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1) 한목협 제18회 전국수련회

1. 외면 받는 종교

종교담당 기자로 10여 년 일하면서 느낀 점은 점차 종교가 외면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2003년 제가 처음 조선일보에서 종교를 담당하던 때에는 모든 일간지가 1주일에 한 번은 ‘종교면’이 있었습니다. 보통 광고를 뺀 10단 지면 1개면을 만들 땐 톱과 사이드, 박스 등 최소 3건, 많으면 5건 정도의 기사가 게재됩니다. 이 시절, 종교담당 기자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종교 담당 기자들 사이에 ‘직업형 은어’가 몇가지 있는데 그 중 ‘개불천’이란 말이 있습니다. 개신교, 불교, 천주교 등 한국의 주요 종교를 약칭한 것입니다. 1주일에 1개면씩 종교면을 만들던 시절, 모든 종교담당 기자들의 고민은 ‘개불천을 어떻게 황금분할해서 지면을 꾸릴 것이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톱기사를 한 번은 개신교, 다음엔 불교, 그 다움엔 천주교로 하는 정도가 아니라, 비판적 기사와 응원형 기사를 골고루 써야하는 등등 저희 나름대로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10여 년 후인 2016년 지금 상황을 보면 1주일에 1회씩 ‘종교면’을 게재하는 일간지는 없습니다. 한겨레신문이 매주 수요일자에서 ‘휴심정’이라는 제목으로 종교기사를 소개하고 있지만 톱기사만 뉴스로 다루고 나머지는 종교인 칼럼 등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1주일에 종교 기사를 한 건도 다루지 않는 일간지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저희 조선일보도 의지를 가지고 종교기사를 게재하고 있지만 1개 면을 모두 쓰지는 않고 있습니다. 평균 2~3건 정도 종교기사를 쓰고 있을 정도입니다.

과거 한국교회언론회가 각 언론사별로 개신교 기사를 다룬 횟수와 분량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신문 지면을 자로 재서 ‘조선일보는 몇 ㎠’ ‘한겨레는 몇 ㎠’ 식으로 통계를 냈습니다. 아마 지금 다시 그런 조사를 해보신다면 엄청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종교기사의 양이 줄었을까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그만큼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은 독자들의 관심분야와 관심사를 다뤄야 하는 숙명이 있습니다. 독자들이 관심이 있다면 누가 말려도 종교면을 대대적으로 배치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기사를 상당히 크게 써도 별 반향도 없고, 반대로 기사를 살금살금 줄여도 아무 반응도 없으니 점점 지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개신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종교에 공통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2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으로 천주교가 크게 주목받은 일이 있습니다. 당시에 모든 신문, 방송이 앞다퉈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했습니다. 당시 선출된 지 1년을 갓 넘긴 교황은 과연 세계적인 ‘수퍼스타’다운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다녀간 직후엔 ‘거대한 냉담의 빙하가 녹고 있다’는 둥, ‘천주교 교세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둥 관측이 무성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대했던 ‘프란치스코 효과’는 없었습니다. 교황이 방한한 2014년 통계에서 증가세가 미미하자 천주교 주변에서는 “천주교는 보통 6개월 정도 걸리는 교리공부 과정을 마치고 세례를 받은 후에야 교적(敎籍)에 오르기 때문에 시차(時差)가 있을 것”이라면서 2015년 통계를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1년을 기다려 뚜껑을 열었지만 기대했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천주교 통계에 따르면 2014년보다 2015년 신자 수는 9만 명이 늘어 565만 5000여 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전년보다 9만 명 늘었습니다. 그런데 영세자 수는 2014년 12만 명에서 2015년 11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제대로 활동하는 신자 수를 가리키는 지표인 미사참여율은 20%대를 겨우 턱걸이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외국의 유명 종교인이 방한하고 그 영향이 국내 종교계에 미친 것은 1980년대에 끝난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일찍이 한국 개신교는 1970년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방한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천주교도 1984년과 1989년 요한 바오로2세 교황의 방한 이후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인 적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있기에 천주교계는 ‘프란치스코 효과’를 기대했지만 실제 효과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개신교계 역시 지난 2006년 ‘제2의 빌리 그레이엄’이라 불리는 릭 워렌 목사의 방한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당시에도 아무런 영향이 없었습니다.

