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7) 제20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열왕기상 21장 1-6절

세계에서 자존심이 가장 강한 민족은 미국의 시민권을 가진 흑인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의 조상들이 노예로 팔려 와서 피와 땀으로 미국을 발전시켰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얻은 천국 시민권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은 더욱 더 자존심을 지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신앙의 모범자인 바울은 천국의 시민권자라고 하는 자존심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처음에는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한 다음부터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이 말하는 나봇이라는 사람은 일개의 촌부요, 농부로서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성경 기자는 ‘왜 나봇의 자존심을 높이 평가해서 귀감을 삼게 하였는가’하는 문제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자존심은 교만이 아닙니다. ‘자존심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말 사전이 정의하기를 “자기의 몸이나 의지를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자세”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권력자들이나 윗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을 눈에 박힌 가시처럼 여기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1. 나봇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아합 왕의 협상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성경이 말하는 나봇은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 왕의 궁정 앞에 조그마한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아합 왕이 그 포도원에 눈도장을 찍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 아합 왕이 나봇을 불러서 하는 말이 “네 포도원을 내게 달라. 내가 그것으로 나의 채소 밭을 만들겠노라”고 했습니다. 불의한 아합 왕의 제안은 그 포도원을 거져 달라는 것이 아니고 그 보다 더 크고 더 좋은 땅을 많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땅 값을 돈으로 달라하면 돈을 주겠고 땅을 달라하면 더 좋은 땅을 주겠노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서슴없이 “아니요, 못합니다.”고 거절했습니다. 나봇은 그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과 그의 처와 자녀들까지 다 죽임을 당하고 포도원까지 다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나봇은 참으로 멍청한 사람이요, 꽉 막힌 사람이었습니다. 그까짓 포도원을 아합 왕에게 주어 버리고 그 보다 더 몇 십 배 되는 땅을 달라고 하든지, 아니면 돈을 많이 받아서 신도시 개발 지구에 더 큰 땅을 사서 부동산 투기를 하든지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니면 미관말직이라도 한자리 얻어서 출세를 한다든지, 그야말로 그렇게 넝쿨 채 굴러오는 호박을 물리쳐 버리다니 참으로 그는 한심한 친구였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본 기독교 신자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봇은 결코 멍청하고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신앙 양심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존심이 있는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불의한 일에는 목숨을 걸고 싸울 줄 아는 멋진 청지기였습니다. 나봇 뿐만 아니라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 자존심 때문에 어떠한 유혹이나 권력의 억압에도 굽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고 했습니다. 모세도 애굽의 바로 왕과 적당한 선에서 빅딜을 하였더라면 굉장한 부귀 영화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사신이라고 하는 그 우월감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 자존심 때문에 협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자존심이 강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 동안 금식기도하시고 아주 배가 고파서 쓰러지게 된 그 지경에 사탄이 접근해 왔습니다. 사탄이 말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순간 예수께서도 돌로 떡을 만들어서 자기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기가 과연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주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서 사탄의 장단에 춤을 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탄은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사탄은 물러서지 않고 예수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네가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때에도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할 것은 사탄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유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왜곡 날조하여 유혹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자기의 뜻대로 사탄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꼭 성경을 인용해서 사탄을 책망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자존심을 지키셨던 것입니다.

 

2. 나봇은 포도원을 왕에게 양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까닭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나봇이 왜 왕의 그같이 애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까? 그의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나봇은 그 자존심 때문에 온 가족이 왕에게 처참한 살육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그까짓 포도원이 무엇이기에 죽음으로 지켜야 했습니까? 왜 그렇게 멍청하게 인생을 포기할 수 있으며, 왜 그렇게 포도원에다 목숨을 걸 정도로 집착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포도밭이 아까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포도밭에 애착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금하시기 때문에 왕에게 양도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질문에 대한 정답이요, 오늘 설교의 키워드가 되는 포인트입니다. 오늘의 성경 3절에서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줄 수가 없는 까닭은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라”고 딱 잘라서 거절한 것입니다.

