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성탄절이 코앞에 닥쳐왔다. 그래봤자 요즘도 분명 교회의 성탄절은 세속의 크리스마스란 유흥절기와는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대한 기념과 축하 및 그 사랑과 겸손의 실천이란 알맹이가 다 사라진 듯 하다. 계륵(鷄肋)이라고 했던가? 먹자니 먹을 게 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성탄절이 꼭 그런 형상이 되어버렸다. 그냥 건너뛰자니 도저히 그럴 수 없고, 하자니 늘 똑같다. 물론 예전 60년대까지의 소박한 축제 분위기도 아니며, 어정쩡하게 아이들의 유희를 보는 날로만 지낼 수도 없으니 말이다.어떻게 우리는 성탄절의 참 정
"비만한 남성의 절반 이상이 본인이 비만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상 체중을 가진 여성의 과반수가 스스로를 과체중이나 비만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상은 최근 대한임상건강증진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서울시민의 체중 및 체형관리 실태조사' 보고의 내용입니다. 이 보고 내용대로라면 아무리 살이 찌고 그 결과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와도 "나는 정상"이라고 호언하는 남성들이 과반수가 넘는 셈이고, 그 반면 보기에도 정상이고 건강상에도 문제가 없는데 "나는 비정상"이라고 자기 몸에 대한 자
오늘 우리시대 한국교회의 장년교육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어디에서 그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교회론의 교과서이며 설계도로 볼 수 있는 에베소서 및 모든 바울서신에서 온전케 함과 서로 세움의 중요성은 최우선으로 강조되는 대목이다. 이 둘은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자 교회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현대교회와 신학은 그 중요성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간과(看過)해 왔었다.그 원인은 교회론에 대한 관심과 재발견 자체가 최근의 일이기도 하지만,
극한 대립에 의한 양극화 현상의 광풍이 우리 사회를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대선자금 공방으로 끝장을 보자는 심사로 모든 일을 대하는 것 같고, 노사관계 역시 될대로 되라는 심사를 가지고 극한 대립의 양상을 보이면서 힘 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라크파병과 같은 사회적 잇슈 역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에는 이미 실패한 것 같아 보입니다.마치 1960l∼7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주말 밤 시간, 한적한 도로에서 두명이 각자 자신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해 누가 더 용감한가를 가리는 게임으로 유행했던
글 제목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매우 강력하게 권면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명령이다. 이 말씀을 그 동안 그래왔듯이 진보적인 사회복음주의자(?)들의 단골메뉴로 보지 않길 바란다. 아니 오히려 이 말씀은 과격하거나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으로 알고 세상과 분리된 거룩함 속에서 만족하며 교회는 장차 망할 세상과 전혀 관계가 없는 거룩한 공교회로만 알고 있었던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가감없이 붙들고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임이 분명하다.최근 이 명령의 중요성은 IMF 이후 경제 파탄으로 인한 자살 및 부도로 인한 가정 파괴, 외국인 근로자에
최근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은 커다란 충격으로 일파만파(一波萬波)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국가적인 현실 때문이다. 그 현상과 내용은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현실 때문에 국민들이 처한 상황이다.IMF 이후로부터 시작된 경제 곤경은 이제 IMF의 부채 상환이라는 명목상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끝이 없는 바닥으로 계속 추락하고 있다. 이로 인한 서민들의 도탄은 하늘을 찌를 듯 하며 그 절망의 구덩이를 헤쳐 나올 수 없어서
강도 만난 유대인과 그를 치료해 주며 섬기고 사랑을 베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하는 비유의 초점은 무엇인가? 물론 사랑의 실천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의 실천을 위한 대상의 선정에 관한 내용이다. 좀 더 간결하게 핵심을 말하면 "사랑의 실천은 베푸는 쪽이 아니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언뜻 생각하면 말장난도 같고 또는 쉽게 와 닿지 않는 논리처럼 보인다.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실천을 위한 교훈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믿는다. 즉 사
이미 주님은 그리스도인 삶의 원리에 대해 주님 자신의 구속적인 십자가 죽음에 대한 밀알의 비유로서 명쾌하게 설파해 주셨다. 문제는 죽음의 명제와 그 실천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조차도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하셨는데 하물며 우리야 말해 무엇하랴!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에 대한 숱한 장애물들 - 깨어지지 못한 자아, 추한 욕심, 나의 왕국 구축, 경쟁과 비교, 명예욕 - 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바울 사도는 이런 갈등을 로마서 6장에서 절규하듯 말했으며, 다른 서신서에서도 끊임없는
한국 교계의 현 상황이 절망적일 정도로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특히 70,80년대의 도시 집중화 현상 및 제반 사회 현상의 부수적인 요인이 급속한 교회 성장의 한 요소로 작용하면서 그를 위해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성경적인 수준을 타협하여 사람들을 끌어 드렸다. 게다가 교단의 세(勢) 불리기와 교회 성장의 환상 때문 부적격 목회자를 양산하는 신학교 시스템은 마치 불난 데 기름을 붓듯 한국교회 전반의 심각한 변질과 타락 현상을 열매로 거두게 됨이 과거와 현재를 어우르는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모든 목회자와 교회, 교단이 여기에서 결코 자유
문득 이 글 제목을 쓰며 생각하기에도 끔찍했던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을 떠올려 본다. 만일 그때 제대로 비상구가 있었고 비상 탈출이 가능했더라면 그 엄청난 생명들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스러진 생명들로 인한 처절한 상처와 상실의 아픔도 없었을 텐데...그러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비상구 없는 또 다른 종류의 절대절망이 바로 우리시대의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있다. 우리가 다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부인할 따름이다. 비상구 없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공포 가운데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아무 것도
