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이 그렇게 끔찍하도록 잔인한 줄 몰랐었다. 피해자의 영육을 완전히 피폐시키는 무서운 악마 같은 폭력 행위였다. 10대 청소년들이 철이 없어서 하는 장난의 수준이 아니었다. 의도적이며 지속적인 계획을 가진 폭력이었다. 물론 가해자는 폭행을 하면서도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것 같긴 했다. 그래도 한창 꿈을 갖고 자라는 10대 청소년의 세계에서 해서는 안되고 있어서도 안되는 학교내 폭력이었다. 더 글로리가 방영되면서 학폭이 크게 주목받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학폭은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고, 그 수준이 드라마에서
한 사람의 삶은 관계(Relationship) 곧 대인(對人) 대아(對我) 대물(對物) 대직(對職),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인 대신관계(對神關係) 속에 있다고 믿는다.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나에게 관계의 축복을 선물로 주셨다. 먼저 믿는 부모 즉 개척교회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나 성장하는 남다른 은혜를 입었다. 나의 인생관은 가정교육을 통해 형성됐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의 나의 삶의 기초는 가정예배와 교회학교 교육의 열매이다.부모님께서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성경적 가치를 심어주셨다. “정호야,
2020년 12월 13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날은 온 교우들이 ‘커피 한 잔의 기적’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새로남카페 사회 기부 20억 돌파 감사예배’를 올렸기 때문이다. 당시 미래목회포럼 이사장이신 거룩한빛광성교회 정성진 목사님은 ‘네 떡을 물에 던지라’는 제목으로 성도들, 특히 자원봉사자들의 노고를 격려하는 말씀을 전하셨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의 총회장 소강석 목사님과 대전광역시 허태정 시장님, 총신대학교 이재서 총장님과 대전교육청 설동호 교육감께서 영상으로 축사를 하셨다. 참석자 모두 가슴 설렌 시간이었다.커피
새 예배당 입당 후 2008년 감격스러운 헌당 감사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헌당은 헌신의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었다. 담임목사로서 교우들의 조건 없는 헌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미래를 열어가는 동력이 돼 열매를 맺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건물은 재정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보여준다. 그러나 헌신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질문했다.“사랑의 주님! 예배당 건축과 헌당 이후 우리는 어떤 방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주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되게 해주세요!”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고민했다.새 사명을 위해 평신
새로남교회 역사는 곧 이단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이다. 우리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이단들과 맞서 싸우는 일에 앞장섰다. 구원파(박옥수 측)와는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투쟁에서 최종 승리하는 경험도 했다. 2004년 구원파는 시내버스 광고와 언론을 통해 무차별 홍보와 포교를 일삼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대전기독교연합회 이단대책위원회(위원장 오정호 목사)는 구원파의 폐해를 담은 전단지를 중앙 일간지에 끼워 넣으며 대전 시민들에게 널리 알렸다.구원파는 전단지에 기재된 협력 기관을 모두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2005년 11월
2002년 2월 24일,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예배당 건축 기공예배를 드렸다. 예배당 건축의 의미는 건물 자체가 아니라 그 건물이 어떤 목적으로 얼마나 존귀하게 쓰임 받느냐다. 부임 당시 나는 예배당 건축은 전혀 생각치 못했다. 분열된 목회 현장에서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하는 일만해도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 주일마다 새로운 가족이 몰려오니 지하 예배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안전 문제는 더 심각했다.어느 해 폭우가 들이닥쳤을 때 조성민 전도사와 밤새도록 물을 퍼낸 적도 있었다. 조 전도사는 지금 상도제일교회