만약에 나봇이 아합 왕과 협상을 잘 하면 자기의 목숨과 온 가족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재물과 권력을 손아귀에 거머쥘 수 있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 만 금이 생기고, 권력이 손에 잡힌다 해도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이기 때문에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존심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긍지인 것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 먹고 죽은 것입니까? 그 선악과에 강한 독성이 있어서 주거나, 메르스처럼 사람을 죽이는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죽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 알레르기가 있었기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열매였기에 따먹고 그의 영이 죽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나봇과 비슷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요셉이라고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명 애굽의 바로 왕의 시위대 장관이요, 요즈음으로 말하면 대통령의 경호실장의 아내 된 여자가 요셉에게 늘 윙크하고 찝쩍거리다가 결국은 자기의 침실로 끌고 들어가서 동침을 하자고 졸라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야 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 된 여자가 못생긴 추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요셉은 스테미나가 약한 성적 무능력자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요셉이 그 여인을 범하는 것을 하나님이 금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나봇과 비슷한 또 한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4:6에 보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던 때였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없애려고 정예부대로 뽑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의 뒤를 쫓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그의 심복 부하들과 함께 엔게디 굴속에 숨어있었습니다. 때 마침 사울 왕이 급한 용무를 보려고 굴속으로 뒷걸음치며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다윗의 부하들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당신의 원수를 당신에게 부치시겠다고 하시더니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고 하면서 사울 왕을 베어 버리자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신 것이니”라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없다고 하는 단호한 결심은 사울이 자기의 장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다윗의 인정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이기 때문에 못 베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일에 예배를 뒤로 미루고 가족끼리 놀이터에 가든지 친구들과 골프라도 치고 싶겠지만 그리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때문이 아닙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어 오를 때는 와인이라도 한 잔 들이키든지, 혹은 담배라도 한 대 피워 물고 싶지만 그리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금하신 때문이 아닙니까? 도둑질이나 거짓말이나 방탕한 행위를 하고 싶지만 그리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금하신 명령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3. 나봇이 포도원을 아합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이유는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유산이기에 못한 것입니다.

본문 3절과 4절에서 말씀하기를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아무리 단순하고 가벼운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금하신다면 못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바른 태도요 자세인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나봇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포도밭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신앙의 선배들에게서 물려받은 개혁주의 보수신학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할 개혁주의 신앙입니다. 이렇게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을 물려주신 것은 그 무엇보다도 큰 은혜로 알고 사수해야 할 것입니다.

총회에서 발행한 100주년 기념 사진첩이 나와 있습니다. 그 사진첩에는 우리에게 개혁주의 신앙을 전해주신 선교사님들과 역사에 길이 남을 주기철 목사님과 조만식 장로님 등의 신앙인의 자존심을 걸과 악마의 세력들과 싸우신 흔적들이 자랑스럽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진첩 가운데는 피를 토하고 죽고 싶은 부끄러운 사진 한 장이 끼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제 27회 총회로 모인 거물급 목사 장로들이 까만 제복을 입고 일본 헌병들의 감시아래 구령에 맞추어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의 우상에게 95도의 각도로 허리를 굽혀 참배하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유명세들이 권력과 돈 앞에 무릎을 꿇는 참상이야말로 성도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개혁주의 보수 신학을 물려주신 선배님들과 선교사님들에게 감사하면서 그 유산을 지키도록 힘을 씁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단 안에 보수 신앙의 유산을 헌신짝같이 벗어 던지고, 돈 앞에 무릎을 꿇으며 장자 교단의 허울만 쓰고 다니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라는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자부심을 간직하십시오. 처음에 이 교갱협이 어떻게 태동되었으며, 어떻게 출범했습니까? 노회나 총회에서는 돈으로 표를 매수하여 임워이 되고, 또 교권을 휘두르며 단물을 빨아먹는데 길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7당 5낙”이라고 하는 유행어가 상식화 되었었습니다. 즉 7억을 쓰면 당선이 되고 5억을 쓰면 낙선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때에 옥한흠 목사를 중심으로 뜻이 있는 엘리트 목사들이 교단과 교계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굳은 결의로 뭉쳐진 것이 오늘날 교갱협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 같은 정신과 굳은 결의를 신앙의 유산으로 알아 사수할 각오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봇이라는 성도에게서 자존심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나봇은 아합 왕에게 돈을 받고 자기의 신앙 유산을 팔아넘기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봇은 권력 앞에서 자기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사자로소 신앙인의 자존심을 지킬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9이 말씀한대로 “오직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종들은 세상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는 것이고, 또 꿇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왕하 6:26에 보면, 엘리사가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의 나병을 고쳐준 다음 그 대가로 예물을 줄 때에도 엘리사는 손을 흔들어 단호히 거절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신복 부하인 게하시가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서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착복했습니다. 그 같은 사실을 감지한 엘리사는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고 힐책했습니다.

사무엘상 12장에 보면, 사무엘이 임종을 앞두고 온 백성과 공직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 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자존심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도 나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신앙의 정조요 자존심인 것입니다.

 

결론

나봇의 자존심은 결코 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기도 아닙니다. 나봇의 자존심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청지기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나 비전이 없는 자존심은 소인배의 열등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꿈이 있고 환상이 있는 자존심이라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봇의 자존심을 의로운 용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교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봇처럼 교회를 지키고, 선배들이 전승해 준 신앙노선을 팔아넘겨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자존심을 가졌어야 옛 뱀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이 자존심으로 은 30에 현혹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도 이 자존심을 가지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서 목숨을 걸었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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