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8) 교갱협 제20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누가복음 19장 39-40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장 9-11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사람에겐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침묵해야 할 때 촉새처럼 말을 앞세워서 안되고 말해야 할 때 뒷짐 지고 나 몰라라 해서 안됩니다. 예전엔 웅변이 은이라면 침묵을 금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침묵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좌담과 토론과 강연에서 화술과 변론과 웅변이 황금이요 보석인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침묵하실 때와 말씀하실 때가 각각 다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선 총독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으니 “네 말이 옳도다” 한마디 하시고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어떤 고발에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제자와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교훈하실 때에는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침묵이 미덕인 것은 감점이나 실점하지 않고 공격의 빌미를 주지않으며 이미지에 흠결없이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인사청문회를 통과하기에 적절합니다. 그러나 소극적이고 피동적이고 수비적이기 때문에 창의적이거나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이 되지 못합니다. 진취성과 발전성과 확장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침묵보다 말하는 것은 표현과 소통과 창조를 의미하므로 상대적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공격적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능성과 효율성과 생산성 면에서 침묵보다 훨씬 진취성과 발전성과 확장성이 있는 것입니다.

과연 사람들이 침묵하면 어찌됩니까?

사람들이 보고도 못본 체, 들어도 못들은 체, 알아도 알지 못한 체 지나가야 할 경우가 있지만 반드시 누군가 말해야 하고 짚어줘야 할 사안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의 경우 사람들이 침묵한다고 불의와 과실이 덮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침묵하면 오히려 말 못하는 것들이 입을 열어 사람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성경에서 그 사례들을 찾아봅시다.

첫째, 사람들이 침묵하니 아벨의 핏소리가 호소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은 몹시 분하여 하다가 끝내 두 사람이 들에 있을 때에 형이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이 때문에 여호와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추궁하시니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잡아떼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시되 네가 무었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 고 했습니다.

흔히 ‘죽은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침묵해도 억울하게  살해당한 죽은자의 핏소리는 침묵하지 않고  땅에서부터 하늘의 하나님께 직소하게 됩니다.

둘째, 사람들이 침묵하니 발람의 나귀가 책망했습니다.

메소포다미아의 브돌사람인 발람은 외견상 여호와의 예언자이나 사실은 고명한 주술사입니다. 그는 모압왕 발락의 정중한 초청에 거절하기 보다 여호와께 묻게 되고 가서 안된다는 응답을 받았음에도 두 번째 사신단이 왔을 때 단호히 거절하지 않고 다시 여호와께 묻게 되니 여호와께서는 일어나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둔한 발람은 이것을 응답이라 여겨 나귀를 타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나귀가 칼을 빼어든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발람이 채찍질하니 나귀가 몸을 담에 대고 부볐으며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나귀가 발람 밑에 엎드렸습니다. 발람이 노하여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니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사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하였고 또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한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민22:28,30) 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혀 칼을 빼들고 길에 선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되고 자기가 나귀 때문에 살게된 사실을 알게됩니다. 이렇게 무지와 암매로 잘못된 길로 가되 사람들은 침묵할 뿐아니라 오히려 챗찍으로 때리니 결국 말못하는 나귀가 입을 열어 주인을 책망하게 됩니다.

셋째, 사람들이 침묵하면 길 가의 돌들이 소리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상경 길에 예루살렘 근교인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서 나귀새끼를 구하여 타셨습니다. 행진하시는 중에 겉옷과 나뭇가지들을 펴고 큰 무리가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라고 하거늘 예수님이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19:40) 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언로를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 지르게 됩니다.

넷째, 사람들이 침묵하면 품꾼의 품삯이 소리 지릅니다.

성경에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5:4)고 말씀했습니다.

