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자유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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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유가 없어서
  • 황영준 목사
  • 승인 2019.12.0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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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교회 100년 이야기(1)
소록도교회사 출판 감사예배 - 설교 안명환 목사(전 총회장)
소록도교회사 출판 감사예배 - 설교 안명환 목사(전 총회장)

소록도교회가 『소록도 교회사』-소록도교회가 걸어온 지난 100년간의 발자취-를 발간했다.

지난 11월 14일에 ‘축하예배’를 드렸는데 안명환 목사(전 총회장)가 설교를 했고, 여러 교회와 기관 그리고 지역에서 내빈들이 참석했다. 특수한 환경에서 소록도교회의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을 지켜온 것을 이구동성으로 대단한 믿음이고 또 하나님의 은혜였다며 칭송했다.

나는 책을 발간하기에 앞서 김선호 담임 목사로부터 ‘감수監修’를 부탁받았다. 원고를 출판사에 맡기고 처음 교정 작업부터 동참해야 했다. 덕분에 한여름 무더위를 그 일로 보냈다.

교회 설립 50주년 때 『五旬의 七 촛대』를 출간했는데 그 때 일곱 교회의 이야기 상당 부분을 다시 실었다. 그때는 6천여 환우들이 있었고, 교회도 4천 명이 넘던 때라서 교회가 왕성했고, 믿음이 열렬했으며, 재능 있는 일꾼도 많았던 것이다.

나는 책머리에 축사에 “온몸으로 드리는 찬양, 말씀마다 아멘 아멘! 화답하는 열정, 그곳은 천국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할렐루야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60년대 이야기를 썼다.

소록도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다 은퇴하여 소록도에 눌러앉아 사시는 천우열 전도사는 “소록도의 역사는 피눈물의 역사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했다.

소록도교회사는 한국 한센인의 역사와 다름 아니다. 소록도에서 치료를 받고 병을 나은 분들이 퇴원하여 전국 여러 정착촌을 개척하여 나갔고 정착촌마다 교회를 세운 것이다.

오늘은 교회가 처음 세워지던 때 이야기를 소개한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6년에 한센인 강제수용을 위한 병원으로 소록도 자혜의원이 설립되었다. 일본인 원장은 그 해 100여 명의 환자를 수용하고 일본식 생활을 강요했다. 초대 원장 아라카와토요루가 물러가고 2대 원장으로 부임한 군의관 출신의 하나이젠키치(花井善吉)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경천애인敬天愛人 정신으로 환자들 인권과 배려를 강조했다. 어버이의 심정으로 환자들을 돌보려 했다며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어느 날 환자 3명이 도주하다 붙들렸다. 원장이 왜 도주하였느냐 물으니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신앙의 자유가 없어서 이 병원에서는 못 살겠다”라고 대답했다. 대구 지방에서 온 장로교인 최재*崔在*, 김금* 金今*, 부산지방에서 온 박장*朴長* 이었다. 그 믿음의 사람들 이름을 확실하게 밝혀두었다.

하나이 원장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일본인 목사를 불렀다. 성결교회 목사인 다나카신자부로가 1922년에 소록도에 들어와 10월 2일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으니 이날이 소록도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광주에서 온 박극순朴克淳 씨가 설교 통변을 맡으면서 교인이 증가하고 12월 18일 세례를 받는 이가 44명(남 40, 여 4명) 이었다. 교회가 첫 열매를 맺었고 꾸준히 성장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소록도小鹿島라는 지명을 보면 ‘작은 사슴 섬’이다. 갈급한 사슴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신자들의 섬 아닌가. 그래서 내가 설교를 할 때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열심히, 소리 높여 찬송가를 올린다. 예나 지금이나 소록도교회는 목마른 사슴들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 42:1, 2)

- 계속

날마다 기도하는 정오기도회(소록도 신성교회 - 기도회를 인도하는 황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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