새로남교회의 제자훈련 첫 입학 예배는 감격적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은혜로운 일에는 시험도 뒤따랐다. 1996년 가을, 전 교우를 위한 집회를 열었다. 강사님은 평소 존경하던 대구서문교회 이성헌 목사님이었다. 모든 성도가 은혜로 충만했다. 집회가 끝나는 날, 어떤 장로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은혜받은 열매가 나타나는구나! 이 장로님이 교회를 위해 어떤 헌신을 하시려는 걸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장로를 대면했다.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내 예상을 뒤엎었다. “목사님, 이제 저희 가정은 새로남교회를
대전 새로남교회 부임한 이후 교우들과 소통하기 원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된 심통(心通)을 넘어 영과 영이 이어진 곧 영통(靈通)을 소원했다. 영통의 핵심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 중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마치 다니엘과 세 친구, 다윗과 요나단처럼 말이다. 처음 부임 심방을 하면서 들은 말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 마음에 박혀 있다.“목사님은 언제 떠나세요?” 첫 방문에 이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로하신 교우였다. 부임했다 갑자기 서울로 떠난 목회자에 대한 실망과 서운한 감정이 내게 분출된 것이다. “집사님, 저는 여
1994년 11월 6일,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새로남교회 부임을 확정했다. ‘내가 담임목사로 교회에 부임한 순간, 나에게는 주일에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사라질 것이다.’ 부임하기 일주일 전 주일, 대전을 방문했다. 주님께서 나를 대전으로 인도하셨다면 부임에 앞서 교단을 초월해 대전의 선배 목사님들께 인사드리고 대전 지역 교회 형편을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장로님께서 내 뜻을 흡족히 여기시며 협조해 주셨다. 대전 거점 교회들의 새벽 예배부터 낮 예배, 저녁 예배까지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목사님들에게 이렇게 인
1994년 5월 미국에 세미나 인도 차 오신 옥한흠 목사님은 나를 만나자마자 대뜸 물으셨다. “오 목사는 목회자요 교수요?” 나는 평소 가졌던 소신대로 말씀드렸다. “목사님, 저는 목회를 위해 배웁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이 있네. 대전에 있는 어떤 교회가 갑자기 담임목사가 떠나면서 어려움이 생겼는데, 후임자 추천을 나에게 부탁했네. 내가 생각하기에 오 목사가 적격인 것 같으니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봤으면 하네.”미국 풀러신학대학원 박사과정을 시작한 상황에서 전혀 예상 밖의 말씀을 하시니 당황스러웠다. “네 목사님, 시간을 좀
1990년 겨울 옥한흠 목사님께서 부르셨다. “오 목사, 그동안 사랑의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수고했네. 이제 목회 안목을 넓힐 때이니, 해외로 유학 가서 더 많은 것을 배웠으면 좋겠네.” “예?”전혀 예상 못했던 제안이었다. 많은 부교역자들이 부러워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기도로 준비했다. 그러나 유학을 준비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유학 첫 단계인 비자신청부터 막혔다. 그것도 두 번이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유학비용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컸다. 어렵게 돈을 빌려 통장 잔고를 만들고 다시 서류를 준비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옥한흠 목사님이 사랑의교회를 담임하실 때 부교역자 생활을 했다. 제자양육의 열매가 왕성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미국 유학의 청운까지 품게 됐다. 그 원동력은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인 ‘증인들’에 있다.청년 시절 형님(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과 함께 제자양육의 실제를 경험했다는 것은 평생의 축복이다. 그것은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갔다. 형님과 나는 단순히 혈육의 형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영적 동지이기도 했다.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하신
1978년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 여름 수련회를 마친 어느 날이었다. 형님(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이 이런 제안을 했다. “정호야, 작년에는 내가 아버지께서 담임하시는 부산가야제일교회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했다. 올해는 네가 준비했으면 좋겠다.”은혜받은 대학부 동료들과 함께 그 여름을 불태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형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알겠어, 형. 올여름은 내가 성경학교를 인도할게.”부산가야제일교회에 내려가니 아이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당시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많이 출석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신학도인 나는 나름대로