결국 지금 이곳에서 활동하는 종교인들의 활동이 우리 사회에서 관심과 호응을 받지 못하면 우선 국민들에게 외면 받고 언론으로부터도 관심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2016년 6월 21일(화) 나사렛대학교에서 열린 한목협 제18회 전국수련회에서 조선일보 김한수 종교전문기자가 두번째 주제발제를 전하고 있다.

 

2. 개선되지 않는 문제

개신교를 비롯한 한국의 종교계가 이렇게 대중과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 것은 ‘자업자득’인 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담당 기자로서 10여 년 동안 저는 참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문자 그대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곳곳에서 일부러 숨은 듯 조용히 활동하는 종교인을 소개한 것이 그렇습니다. 반면에 실망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처음 종교를 담당하던 2000년대 초반은 교회의 경우, 세습이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양적 성장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종교기사를 고를 때 ‘햇볕정책’을 생각했습니다. 잘못하는 부분을 비판하기 보다는 잘하고 계시는 사례를 소개하다보면 교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기대를 많이 접었습니다. 그저 저 혼자 짝사랑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됩니다. 또한 좋은 일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칭찬의 후폭풍을 몇 차례 겪은 후의 일입니다.

특히 담임 목사직을 아들이 아닌 후임 목회자에게 인계하는 경우는 의지를 갖고 많이 소개한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문제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원만히 목회자의 리더십 교체가 이뤄졌다’는 기사를 쓰기가 두렵습니다. 불과 몇 년 만에 ‘교회가 두 쪽 났다’는 소식이 들려올까 겁이 나는 것이지요.

이런 일이 빈발하면서 외면과 무관심이 시작됐다고 봅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던 시절, 교계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꽤 시끄러웠습니다. 북한 문제, 국가보안법, 사학법 문제 등에 각가 찬반의 목소리가 꽤 높았습니다. 개신교계가 힘이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입니다. 광장에서 각각 찬반의 목소리를 높이던 그 순간에도 교회에서는 각종 비리와 추문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자기들이나 잘 하지”라는 비판이 나오고 쌓여갔습니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분당샘물교회 사건은 이렇게 쌓여오던 개신교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폭발한 계기가 됐습니다. 사건은 참 아이러니한 시점에 터졌습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뭔가 쇄신해보려고 노력하던 중에 찬물을 끼얹은 모양새였습니다. 가능한 한 개신교계의 입장에서 사건을 다루려했던 종교담당기자들로서는 참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개독교’ 같은 용어들이 인터넷에 난무했고, 심지어 혐오감까지 표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동안에 쌓였던 요즘말로 ‘적폐’가 한꺼번에 노출되는 양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또 한 번 개신교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제대로 반성 혹은 참회도 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대응도 전략 없이 수세적으로만 흘렀습니다. 거센 사회적 반감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 이후로 한국 개신교의 개교회주의는 더욱 강해졌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의 실력에 비해 넘치는 언행을 하면서도 스스로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거나 못했다면, 아프간 사태 이후로는 정당한 발언도 오히려 주눅 들어서 못하고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까요.

돌이켜보면 한국의 종교계는 대한민국 사회의 거울이었습니다. 1970~80년대 고도성장기에 함께 성장했고, 1990년대 이후로는 한국 사회가 소득이 2만 달러에서 정체됐듯이 종교계도 이때 이미 정체기에 접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나 기업이 구조조정을 미루고 과거의 습관에 젖어 있다가 IMF외환위기를 맞았듯이 종교계 역시 적당한 시점에서 스스로 구조조정 혹은 개혁, 변화를 꾀하지 못하다가 현재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만 10여 년 전과 비교해 보면 희망은 있습니다. 당시에는 ‘위기’라는 단어에 대해 종교계 극히 일부만 동의하고 대다수는 “왜 위기가 아닌데, 위기라고 말해서 불안감을 퍼뜨리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개신교뿐 아니라 대부분 종교계 인사들이 위기임을 부인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한다는 자체가 저는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6년 6월 21일(화) 나사렛대학교에서 열린 한목협 제18회 전국수련회에서 조선일보 김한수 종교전문기자가 두번째 주제발제를 전하고 있다.

