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호 목사의 진국 목회 (6)

오정현(둘째 줄 가운데) 사랑의교회 목사가 1981년 11월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 간사를 마치고 박성규(맨 뒷줄 왼쪽 네 번째) 부산 부전교회 목사 등 대학부 회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오정호(둘째 줄 왼쪽 두 번째) 대전 새로남교회 목사가 형의 뒤를 이어 대학부 간사를 맡았다.
오정현(둘째 줄 가운데) 사랑의교회 목사가 1981년 11월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 간사를 마치고 박성규(맨 뒷줄 왼쪽 네 번째) 부산 부전교회 목사 등 대학부 회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오정호(둘째 줄 왼쪽 두 번째) 대전 새로남교회 목사가 형의 뒤를 이어 대학부 간사를 맡았다.

1978년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 여름 수련회를 마친 어느 날이었다. 형님(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이 이런 제안을 했다. “정호야, 작년에는 내가 아버지께서 담임하시는 부산가야제일교회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했다. 올해는 네가 준비했으면 좋겠다.”

은혜받은 대학부 동료들과 함께 그 여름을 불태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형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알겠어, 형. 올여름은 내가 성경학교를 인도할게.”

부산가야제일교회에 내려가니 아이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당시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많이 출석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신학도인 나는 나름대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말씀을 준비했다. 유치원 수준부터 고학년 아이까지 다 아우르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총신대학 신학도가 아닌가. 한번 제대로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자.’ 매시간 뚝심 있게 메시지를 전했다. 다만 문제는 어린아이들의 관심과 주의를 끄는데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집회 뒷자리에서 유심히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여자분이 있었다. 여인은 특별 강사로 초청받아 교회에 왔던 동화 구연 어린이 전문강사였다. 그녀는 남다른 은사를 발휘하며 한순간에 아이들을 압도하며 웃겼다 울렸다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놓았다.

“대단하십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조성희라고 해요.” “우리 앞으로도 잘해봅시다.”

서울에서 내려간 신학도와 성경학교 강사로 초청된 아가씨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해 여름 첫 만남 이후 우리는 5년 동안 데이트를 했다.

“성희 자매, 나와 함께 평생 복음을 위해 동역하는 게 어떻겠소.” 1983년 3월 1일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정동채플에서 옥한흠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했다. 아내와 나는 그렇게 39년 동역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

‘만약 내가 형님의 제안에 순종하지 않고 부산에 내려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크든 작든 일상의 순종은 모든 축복의 출발점이 된다. 하지만 불순종은 모든 실패의 출발점이 된다. 그 교훈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다수의 젊은이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은혜 베푸심에 눈이 열리고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복음 안에서의 교제를 통해 평생 배우자까지 만나는 복을 누린다. 나는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교회 밖에서 맴돌지 말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세요. 은혜로운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만남의 축복을 누리세요.” 요새 말로 ‘아싸’(아웃사이더, outsider)로 살지 말고 ‘인싸’(인사이더, insider)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 수련회를 인도하셨던 옥 목사님은 평신도를 깨우는 비전을 목회 현장으로 옮기기 위해 교회를 개척했다. 바로 사랑의교회 전신인 강남은평교회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학생들은 78년 7월 개척 예배 때 특송을 했다. 그 찬양대의 지휘자는 형님이었다. 이처럼 사랑의교회 설립 예배 때부터 시작된 만남은 2003년 8월 옥 목사님의 후임 목사로 부임하는 역사로 이어졌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숨어 있던 만남의 신비가 아닐까.

옥 목사님은 강남은평교회를 개척하기 전 어느 날 총신대 휴게실로 나를 불렀다. “정호 형제, 조만간 교회를 개척하려고 해. 내가 장년부를 담당할 테니 정호 형제가 주일학교를 맡아 지도해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예기치 않은 옥 목사님의 제안에 즉답을 드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형님과 함께 내수동교회 대학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목사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사역지를 옮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이 있었는지 몰랐네. 내게도 배울 것이 많을 텐데….” 그런데 역사에는 반전의 묘미가 있다. 교회 개척 때는 합류하지 못했지만 부산에서 만나 데이트하던 자매가 서울에 와서 공부하게 됐고, 나의 소개로 사랑의교회 주일학교 전도사로 12년 동안 사역하게 됐다.

나 역시 85년 서초동 사랑의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고 옥 목사님의 부르심에 따라 그해 8월 부교역자로 부임했다. 7년 동안 부교역자로 목사님께 목회를 배우던 나는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6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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