1976년 봄바람이 불 때 서울 총신대학의 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그 배지가 결코 예비 목회자로서 소명을 불타오르게 하지는 못했다. 장학생 선발시험으로 입학한 것은 은혜였지만, 자동으로 신앙 성숙의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이러한 갈등은 진로에 대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휴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다른 데 있었다. 신학교 교육과정 연단과는 별개로 공동체를 예비하신 것이다. 그 공동체가 바로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 ‘증인들’이었다. 증인들과의 만남은 믿음 생활의 즐거움과 역동성을 재발견하게 했다.당시 형님(
부산 가야제일교회가 개척교회 시절이던 1960년대 중후반 어느 날이었다. 남루한 차림의 사람이 찾아왔다. “저는 조금 전 출소했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 십자가를 보고 왔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아버지는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여 식사를 함께했다. 그 자리에 나도 있었다. 어렸을 때라 눈치를 흘끔 보며 식사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사연을 다 들어주시고 그 사람이 집을 나설 때,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격려금까지 줘가며 배웅했다.그런데 문제는 며칠 후 발생했다. 노회 주최 체육대회에 온 가족이 참석했는데, 돌아와 보니 집안이
1963년 1월 1일 새해 첫날이었다. 부산 가야제일교회를 담임하던 아버지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했다. 내가 6살 때 일이다. “이제부터 너희들 교육과 신앙의 세대 계승을 위해 가훈을 발표하겠다. 너희들도 훗날 성장해서 이 가훈대로 가정을 잘 이끌어주길 바란다.”가훈은 철저한 신본주의 가치관, 보수 개혁주의 신앙을 담고 있었다. ‘첫째,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둘째,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셋째, 이웃을 사랑하여 덕을 세우는 삶. 넷째, 범사에 감사하는 삶. 다섯째, 오직 성령충만하여 범사에 승리하는 삶.’
아버지가 1961년 전도사로 부임한 부산 가야제일교회는 초라하게 시작된 개척교회였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해서 68년 매입한 198㎡(59평) 부지에 예배당을 건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목회자 가정인 우리 집에서 예배당 건축에 발 벗고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어느 날 아버지는 합판으로 헌금통을 만드셨다. 전면에 우리 4형제 이름을 기록했다. 때때로 어른들이 사택을 방문하고 과자 사 먹으라고 건네준 용돈이 건축헌금 1순위가 됐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함께 고철을 주워 고물상에 팔아 건축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액수는 적
수년 전 남미 페루를 방문해 잉카문명의 현장인 마추픽추를 등정했다. 난생처음 해발 3000m 위에 있는 호텔에서 1박을 했다. 다음 날 습관대로 새벽에 눈을 떴는데 그날이 마침 생일이었다.나의 지나온 삶을 회상했다. 주님께서 내려주신 복을 헤아려보니 12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믿음의 부모를 만나 4대째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난 복이었다.“하나님 아버지의 섭리 가운데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경과 교회, 신앙생활을 중시하며 성경적인 가치로 교육·훈련받고 마음에 새길 수
지난 8월 22일(월)부터 24일(수)까지 경기도 안성에 있는 사랑의교회 수양관에서 제27차 교갱협 영성수련회가 열렸습니다. 故 옥한흠 목사님에 의해 처음 1996년에 교회갱신협의회(이하 교갱협)가 창립된 이후, 목회자들의 갱신을 위한 첫 번째 영성수련회가 소망수양관(용인)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개최되어 왔습니다.금년에는 코로나19(Covid19)의 영향으로 개최 여부를 놓고 고심 끝에 참석자 모두에게 신속항원검사를 병원에서 받아 확인증을 제시함으로 참여가능하게 했습니다. 사전 검사를 함으로 양성 반응을 보인 몇몇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야고보서 4장 8절)며칠 전 큰아이가 신었던 작고 낡은 신발을 정리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수년은 늦게 걸었기 때문에 한 번도 신지 못한 새 신발도 있었던 터라 닳아서 바꾸어야 하는 신발을 보니 늦지만 아이가 신체적으로 발달하고 있음에 뿌듯해서 감사의 고백이 나왔습니다.우리의 인생은 연습의 연속입니다. 누워만 있던 어린 아기는 때가 되면 기어 다니고 일어나고 이내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