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장기실 전도사 이야기(2)

다도해 섬마다 세워진 교회에는 주춧돌 같은 아름다운 간증이 묻혀있다.
그 한 분 장기실 전도사의 이야기를 발굴했다.
장기실 전도사는 1955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졸업했다. 동기생들은 다 목사가 되었지만 그녀는 총회 법이 허락지 않아서 평생을 전도사도 살아야 했다.

서울 돈암동교회를 섬기다 1958년에 고당교회(전남 해남) 담임 교역자로 내려왔다가 1960년 1월에 사면한다. 햇수로 3년 만이다. 그리고 흑산면 대둔도로 떠났다. 고당교회는 농촌교회라도 교인이 백여 명 남짓한 큰 교회였다.
목포에서 흑산도까지 5시간 뱃길이었다. 거기서 대둔도로 건넜다. 흑산도에 속한 몇 개의 유인도에는 거의 교회가 없던 때였다. 바울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 사람 환상을 보았던 것처럼 그도 복음을 고대하는 대둔도 사람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거처할 주택도 없는 천막교회였다. 바울처럼 복음에 매인 바 되어 망망한 바다 위에 떠있는 낙도에 들어간 것이다. 

고당고회 김태안 장로는
장 전도사가 남자처럼 성격이 활달하고 무슨 일에나 열심이어서 교회를 잘 인도했다고 회고한다. 농번기에는 교인들이 피곤해서 새벽 기도에 못 나와도 책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도로 돌보던 사랑을 잊을 수 없다 했다.  갑자기 대둔도로 가는 것을 보고 특별한 연고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단다. 교회가 든든히 선 고당교회가 더 성장하고 큰일을 하려면 남자 목사가 맡아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 같고, 한편으로는 무 교회 지역에 교회개척 사명이 있어 섬 목회자로 나섰던 것 같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간 것이다.
도목리에 자리를 잡았다. 천막 예배처소에서 밤낮으로 엎드려 기도하며 복음을 선포했다.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복음 전도자일 뿐 아니라 주민들을 돕는 봉사자였다.
한국 최초(1883년)로 설립된 황해도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이 쪽 복음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에게 씨감자를 나눠주고, 중병을 앓은 자들에게 중국서 가져온 금계랍을 나눠주었던 것처럼 장 전도사도 무의촌 산파 역할을 맡았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중국 북경에서 산파 조수를 했고, 1947년에는 산파 면허증을 획득해서 여러 해를 병원에서 일했다. 그때는 병원이 없어서 출산하다가 죽는 일도 흔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침술로도 급한 환자를 돌보았다. 영혼의 파수꾼으로, 주민을 위한 봉사자로 살았던 것이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처럼 온갖 무속신앙과 우상을 빠졌던 삭막한 주민들 심령에 복음을 심고, 예수 사랑으로 돌보았다.

도목리교회가 든든히 서 가면서 영산도에도 교회를 세웠다.
일찍이 천주교회가 전도를 하다가 철수해버린 척박한 섬이었다. 천주교 성당(공소)을 빌려 영산리교회를 세우고 한 전도인을 세워 교회를 인도하다가 문영수 전도사가 들어와 1977년에 예배당을 건축했다. 문영수 목사(광주 대동교회)는 이렇게 말했다. “고령에 허리가 많이 굽어서 출입도 불편한데 우리 교회 건축비 모금을 위해 부산까지 갔습니다. 어렵게 모금한 건축비를 건네주면서 ‘젊은 전도사님이 잘 해봐요’ 하셨고... 어머니처럼 교회를 살피고 아껴주시던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고.

대둔도 수리와 오리에도 교회를 세웠다.
수리 교회 이야기다. 1965년에 기도처를 세웠다. 정삼섭 전도사가 1982년에 부임했다. 그가 여름방학 때 봉사활동으로 들어가 여름성경학교를 열었는데 50여 명이 모였다. 그 아이들을 못 잊어 다시 들어간 몇 번이나 보따리를 싸서 육지로 나오려다 주저앉았고, 2011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30년 한 평생을 바쳤다.

장기실 전도사. 일찍 결혼했지만 소박 당한 그녀는 세상 모든 것을 끊고 교회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살았다. 이름도 빛도 없었다. 도목리교회는 승천교회로 이름을 바꿨고, 지역을 복음화해서 여러 교회를 돕고 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언약대로 하늘의 영광을 누리지 않겠는가.

대둔도 수리교회 정삼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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