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호 목사의 진국 목회 (8)

오정호(오른쪽 두 번째) 대전 새로남교회 목사가 1994년 미국 풀러신학교 유학 시절 조성희 사모와 두 아들과 함께 애리조나주 그랜드 캐니언을 방문했다.
오정호(오른쪽 두 번째) 대전 새로남교회 목사가 1994년 미국 풀러신학교 유학 시절 조성희 사모와 두 아들과 함께 애리조나주 그랜드 캐니언을 방문했다.

1990년 겨울 옥한흠 목사님께서 부르셨다. “오 목사, 그동안 사랑의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수고했네. 이제 목회 안목을 넓힐 때이니, 해외로 유학 가서 더 많은 것을 배웠으면 좋겠네.” “예?”

전혀 예상 못했던 제안이었다. 많은 부교역자들이 부러워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기도로 준비했다. 그러나 유학을 준비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유학 첫 단계인 비자신청부터 막혔다. 그것도 두 번이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유학비용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컸다. 어렵게 돈을 빌려 통장 잔고를 만들고 다시 서류를 준비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대사관 앞에는 비자 인터뷰를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금처럼 예약제가 아니고 선착순이었기에, 온종일 땀 흘리며 땡볕에서 기다려야 했다.

두 번째 비자 인터뷰 때는 나름 잘 준비하고 대사관에 들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미국 영사가 힘들게 준비한 서류를 유리창 아래로 밀어내는 게 아닌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여보시오, 내가 미국에 평생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마치면 곧바로 한국에 돌아올 건데 왜 비자를 내주지 않는 것이오. 나는 장로교 목사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해왔소. 목사의 긍지를 꺾지 마시오.”

심기가 불편해서 따지듯이 물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영사의 입에서 나왔다. “목사님, 불편하신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비자 인터뷰를 할 때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셨던 목사님들이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할 말을 잃었다. 비자발급이 거부되고 미국대사관을 나와 세종로를 터벅터벅 걸으며 스스로 다짐했다. ‘위대한 목사는 되지 못할지언정, 후배들의 길을 가로막는 목사는 되지 않겠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대사관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아내는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해줬다. “여보, 당신 평생에 미국을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가기는 가야지.” “그러면 재도전하세요.” 아내의 격려로 세 번째 비자 인터뷰를 했고 마침내 F-1 비자를 받았다.

1992년 7월 사랑의교회에서 마지막 주일이었다. 옥 목사님은 나에게 1부에서 4부까지 주일설교를 모두 맡기셨다. 그리고 광고 시간마다 나와 아내를 앞으로 불러 세우시고 ‘미국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성도 여러분, 오정호 목사 부부가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고 이제 떠납니다. 내가 알기로 이 부부는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사랑으로 후원해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내와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 돌을 지낸 둘째와 1992년 8월 미국에 정착했다. 무일푼에 가까운 우리 가족은 여러 성도의 사랑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옥 목사님과 사랑의교회 성도께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감사의 기도가 나온다.

유학할 당시는 그해 5월 LA 폭동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미국 사회가 어수선한데도 우리는 재정이 충분하지 않아 풀러턴의 히스패닉이 모여 사는 동네에 거처를 마련했다.

학업에만 집중하기로 하고 오른 유학길이었다. 매달 지급해야 하는 렌트비와 식료품비, 신용이 없어서 현찰로 지급해야 하는 중고차 가격 등 여러가지 풀어야 할 문제가 컸다. 하나님은 때마다 도우시는 손길을 보내주셨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으며 교회 사역도 않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했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미국 내 한인교회 두 곳에서 청빙 제의가 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공부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지 목회를 하려고 들어온 게 아닙니다. 저는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중하게 거절했다. 분명한 목표를 갖고 미국에 왔기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내도 사역과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삶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때는 형님(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이 1988년 1월 LA 세리토스의 남가주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고 제자훈련으로 폭발적인 부흥을 일굴 때다. 아내는 그 교회에서 한국어 주일학교를 시작했고 한국의 극동방송에서 오랜 시간 진행자로 섬겼던 경험을 바탕으로 라디오코리아와 미주복음방송에서 PD겸 아나운서로 일했다.

아내가 일하던 곳은 LA 중심부였다. 내가 공부하던 풀러신학교와는 거리가 있기에 이른 아침 아내는 나를 태워준 후 출근했다. 차가 한 대밖에 없었기에 아내가 밤늦게 데리러 오기까지 아침부터 꼼짝없이 도서관에 있어야 했다. 시간이 흘러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세미나 인도 차 미국에 방문하셨던 옥 목사님께서 나를 찾으셨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8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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