 

3. 제언

과거 개신교인들은 ‘예수쟁이’로 불렸습니다. 이 단어엔 비아냥과 함께 ‘일반인과는 뭔가 다른 사람’이란 뜻이 내포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농한기 겨울철에도 노름하지 않는 사람, 술담배 하지 않는 사람, 남에게 예수 믿으라고 권하는 사람. 그래서 함께 어울리기엔 뭔가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사람. 이런 의미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엔 없었던 담배까지 피우지 못하게 하는 것을 궁금하게 여겨 이런저런 자료를 뒤적인 적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깨달은 것은 개신교 선교 초기 선교사들은 ‘과거와는 다른 사람’을 만들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모두가 알면서도 관습 때문에 고치지 않았던 것을 과감히 끊어내고 일상생활에서부터 개혁한 것이 개신교였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 당시 “나는 아간 같은 놈”이라며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도 그런 역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시계를 현재로 돌려보면 어떻습니까. 지금 개신교가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중 몇 가지 평소 생각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저출산 문제입니다. 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국가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당장 교회의 문제입니다. 조계사 주지 스님은 경내에 어린이집을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주변에 직장이 있는 아빠나 엄마가 아기를 맡기고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것이지요. 저는 솔직히 그 말씀을 듣고 좀 놀랐습니다. 사찰에서 이런 정도의 발상을 듣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찰에 비해 교회는 조건이 매우 좋습니다. 직장 근처에 있는 시내 교회는 주변 직장인들의 자녀를, 주택가에 있는 교회는 직장에 출근하기 전 아기를 맡아주고 퇴근 때 데려가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실제로 과거에 개신교계에서 이런 운동을 벌이자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때 왜 정착되고 확산되지 못했는지 원인을 잘 따져본다면 충분히 성공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건물 문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1990년대부터 건물을 갖지 않는 교회가 늘어났습니다. 미션스쿨 등에 강당을 지어주고 교회는 일요일만 사용하는 교회들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발 나아가 기존의 건물을 사회를 위해 내놓는 운동을 하면 어떨까 합니다. 지금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대형교회들은 훌륭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 대개 평소에도 건물을 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저출산 추세가 이어진다면, 결국은 활용도는 떨어질 것입니다. 그럴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평일엔 지역사회를 위해서 교회 건물을 내놓자는 말씀입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에 고마운 존재,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결과적으로 교회가 장수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스티커 운동’입니다. 과거 천주교의 ‘내 탓이오’나 법정 스님이 만든 시민단체 ‘맑고 향기롭게’는 차량 뒤 유리창에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습니다. ‘내 탓이오’운동 당시엔 “뒷 유리창에 붙이면 뒤차 탓이란 말이냐”라는 농담도 있었습니다. 요즘 차를 몰고 다니다보면 택배 차량 등에 ‘이 차의 기사는 ○○○입니다. 법규를 지키겠습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인 경우를 봅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해서 ‘저는 ○○○교회 성도입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이는 운동을 했으면 합니다. 굳이 ‘교통법규를 지키겠다’는 문구를 넣지 않아도 스스로 법류를 지키고 난폭운전, 보복운전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교회 출석하는 성도님들은 일상생활에 모범이 될 것입니다만 이런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 전체에 스스로를 한 번 더 생각하는 문화를 만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밖에도 큰 부담 없이 큰 예산 들이지 않고, 지금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운동이 정착이 된다면 교단과 교파를 넘어 일반 교인들이 ‘개신교인’이라는 일체성을 느끼는 계기도 될 것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21세기의 예수쟁이’ 운동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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