부자가 품꾼의 품삯을 지불치 않고 유예하거나 이런저런 명목으로 삭감하면 그 품삯이 더 높은 상전인 하늘의 상전에게 자기 억울함에 대하여 소리쳐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빈자, 지주와 품꾼, 주인과 하인 사이는 갑과 을의 관계로서 불평등하기 때문에 갑은 을을 착취하고 을은 갑에게 착취 당하면서도 더 큰 불이익을 당할까봐 항의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갑은 계속 을에게 침묵과 희생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가 지나치면 마침내 품삯이 소리치고 항의하는 혁명적 상황을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는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물론 침묵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통상 목회시 침묵은 미덕입니다. 그러나 침묵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능과 무관심이며 비겁과 직무유기입니다. 사람이란 언변을 통해 자기의사를 표출하되 논리로 설득하고 감정을 전달하며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리할 때 창조가 있고 소통이 있고 결실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땅을 파고 묻어두거나 수건에 꽁꽁 싸 두었던 종은 책망과 벌을 받지만 달란트나 므나로 장사하여 이(利)를 남긴 종은 칭찬과 상을 받는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이는 소극적인 기득권 보수보다 적극적인 기득권 확장을 교훈·권고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교훈대로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첫째, 침묵하지 말고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아하수에르 치세시에 재상 하만의 음모로 바사제국 경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아달월(12월) 13일 하루동안에 모조리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왕명의 조서가 반포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모르드개는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대성통곡하며 대궐문 앞까지 이르렀으나 베옷입은 자는 대궐문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대궐문 앞에서 곡읍할 뿐이었습니다. 그가 딸처럼 양육한 사촌누이 왕후 에스더가 시녀와 내시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모르드개에게 의복을 보내어 베옷을 벗기고자 했으나 그가 받지 아니했습니다. 에스더가 내시 하닥을 보내어 하만의 음모에 대한 전말을 들었으나 왕이 부르지 않는데 왕이 계신 안뜰에 들어가면 그 누구라도 왕이 금 규(홀)를 내밀지 않으면 죽이는 법이어서 벌써 30일째 왕의 부르심을 받지못한 왕후로서도 속수무책이라고 모르드개에게 알렸습니다.

에스더 4:13,14에 보면 “모르드개가 …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에스더는 유다인들의 삼일 금식을 부탁하면서 자기도 시녀들과 금식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고 비장한 결의를 표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왕에게 나아가 유다인 동족을 구함과 더불어 원흉 하만을 단죄하고 그가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한 나무에 오히려 그를 매달아 처형합니다. 또한 하만의 열 아들도 아달원 13일에 그들이 죽이려 했던 유다인들에게 도리어 죽임을 당합니다. 만일 이때에 왕후 에스더가 자기 안위만 쫓아 잠잠하였다면, 죽을 각오로 왕앞에 나아가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 땅에 사는 유다인들의 운명과 그들과 동족인 왕후 에스더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찌, 재상 하만의 욱일승천하는 기세는 과연 어디까지 뻐쳤을지를 되새겨 볼 때 이런 경우 우리는 잠잠해서 안되고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둘째, 침묵하지 말고 감정을 토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무리들의 환호를 받으며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의 그 광경은 소박하지만 일대 장관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어 끌고 온 작은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왕으로서 위엄을 갖추고자 높은 군마를 타지 않으셨습니다. 나귀새끼 등에는 안장과 보료 대신 제자들이 겉옷을 걸쳐 놓아 그 위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로에도 무리들이 겉옷을, 또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폈으며(막11:8) 감람산 내리막 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들과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되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눅19:37).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여”(요12:13)

이런 환호와 소동 중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했다. 눅 19:40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인생은 희로애락애증욕(喜怒哀樂愛憎慾)을 가진고로 그 감정을 조절할 수는 있어도 그것의 표출을 억지로 강박하여 침묵을 강요함은 본능과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속박함이어서 인권침해입니다. 사람이 감정발산을 통해 진솔한 소통을 하게되고 감정표현의 연장이 종교·예술·문화의 초월적·신비적·직관적 세계로 이행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열광하고 환호함은 추종자들의 신심이요 본심으로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입니다. 연예인을 열열히 추종하는 팬들의 경우 얼마나 광적입니까? 예수님을 열열히 추종하는 제자들의 경우 새술에 취하였다는 조롱도 받았고(행2:13) 예수에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으며(행26:24) 천하를 어지럽힌 자로 고발도 당했습니다(행17:6). 그러므로 순교도 할 수 있는 신앙적 열광을 인위적으로 침묵케 하려해서 안되므로 자기 신앙과 감정인 기쁨·찬양·환호에 솔직하되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 침묵하지 말고 소원을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실 때에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맹인 바디메오가 예수시란 말을 듣고 즉시 소리지르기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48에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시라 하시니 그들이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므로 바디메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맹인 바디메오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그의 한 맺힌 외침을 시끄러운 짓거리로 치부하여 꾸짖어 잠잠하라고 오히려 침묵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메오의 경우 주위의 꾸짖음과 충고 따위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께 자기의 소원을 청하여 광명세계를 보고자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계속 외치게 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 마침내 소원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소원이 절실하면 예의와 건덕, 염치와 체면을 가리지 않고 오직 주님을 애타게 구하여 외치게 됩니다. 마태복음 15:21이하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는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모욕당해도 계속 간청한 결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고 예수께서 허락하여 그 딸이 낫지 않았습니까? 누가복음 18:7에는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병은 숨기지 말고 들어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소원도 감추지 말고 주님께 가지고 나가 간청해야 활로가 있음을 명심할 것입니다.

