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장기실 전도사 이야기(3)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성경 아가서의 한 구절이다.
아름답고 향기로움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찬송가에도 예수님을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의 참 사랑의 향기로 간 데마다 풍겨나게 하소서.” 하였다.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기도이다.
한 평생을 예수님과 그의 양 떼를 위하여 살았던 분, 그녀는 낙도의 영혼들과 함께 살다가 거기서 죽었고, 거기 묻혔다. 故 장기실 전도사 이야기다. 

지금은 가로막힌 땅, 평안북도 용천군이 그녀의 출생지이다.
할아버지 장정식의 네 아들, 장자 운섭 그리고 학섭 일섭 죽섭 이었다. 운섭의 아들이 기려 장로이고, 죽섭의 딸이 기실이었다. 기려는 1911년생이고, 기실은 1904년생이다.
할아버지 장정식은 4백 석을 거두는 유복한 가정이었다. 할머니의 신앙생활이 그 가문을 빛나게 했다. 할머니 이경심은 입암교회 교인이었다. 장손인 운섭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 기려를 등에 업고 교회에 다녔다. 7세가 될 때까지 할머니의 이불을 덮고 자라면서 믿음으로 자란 것이다. 집에서도 아침저녁으로 어린 것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던 신앙의 가족이었다.

작은 아들 죽섭은 목사(감리교)가 되었다.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던 그는 조선총독부의 기독교 탄압을 받았다.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105인 사건’(총독 암살음모)을 조작하여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장 목사는 북경으로 망명했다. 한때, 러시아 니콜스크지역 해림교회를 담임하다가 다시 만주로 옮겨 독립운동을 했고, 한때는 북경 거류민단장을 지냈다.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기려는 경성의전을 나와 평양 기홀병원(홀부인기념병원), 그리고 김일성대학 의대교수로 있다가 6‧25 때 월남하여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 예수님 닮아 섬김의 삶, 청빈한 삶을 살았다.

기실은 정신여학교와 총회신학교(제48회, 1955)를 졸업하고 평생을 전도사로 살았다. 동기생 가운데는 총회신학교 교수 김득룡 목사, 총회장 이영수 목사, 기독신문 주필 채기은 목사도 있었다. 그녀는 동기생들과는 달리 목사가 될 수 없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법이 여자에게는 목사 안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교회를 섬겼다.

도목리교회를 섬길 때 성례(세례와 성찬)를 행할 때면 목사를 초청하는데 목포나 다른 섬에서 와야 했다. 교회법에 전도사는 성례를 집례할 수 없었다. 목포에서 흑산도까지 다섯 시간이 넘게 걸리고, 바람이라도 크게 불면 뱃길이 끊겼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세례 받을 교인을 목포로 나오라 했다.

가난도 견디기 어려웠다. 대둔도는 논농사가 전혀 없고 겨우 고구마를 심을 손바닥만 한 밭뿐이었다. 교역자 역시 삼시 세 끼를 챙겨 먹을 수 없었다.  그 교회 부흥회를 인도했던 이영하 목사(광주 백향교회)의 이야기다. 장 전도사가 “목사님, 쌀 한 톨 구경 못하고 살았던 해가 많았습니다. 고구마라도 넉넉했으면 원이 없지요.” 하더란다. 어려운 시절을 교인들과 함께 살았던 것이다. 

승천교회 이생단 권사 이야기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전도사님 집에 놀러 갔다가 몇 개 남지 않은 고구마를 삶아 먹었어요. 전도사님이 아끼고 아껴서 끼니를 이을 것인데 그것을 철없는 우리가 먹어버렸으니 전도사님은 말도 못하고 끼니를 굶었을 것”이라며 지금도 그때 일이 늘 죄송하단다.

장 전도사가 70 고령 때 남자 전도사를 세웠다.
그때 신학생이었던 유종화 목사(광주새순교회)의 기억이다.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소. 죽으면 묘지를 만들지 말고 평토장을 해주시오.” 했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복음에 매여 자신을 드린 장기실 전도사.
예수께서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그렇게 살았던 것 아닌가.
“주 위해 온몸을 바쳐 힘 다해 섬기면 독생자 보내신 성부 은혜로 갚아주리”
그녀는 흑산도 수선화였다.

대둔도 승천교회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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