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장기실 전도사 이야기(1)

故 장기실 전도사

서남해 낙도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평생을 교인들과 함께 살다 세상을 떠난 한 여전도사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왔다. ‘평안도 여자 장기실’ 이야기였다. 복음의 사자, 예수 사랑과 헌신이었다.
아름다운 생애를 찾아 대둔도를 찾아갔다. 몇 분의 증언은 감격이고 감동이고 눈물이었다.

목포노회장을 지냈던 백영규 목사(목포상리교회 은퇴)는
“장기실 전도사는 도서지역 선교에 특별한 사명감을 갖고 대둔도에 승천교회와 다른 섬에도 교회들을 개척했습니다. 총회신학교 동기생 목사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목포지역(목포노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장기실(張起實)은 평안도 용천 사람이다.
1904년 1월 13일 장죽섭 목사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용천지역은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교회가 세워졌다. 만주로 드나들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조국에 들어와 교회를 세운 것이다. 압록 강변 의주, 선천, 용천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교인이 많은 선천을 두고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말하는 연유가 이것이다.
장기실의 부친 장 목사는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105인 사건과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했고, 북경에 살면서는 조선인거류민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장기실도 그 때 중국에서 살았다. 부산에서 병원을 했던 장기려 장로는 장 목사의 형 장운섭의 아들로 장기실의 4촌 동생이다. 모두 믿음의 가문이었다.

1959년 1월 7일.
장기실 전도사(당시 55세)가 대둔도 도목리에 5평 남짓한 천막교회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니 이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 도목리교회의 시작이었다. 해남 고당교회 담임 교역자였던 그가 섬으로 들어갔던 사연은 이렇다.
고당교회(해남군 문내면)을 맡고 있던 그가 흑산도 예리교회 부흥회를 인도했었다. 그 때 흑산도 동쪽 3킬로 밖에 있는 대둔도를 돌아보았다. 3개 마을, 4백여 세대가 살고, 천막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교역자가 없었다. 교통이 불편하고 생활도 어려운 낙도를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기도하고 있었다.
장 전도사가 갑자기 고당교회를 사면하고 대둔도로 들어갔다.
그 때로부터 1986년 9월,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27년을 섬사람들과 함께 살고 죽어서도 예배당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묻혔다. 1981년에 대둔도승천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예배당 가까이서 사는 이생단 권사의 집에 들렸다.
“어머니께서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훈련시켰습니다. 십일조를 확실하게 가르쳤지요. 고기를 팔아서 돈이 들어오면 십일조를 미리 받아가셨습니다. 그랬다가 예배시간에 내주셨습니다. 돈 한 푼이 귀한 때여서 급하면 쓰기 쉽다며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사도 금했습니다. 제사를 파했습니다.”
이 권사는 승천교회 김현중 장로와 부부이다. 이 분들이 장전도사를 어머니라 부르는 사연이 있다. 혈육을 다 끊고 단신으로 들어온 장전도사는 김현중 소년을 아들처럼 돌봐주었고, 행단 자매를 딸처럼 사랑했다. 나중에는 둘을 결혼시켰다. 이들이 전도사를 어머니처럼 모셨던 것이다.

김 장로는 대둔도에서 가두리양식장을 시작했다.
바다가 깊고 파도가 높아서 물고기 양식에 아무도 손대지 않았지만 성공을 거두자 주민들도 이 일을 시작했다. 해초를 뜯거나 고기잡이가 생업의 전부였던 가난한 섬, 논농사가 없으니 고구마를 주식으로 삼았던 숙명적인 가난을 벗을 수 있었다. 지금은 대둔도에 3개 교회가 있고, 승천교회가 있는 도목리는 신앙촌처럼 평안하고 소득이 높은 마을이 되었다.

목포에서 서남쪽 94킬로 대흑산도에 내려
 배를 갈아타고 북서쪽 3킬로 뱃길까지 5시간도 더 걸려 다니던 대둔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 사랑으로 헌신했던 장기실.
그녀는 충성된 사명자, 어려운 시대에 길 잃은 양 무리와 함께 했던 선한 목자였다.
그녀 묘지 앞에 서니 승천교회와 도목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기도하며 눈물로 씨를 뿌렸던 열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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