곧 있으면 교갱협의 가장 큰 연례행사인 여름 영성수련회가 개최된다.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며 여러 생각을 갖는다. 외부 선교 단체의 전문 세미나가 아닌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까? 그리고 세미나 내용이 목회 현장에서 바로 써 먹을 수 있는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내용도 아닌데...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만하지 않은 강사들, 충분히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목회 현실과 접목되는 주제들, 대부분의 여름 행사가 끝난 직후의 여유로움 등등이다. 아니면 교갱협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정착되고
새 정부가 들어선 후 그 어느 때 보다 자주 언급되는 말이 있다면 "위기관리"라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말해온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항상 위기는 있어왔고, 위기는 오늘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위기라고 외치는 '늑대소년'들에게 너무 많이 속은 터라 이제는 "늑대(위기)가 왔다."고 아무리 크게 외쳐도 꿈쩍도 안 하는 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정리하자면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위기인 셈입니다.지난 6월 18일자 「뉴스위
우리의 설교와 삶의 간격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흔히 설교를 '말로만 하지 말고 보여주는 것'이 진짜 설교라고 한다. 그래서 설교는 강단에서 설교가 끝난 다음부터 시작된다는 말도 있다. 물론 설교의 선포 성격 및 설교자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입으로서의 당위적인 사역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은 설교자의 또 다른 인격을 통해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에 비인격적이며 삶에서 분리된 가식(假飾)의 설교 아니면 기계적인 업무로서의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은 분명 아니다. 여기에서 설교의 갈등과 진통
필자는 최근 친구 목사들과의 모임에서 서울 이촌동에 있는 모 초대형교회에서 수원지역에 지성전 개념의 교회설립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에 대해 수원시내 기독교 연합회에서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관계된 문서도 보았다. 그 문서를 객관적으로 검토한 결과 한 마디로 그 교회에서 주장하는 설립의 논지는 자본주의에 따른 약육강식 또는 빈익빈, 부익부의 자기 포장밖에 다름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수원 시내의 대부분의 교회들, 특히 중소형 교회는 생존(?)과 관계된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물론 필자는 대형교회에 대한
최근 국내외 주요 사건의 이슈에 따른 보수와 진보의 갈등 및 대립이 그 예각(銳角)을 더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는 사람 따라 각기 선택하지만 대체적으로 세대에 따른 성향으로 나타난다. 어느 시대에나 세대간의 차이는 존재했지만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및 변화의 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IT 세상과 그 문화의 영향으로 세대차는 대립의 양상으로까지 비쳐지고 있다. 친미와 반미, 이라크 파병에 따른 반전과 참전, 한교총과 전교조 등이 그 대표적인 현상이다. 아무튼 인류의 문화와 역사는 그 자체가 늘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을 갖는다. 이 역
최근 국내외의 가장 두드러진 이슈는 단연코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다. 우리는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 사람 따라 가진 세계관에 의해 그 기준과 관점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기초로 한 기독교 세계관 특히 복음주의 입장에서 이 전쟁을 바라봐야 한다. 근본주의나 자유주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인 것이다.하나님의 샬롬구약성경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샬롬이란 하나님과의 갈등이 없는 완전한 평화의 관계를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이고 에덴의 모습이기도 하다. 샬롬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
2003년 들어와서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정부의 변화는 거의 파격에 가깝다는 평을 듣고있고, 세계정세도 이라크전쟁을 맞으면서 급격한 변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하는 현장을 꼽으라면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 그만두겠습니다.이런 상황에서 교갱협도 나름의 변화를 모색해 보았습니다. 그 동안 오프라인으로 「교회갱신소식」을 내면서 목회자의 자기갱신을 통한 목회현장 갱신에 필요한 자료를 나누어 오려고 나름의 노력을 해왔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몇 개월에 한 번씩 나오는 소식
최근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가 새로운 각성을 하면서 저마다의 선교전략과 성장방향들을 내어놓고 있는 현실이다. 복음전도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교회의 가장 큰 주제다. 그러나 그 방법적인 면들은 늘 세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고 활용되는 것을 확인한다.역시 동일하게 21세기에 진입한 시간인 현 시대에도 교회가 지향해야할 방법은 여러가지 면이고,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비전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가만히 성찰해 보면 교회가 적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 가운데는 적합한 것도 있는
이번 여름엔 수해가 연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한국교회가 김해시 한림면사무소 앞에 긴급구호캠프를 치고 수해민들을 섬겼다. 김해 봉사를 마무리 할 즈음에 태풍 루사가 전국을 강타했다. 피해가 전국적이다.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에서는 김해시 한림면사무소 앞에 설치했던 긴급구호캠프를 강릉 내곡동으로 옮겨 다시 설치했다. 8월 31일(토) 오후 5시부터 강릉시 남산초등학교에 긴급구호캠프를 설치하고 한국교회 이름으로 긴급구호활동을 시작했다.김해에서 일어난 수해 소식을 듣고 짧은 시간에 한국교회는 근 7천여만원의 사랑을 모아주었
최근 우리 사회에 연발하는 일명 게이트라 명명되어지는 사건과 여기에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의 아들 비리까지 겹쳐서 한 마디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를 맞이해서 이른바 선거철에 표심을 잡으려는 정치인들의 목소리들까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 모든 일들에 대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아주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정치적인 리더십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현상이 어찌 정치인들에게만 국한되랴? 조금만 관심있게 살펴보면 소위 리더들이 하는 이야기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