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慈愛의 언행, 하나이 원장 창덕비彰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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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애慈愛의 언행, 하나이 원장 창덕비彰德碑
  • 황영준 목사
  • 승인 2020.01.28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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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교회 100년 이야기(3)
소록도 자혜의원慈惠醫院 옛 건물
소록도 자혜의원慈惠醫院 옛 건물
하나이젠키치(花井善吉) 원장 창덕비
하나이젠키치(花井善吉) 원장 창덕비

‘자애慈愛’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도타운 사랑’

소록도 자혜의원慈惠醫院 제2대 원장 하나이젠키치(花井善吉)는 한센인 환우들을 대하는 언행이 ‘자애慈愛’였단다. 강제 수용되어 슬프고 억울하고 고달픈 그들은 감격하고 감동했다.

개원 때(1916년) 원장 아라카와토오루는 환자들에게 일본식 생활양식에 일본식 의복을 입혔고, 음식도 일본식을 강요했다. 이러한 생활이 5년이나 이어지다가 그가 자리를 떠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제2대 하나이젠키치(花井善吉) 원장이 1921년에 부임한다. 중국과 조선에서 군의(軍醫)로 지냈던 60 고령에 겉으로 보이는 면모가 날카로워 전임자보다 더 엄할 것 같았다. 겪어보니 인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런 훈시를 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들어줘야 하고 또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한다. 너희들은 내 아들딸이다. 아버지로서 자녀의 말을 잘 들어 줄 테니 너희들도 아버지에게 순종하라.”

‘아들 딸’이라 말씀에 용기를 얻은 원생들이 여러 가지 청을 넣었다. 그리고 광주, 부산, 대구의 요양소를 시찰하고 돌아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먼저 시정할 것은 너희들의 생활양식이다. 일본식 생활양식이 너희들에게 맞지 않고 불편하다는 것을 나도 깨달았다. 이제부터 편한 대로 옷을 바꿔 입어라. 식사도 입에 맞게 병사病舍별로 해 먹어라.” 하였다. 자유를 회복한 것이다.

원생 몇이 도주하다 붙잡혔다.

대구지방에서 온 장로교인 최재범崔在範 김금영金今永 부산지방에서 온 박장영朴長泳 등 3인이었다. 원장에게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신앙의 자유가 없어서 이 병원에서 못 살겠다.” 하였다. 원장은 조선총독부의 선교 허가를 받고 기독교를 허락하게 된다. 놀라운 역사가 열리는 것이다. 1922년 일본인 성결교회 목사인 다나카신사부로(田中眞三郞) 목사가 자원하여 소록도에 들어와 10월 2일 첫 예배를 인도하니 이 일이 소록도교회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혔을 때 해방을 선포한 고레스 같은 놀라운 은혜였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을 것이다.

1923년에는 박극순을 설교 통변으로 세우고 주일예배와 수요일 예배를 인도하니 120여 명이 모였다. 12월 18일 주일에는 남녀 44인이 세례를 받았다. 소록도교회 첫 열매이다.

하나이 원장 재임 8년 4개월. 입원 환자는 750명 대가족이 되었다. 원생들은 환자들을 친자식처럼 아껴주고 보호해주는 원장의 덕을 길이 기념하자며 창덕비彰德碑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병중에 있던 하나이 원장이 소식들 듣고는 원생 대표들을 불러 “만약에 원생들이 끝내 비를 세울 양이면 즉시 원을 물러나겠다.”라고 사양했다. 일은 수면에 가라앉았다.

고령으로 자주 자리에 눕던 원장이 1929년 10월 16일, 원생들의 정성 어린 기도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두었다.

“서거의 비보가 병사지대에 전해지자 환자들은 너 나 없이 사택 문전으로 달려와 발을 뻗고 울었는데 애끊는 통곡성은 고요한 섬을 뒤흔들며 며칠 동안 그치지 않았다.” (심전황『아으, 70년』 - 찬란한 슬픔의 소록도 p.31. 32)

생전에 세울 수 없었던 창덕비彰德碑는 1930년에 제막하였다. 비석 내용을 한글로 옮기면 이런 내용이란다.

“전략... 대정 10년 6월에 부임한 하나이 원장이 제2대라 그는 마음을 바쳐 원무를 혁신했는데 그의 모드 언행은 자애에 두었는바 그 치적은 세자면 의복과 식량을 개선함이 그 하나요, 통신 면회의 자유가 그 둘째요, 중환자실 설치가 그 셋째요, 두 번에 걸친 병원 확장이 그 넷째요... 소화 4년(1929년) 10월 16일에 급히 별세하니 환자들이 슬피 곡하고 울면서 서로 의론하여 이 비를 세운다”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가족과도 헤어졌던 한센인들에게는 인정 담긴 따뜻한 언어 한 마디가 큰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 사랑으로 소망의 섬 소록도에서 살아온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기록이 『소록도교회사 - 소록도교회가 걸어온 지난 100년간의 발자취』이다.

철거된 마을 서생리 서성교회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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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된 마을 서생리 빈 주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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