 나에게 주목해서는 안 되고 내가 전하는 메시지에 집중해야 한다." 그게 '소리'입니다. 그래서 성경 어디를 보아도 세례 요한의 손가락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자신을 향하여서 존경과 칭찬을 고백할 때마다 세례 요한의 손가락은 나를 보지 말고 예수를 보라고 예수만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0절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이게 세례 요한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이 여기에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까지 해야 했을까요? 사람들이 그냥 가만히 있는데 "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야." 그렇게 이야기했을까요? 아니지요.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증언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그가 혹시 그리스도인지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말하는도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에게 주목하지 말라. 나에게 집중하지 마라. 나는 단지 그리스도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다." 

옛날 시절에 보면 옛날 영의정 대감이 행차하실 때 앞서가는 한 사람이 "물렀거라. 상감 행차시다. 물렀거라. 영의정 대감 나가신다." 그러면 사람들이 누구를 봐요. 소리 지르는 그 사람을 봐요? 아니지요. 누구 앞에 머리를 조아립니까? 소리 지르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가 그를 위하여 소리치노라. 뒤에 오시는 바로 그분을 위하여.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에요. 그러니까 나를 보지 말고 내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또 뭐라 하냐면 26~27절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것이 세례 요한이 예수를 증언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선지자나 메시야 아닌가 생각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과 나를 비교하자면 나는 그분의 신발끈 풀어 드리는 것조차도 오히려 황송한 사람입니다.

또 자기 제자들 앞에서는 그렇게 말했어요. 35~36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3장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게 증언자입니다. 이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세례 요한은 단 한순간도 사람들의 관심과 인지과 시선을 자기에게로 끌어 모으려 하지 않았어요. 철저히 그리스도만을 가리켰고 그리스도만을 증언했습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들의 환호와 인정과 칭찬과 신뢰와 존경 앞에서 "내가 아닙니다.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실 정말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인데 우리가 종종 소위 말하는 스타 목사들의 좋지 않는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까? 그들이 왜 그렇게 넘어지냐는 말입니까? 그게 우리 연약함이거든요. 사람들은 군중들의 인정과 환호 앞에 서게 되면, 그리고 그것이 자기가 감당한 그 선을 넘게 되면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본분이, 정체성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냥 증언자이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인데, 내 손가락이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키고 있어야 하는데, 그 사실을 잊어버려요. 그러면서 자신이 모두 다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래도 조금은 내가 존경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 이 정도의 관심쯤이야, 이 정도의 환호쯤이야.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을 자꾸 끌어 모아요. 그러면서 주군이라고 한데요. 자기들이 사람들을 끌어 모아놓고 주변에 목사들이 우리들의 주군이라고 한데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로 가 버리셨는지요. 그런데 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도 항상 그런 유혹을 받는단 말입니다. 큰 교회 목회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중에서도 욕심내는 부분이 있단 말이에요.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병이어의 기적 마지막 장면을 보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붙잡아 자기들의 왕으로 삼고자 했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지요? 마태복음 14장 22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절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왜 제자들을 그것도 재촉해서 자기를 무리를 보내는 동안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하셨을까요? 또 왜 자기 자신은 무리를 보내신 후에 혼자 따로 산위에 올라가셨을까요? 바로 거기에 사람들의 약점을 아시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과 환호 앞에서 한없이 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라는 사실을 아시는 거예요. 우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칭찬하고 환호하고 인정하더라도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정말 안 되지 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인정과 칭찬과 존경을 하게 되면 나도 똑같이 흥분하고 말아요. 마치 내가 뭐라도 된 듯 스스로 여기게 된단 말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그렇게 드러나게 실수한 적은 없지만 혼자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까요. '아, 그래도 내가 좀 괜찮은 사람인가 보다.' 우리 교회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괜찮은 사람인가 보다. 왜요? 세상을 향해 한국교회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독설을 내뿜고 있거든요. 교단에서 그래도 우리의 희망은 교갱협뿐이다. 인정해 주시거든요. 조심해야 되요. 넘어지면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상황을 보세요. 사람들이 예수를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니까요. 제자들은 자기의 손으로 떡을 떼서 각 사람들을 나누어 주었는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어요. 그 놀라운 기적이 자기들의 손에서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자기를 사람들의 왕으로 세우려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12명밖에 안 된 사람이에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흥분하지 않겠어요.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재촉하사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제자들은 엄청난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금방이라도 죽게 되는 그러한 풍랑이었어요. 근데 저기서 허연 게 걸어와요. 바다 위로 유령인가 깜짝 놀랐어요. 예수님도 못 알아보았어요. 거기에서 자기들의 실상을 깨닫게 된 거예요. 실체를 깨닫게 된 거예요. 그 놀라운 기적을 행했던 것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게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절대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풍랑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말 연약한 존재였어요. 예수님까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었어요.

오늘 우리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엄청난 교회로 사람들이 칭찬과 명예와 관심으로 나에게 모아질 때 스스로 착각해선 안 됩니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오늘날 한국교회에 우리 목사님들만큼 많이 인정받고, 존경받고, 대접받는 사람들이 또 어디 있습니까? 우리 성도들 정말 좋아요. 솔직히 스스로 살펴볼 때 건풀과도 같고 빈 깡통 같을 뿐인 나인데, 우리 교인들은 나를 주의 종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 상황에서 나 혼자 흥분하고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그런 상황 즐기면 안 됩니다. 목사님, 전도사님, 불의 사자 능력의 종으로 불리는 그런 것을 재미있어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겨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나 교회의 영광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어찌됐든 내 인기 내 명예만 지키고자 달콤한 목사, 전도사로 집착하게 되고 한걸음 나아가서 노회장은 시시해서 안 해요. 총회장하려 하고, 교회 무너지고, 복음의 영광은 짓밟혀도 내 아성은 절대로 무너지면 안돼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찌되든, 나는 사람들의 인기와 관심도와 환호에 중심에 서 있어요. 깨야 되요.

두려운 것은 우리마저도 그런 세태에 깊이 물들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끝까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여야 합니다. 교인들 앞에서 나라고 하는 실체는 감추어지고, 내가 전한 메시지만 살아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나는 죽고 세례 요한처럼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을 바라보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나를 향해 환호할 때 우리는 재촉해서 그 자리를 떠나야 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혼자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서 우리에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을 분명히 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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