넷째, 침묵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2차 전도여행시 실라를 데리고 떠나 1차 때처럼 아시아에서 전도하던 중 성령의 인도로 에에게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갔습니다. 그리하여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므로 바울이 유대인 전도를 포기하고 이방인에게 가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8:9,10에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년 6개월을  거기 머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되 아무런 성과가 없고 오히려 대적과 비방에 직면하면 낙심하고 의기소침 해져 쉽게 그곳 전도를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많은줄 알아 두려워 하거나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거나 단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들을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1:21).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야 합니다(딤후4:2). 사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한 것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해야 합니다(행5:42). 우리는 복음을 전하되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 하였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고 그 분은 바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사 승리하신 복음의 본체이십니다(고전15:1-4). 우리가 복음으로 구원 받았음을 참으로 믿을찐대 결코 침묵해서 안되고 이 생명 다하도록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거짓과 음모가 진실을 가리고 왜곡하는 현실일 때, 침묵하지 말고 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예언하는 선지자라면서 무지와 침묵과 방관의 자세는 책임회피요 직무유기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이사야 56:10에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짓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라고 그들의 무능과 무책임을 적시하였고 연하여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력의 음모가 통치자의 이목을 가리고 여론을 호도하는 현실일 때, 침묵하지 말고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침묵의 외압에 진솔한 감정이 억제되는 현실일 때, 침묵하지 말고 심정을 토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위의 강요에 의기소침하여 좌절하는 현실일 때, 침묵하지 말고 소원을 외쳐야 합니다.
우리는 대적과 비방에 전도를 쉽사리 포기하는 현실일 때, 침묵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잠잠하라, 침묵하라고 강요와 압박이 있을 때에 주위의 분위기나 이해관계에 따라 말하지 않거나 말 못하는자 되지 말고 오직 진솔하고 당당하게 진실을 말하고 감정을 토하고 소원을 외치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파수꾼이라면서 짓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어서 안되고, 분명치 못한 나팔소리를 내어서 안됩니다(고전14:8).
우리는 말씀을 전파하되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고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해야 합니다(딤후4:2).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모세가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나단이 다윗 앞에서 말했듯이, 엘리야가 아합 앞에서 말했듯이, 세례 요한이 헤롯 앞에서 말했듯이, 베드로가 공회 앞에서 말했듯이 당당하고 기탄없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의 경우 제일 권위있는 사도 베드로에게 충고하기를 서슴치 않았고(행2:11-14), 자기를 이끌어 준 선배 바나바와 심히 다투어 갈라 설만큼 직언했고(행15:36-41), 공회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말에 격분하여 그의 말을 공박했고(행23:1-5), 가이사랴 법정에서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에게 당당히 간증하고 전도했던 사실(행36:27-29)을 상기하여 우리도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절대로 나약하고 비겁하여 소신과 양심을 은휘하는 자 되어서 안되고 오로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주여,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사36:16)라고 간청하였거니와 과연 치유와 회생을 원한다면 입을 열어 병을 알려야 하고 살려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병을 감추거나 삶의 의지가 없으면 그 침묵이 환자의 병환을 악화시켜 회생불능으로 죽음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이건 공동체건 낫고자 하고 살고자 할찐대 반드시 사람들이 알도록 말해야 하고 하나님께 직소하는 탄원을 해야 합니다. 절대로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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