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교회 100년 이야기(6)

마을 폐쇄로 교회도 폐쇄된 서성교회 예배당.
마을 폐쇄로 교회도 폐쇄된 서성교회 예배당.
소록도 중앙교회 예배당.
소록도 중앙교회 예배당.

코로나19 때문에 소록도 방문이 막혔다.

며칠 전, 장인심 권사(신성교회)와 통화를 했다. 매일 모이는 정오기도회 모임에 함께 했던 분들 여럿이 고령으로 요양병동에 입원해서 열 명도 못되게 나온다며 아쉬워한다.

“예배당 지을 때 고생했던 교인들, 머리 잘라 바쳤던 할머니들이 몇 안 남았어...” 하며 옛이야기를 이었다.

그렇다. 소록도교회 예배당 건축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지금의 예배당들이 1963년에 입당했고, 1966년에 헌당예배를 드렸던 건물들이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1962년 8월 8일, 소록도병원 공회당에서 김두영 목사 위임예배를 드렸다. 5천6백여 명(원생, 직원, 내빈)이 공회당을 가득 메웠다. 김 목사가 시급하게 해결 할 문제가 있었다. 교회들이 예배처소를 일시에 빼앗기고 산이나 밭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다.

군사정권의 임명으로 권총을 차고 부임한 조 원장은 예배처소가 병원 건물이라며 예배를 중단시키고 전 교인은 공회당에서 함께 예배드리라 명령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나 노약자들이 공회당에 모일 수 없었다. 그러자 조 원장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게 되었다. 이런 일이 곧 중앙에 알려졌다. 성도들은 새로 온 김 목사에게 각 마을에 예배처를 찾아주거나 예배당을 짓자고 눈물로 호소했다.

김 목사는 상경하여 장관을 만났고, 돌아와 조 원장을 만났다. 김 목사가 마을마다 예배당을 건축하겠다고 말하자 조 원장이 반기며 허락했다. “저도 장로의 아들이며, 목사님 고향인 평안도 사람입니다. 목사님 뜻에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 극적인 타협이었다.

『소록도교회사-100년간의 발자취』p. 122-129

1962년, 교회는 성전건축위원회를 결성하고 건축헌금을 모으기로 했다. 한 해 동안 건축헌금 7만원이 모아졌지만 그 중에 2만원을 김 목사가 내놓았다.

김 목사는 헌금을 강단에 올려놓고 “성도들이 드린 7만 원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벳새다 언덕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를 남기셨던 예물입니다. 이것으로 4천5백 명 양 떼를 먹일 구유 일곱을 주실 줄로 믿고 내일부터 건축을 시작하겠습니다. 주여! 하감 하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하고 기도했다(1963년 2월 5일).

김 목사가 병원장과 협의한 예배당 터는 산이거나 급경사이고, 돌산이나 언덕이었다. 2월 6일, 하루에 6개 교회 기공예배를 드렸다. 신생리교회는 40여 성도들이 마늘밭에 모여 넓이 7칸, 길이 15칸을 재고 모퉁이에 말뚝을 박아 새끼줄로 매고 예배를 드렸다. 이어서 구북리, 서생리, 남생리, 동생리, 장안리를 돌며 예배당 건축을 선포했다.

원장은 “소록도 안에 50년 이상 된 육송이 빽빽이 들어서 있으니 이것을 베어다 마루와 창대와 지붕에 쓸 목재로 쓰십시오.”하였다. 소나무를 찍어다 목재로 쓸수 있었다.

공사를 맡은 목수와 석수들만 정상인을 부르고 다른 모든 일은 성도들이 자원봉사로 나섰다. 건축 자재를 인천에서 여수로 운송하고 소록도로 옮겨왔다. 대금은 일부만 지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송금하기로 했다.

1963년 12월. 드디어 6개 교회 예배당을 건축했다. 12월 24일 새벽부터 밤까지 6개 교회 입당예배를 드렸다. 놀라운 기적이요 감격이요 감사였다. 김두영 목사의 열정과 성도들의 헌신그리고 전국 교회의 지원으로 이룬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7만 원으로 시작한 건축, 여섯 교회를 짓고도 367,500원이 남았으니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고, 김두영 목사)

한편 중앙교회도 1200명 교인과 각 교회 3천여 명이 연합으로 모일 수 있는 4백 평 규모의 한국 제일의 예배당 공사를 시작했다. 헌금도, 자원봉사도 난감했지만 하나님 베푸신 기적이 믿었다.

신성교회 故 김세일 장로와 황영준 목사.
신성교회 故 김세일 장로와 황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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