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울 안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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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울 안 봐
  • 교갱협
  • 승인 2020.01.0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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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교회 100년 이야기(2)
박 권사님과 황영준 목사
박 권사님과 황영준 목사

소록도 사는 분들이 5백여 명을 헤아린다.

병을 낫고 소록도를 나가 살다가 노년에 재입원한 분들도 많다. 그렇다면 소록도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눌러 사는 분들이 절반은 될 것 같다. 대개는 손발에 장애를 가졌거나 시력을 잃었고 안면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신 분들아 계신다.

나이들이 많아져서 외모를 자랑하지도 않지만 사진 찍는 것을 피하는 분들이 많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소록도에 가는 분들은 누구 앞에서나 찰칵! 찰칵!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

소록도 어느 간호사가 쓴 글이 흥미롭다.

“할머니, 사진 찍으러 가게 머리도 이쁘게 빗고 거울도 보고-”. “이쁘도 않은 할망구 사진은 뭐 할라고 찍노! 나, 사진 안 찍을란다” 하시면서 머리를 매만지신다.

“하하하- 할머니, 누가 얼굴 사진 찍는다고 했어요? 배 사진 찍는다고요~”

방사선 촬영하러 가면서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할머니들은 거울 보는 일,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병들어 일그러진 얼굴, 무너진 코, 빨갛게 변해버린 눈....”

당신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에게도 보이는 걸 꺼려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슴속 깊은 곳에는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을 수가 있겠는가. 병들기 전, 고왔던 모습, 다소곳한 처녀시절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싶어 하시는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방사선 사진을 찍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의사 선생님이 요구하는 부분을 찍는다는 게 그리 만만치 한다는 것을... 성한 우리에게도 어려운 자세를 사지가 절단되고, 등이 굽고, 팔다리가 뒤틀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취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사진을 찍은 후 “할매, 사진 잘 나왔다. 아주 이삐게 나왔다” 이 한 마디에 환한 웃음을 보이신다. (이선형『사슴 섬 간호일기』2008. 8)

불편한 가족을 섬기는 간호과 노인들 모습을 눈으로 보듯 절절한 이야기다.

나는 그들의 신실한 신앙생활을 소개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었다. 예배드리는 모습, 기도 시간, 불편한 몸으로 오가는 모습, 병상생활, 교인들과의 만남... 그렇지만 얼굴을 환히 볼 수 있는 사진은 피했다. 애써 사진을 피하는 분들이 계서서 조심스러웠다.

여수 애양원, 고인 되신 양재평 장로님이 이끄는 성경암송반을 다니면서도 그랬다.

중도 실명한 양 장로님은 항상 검은 안경을 쓰고 계셨다. “장로님이 노년에 ‘오직 예수 오직 천국’ 소망을 갖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말하는 나의 설득에 흔쾌히 사진을 찍도록 허락하시기도 했다.

외국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래전(1951년) 인도의 벨로어에서 사역했던 폴 브랜드 선교사의 이야기다. (폴 브랜드. 필립 얀시. 송준인 역『고통이라는 선물』두란노. 2005)

한센인의 갈고리 손 수술과 재활로 유명했던 폴 브랜드 박사가 젊은 크리슈나무르티의 손을 치료해주었다. 퇴원하여 잘 지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가 어느 날 찾아왔다.

“이 손이 좋은 손이 아니에요”하는 것이 아닌가. 브랜드 박사는 “도대체 무슨 말이야? 괜찮은데 왜 그래? 이제 열 손가락을 전부 움직일 수 있잖아. 더 이상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조심해 왔고 말이야. 내 생각에는 아주 보기 좋은데” 하며 의아해했다.

“예, 맞아요. 하지만 구걸하기에는 나쁜 손이에요.” 하였다. 동정을 베푸는 사람들이 “나환자의 갈고리 손을 가진 거지들에게만 기꺼이 적선을 한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브랜드가 그의 수입원을 끊어놓은 결과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이제는 전처럼 많은 적선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여전히 제게 일자리를 주거나 집을 세놓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며 슬퍼했다.

손은 고쳐졌지만 얼굴에 있는 상처 자국 때문에 나병 전력이 드러났고, 그 이유만으로 박대를 당한 것이다. 공공버스를 타려고 하면 때때로 운전사가 밀어내곤 했다. 그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지만 실업자가 되어 집이 없어 광장에서 자곤 했다. 구걸해서 번 돈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했다.

브랜드 박사는 도대체 내가 해준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몸을 고쳐주었다는 것이 고작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린 것이라는 말인가 생각하며 슬퍼했다. 우리가 국내에서 겪는 이야기와 방불하다.

한센인의 고통, 한센인의 눈물은 닦아줄 사람은 누구일까.

오랜 전(1933년) 이야기다. 소록도 자혜의원이 개원하여 입원 자가 많아지면서 남부병사(남생리)가 확장되었고 이어서 동부병사(신생리)가 들어섰다. 그때 한자리에 모여 환영회를 하면서 함께 불렀던 환영가다.

① 어서 오라 친구여 괴로운 마음을 그대로 가져와서 무거운 짐 부려라
주는 평안함을 주시리로다
② 어서 오라 친구여 눈물 씻고서 이 세상 어디도 없는
천상의 자혜의 동산 진실로 우리의 복지
(후렴) 진실한 낙원을 찾는 사람들아 이제야 왔도다 우리의 신천지 함께 개척하세

『소록도교회사』p.40

소록도의 설움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동정의 마음이 한껏 배어있다. 이렇게 예수 사랑으로 살아온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기록이 『소록도교회사』이다. - 소록도교회가 걸어온 지난 100년간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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