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1) 한목협 제18회 전국수련회

반갑습니다. 방금 소개 받은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장 김철환 목사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부족한 저를 이곳에 불러 세우신 한목협 회장님 모든 임원 그리고 한목협 모든 가족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개혁의 몸부림이, 개혁을 위한 기도와 눈물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2017년 바로 내년에 귀한 열매가 맺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에 귀한 목사님들이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여기 모이신 목사님 한 분, 한 분 그렇게 귀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럼에도 이 귀한 자리, 귀한 시간에 그저 낮은 자리에 있는 저를 부르신 이유 단 하나, 분명하다 싶습니다. 루터교 총회장이기에,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해 잘 소개할 수 있다 믿기에, 그래서 한국 루터 교회의 개혁의 방향을 작은 제시나마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져서 불러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제목을 “루터에게 개혁의 길을 묻다”로 정하면서 본문은 로마서 1장 17절, 바로 루터의 종교 개혁의 중심 구절로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의 개혁은 루터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개혁의 정점을 루터가 찍었기에 개혁을 생각하면 루터를 종교 개혁의 중심에 두게 됩니다. 개혁의 선구자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타울러, 위클리프, 그리고 요한 후스(Johann Hus)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Back to the Bible, 교회 밑에 눌려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그 말씀의 권위를 회복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도전에 존 후스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화형으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1415년 7월 6일, 화형을 당하는데, 이런 신비로운 예언을 남깁니다. “그대들은 지금 작은 새를 불사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 년이 지나면, 큰 황새가 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아무도 그를 처형할 수 없을 것입니다.”(지원용, 말틴 루터 서울 컨콜디아출판사 1994 p.17)

그로부터 꼭 102년 후, 1517년 10월 31일, 윗텐베르크 성당 문에 한 문서를 못질하는 청년 수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 – 1546년 2월 18일)이었습니다. 면죄부가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옳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 90개의 반박문인 것입니다. 이 날을 종교개혁의 첫 날로 기억하기 시작하였고, 이 날이 개신교(Protestant-프로테스탄트)의 탄생일로 기억하고 있고, 우리는 바로 내년 20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여기에 모여서 하나님께 함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을 주제로. 그리고 같이 기도하는 제목은 오직 하나, 내가, 교회가, 나라가 새롭게 개혁되게 하옵소서.

이런 의미에서 오늘 한목협의 한 마음이 되어, 한국교회의 개혁의 길을 루터에게 다시 묻는 귀한 시간을 마련한 것은 시기가 매우 적절하다 믿습니다. 하여 오늘 설교 말씀은 전통적인 설교가 아닌 강연식 설교라고 할까요. 루터의 생애를 살피는 중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주시는 개혁의 메시지가 있기를 바라면서 이 시간을 함께 고민해 보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시간이 2017년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 개혁의 출발이요 진원지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루터를 살피려 할 때,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중세 암흑기의 빛으로 하나님께서 준비시킨 그 한 사람 루터
2. 하나님의 간섭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길을 결심하는 청년 루터
3.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에 대해 깊이 영적으로 고뇌(Anfectung)하는 수도사 루터
4. 오직 말씀(Sola Scriptura)”이 최고 권위임을 고집하는 교수 루터
5.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 Ich stehe hier” 개혁자 루터
6.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한 목회자 루터
7. 주님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는 생의 마지막 루터

 

 

1. 중세 암흑기의 빛으로 하나님께서 준비시킨 그 한 사람 루터

흔히 중세를 암흑기라 말합니다. 진리가 어두워지고 교회가 심각하게 타락한 시대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이성의 힘이 크게 발현합니다. 이 시대를 우리는 이를 르네상스라 부르지요. 동시에 농업에서 산업이 상업과 광업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개인의 부가 축적되면서 개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 시대의 교회의 타락도 이 암흑기의 큰 특징이지요. 특별히 교황의 권위는 점차적으로 부식되어 갑니다. 교황청의 세속화는 무섭게 가속화 되고, 그 타락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성직을 매매하고, 족벌정치, 여기에 교회 내에 성적 타락은 말하기가 창피할 정도이었습니다. 당시 1447년에서 1517년 사이의 교황들 중에는 상당 수의 첩을 두고, 내연의 아내를 두고, 많은 수의 사생아를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성직자들의 영적, 지적인 무지, 도덕은 정말 땅에 떨어져 버린 깜깜한 시대이었습니다. 점차 교황이나 성직자들은 영적인 문제보다 세속적인 문제(특별히 돈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특별히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이 필요를 채우기 위해 탄생한 것이 면죄부(indulgence)입니다.

면죄부는 Satisfactio(하나님의 노여움을 만족시키는 행위)를 위해 필요한 제도로 발전합니다. 특별히 가톨릭은 연옥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냅니다. 죽은 자들이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일단 연옥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연옥에 있는 조상들이 천당으로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성자(Saints)의 잉여 공적이 필요하게 됩니다. 성자들은 공적이 차고 넘쳐서 남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충분한 공적, 이를 잉여 공적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때 성자들의 잉여 공적을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면죄부(indulgence)라는 것이지요. 특별히 그 잉여 공적 중에서 최고는 잉여 공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이기에, 마리아를 숭배하는 신학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래서 마리아를 예수님처럼 중보자로 신격화하는 것을 가르쳐 marialogy라고 하지요.

중세 말기의 긍정적 특징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학문의 부흥을 들 수 있습니다. 파리 대학이나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스콜라 철학-학교의 신학-이 탄생하게 되고, 많은 대학이 생겨나게 됩니다.

스콜라 신학의 특징을 보면
1.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가장 중요한 도구
2. 변증법(Dialekik)을 통해 교부들의 모순된 문장들의 조화를 꾀하고
3. 이성과 신앙(계시)의 조화를 꾀한다.
4. 그리스도 없이 이성의 합리적인 필연성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증명하려 하였고
5. 하나님의 존재를 이성으로 증명하려고 하였고
6. 십자가로 대표되는 고난의 신학, 십자가 신학보다 영광의 신학을 강조하였다.
7. 목양보다는 교육에 더 관심이 고조되었고
8. 결과적으로 스콜라 신학은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당시 스콜라 신학은 실재론(Realism)과 유명론(nominalism)의 논쟁을 거치게 되고 이 유명론은 루터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과는 사과다. 이성은 그렇게 말한다.” 실재론입니다. “사과는 이름뿐이다. 그 사과는 개인 경험에 의해 존재한다.” 이것이 유명론입니다. 즉 스콜라 신학에서는 이성으로 하나님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고 하고, 유명론에서는 하나님은, 또는 하나님의 계시는 이성으로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고 합니다. 후에 유명론에 영향을 받은 루터에게는 후에 오직 믿음만(Sola Fide)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렇게 어두운 시대를 밝힐 빛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루터였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를 축복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어려운 시기, 개혁의 시기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개혁의 도구로 쓰임받는 그 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의 간섭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길을 결심하는 청년 루터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에서 한스와 마가렛 루터 사이에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업자로 최소한 가난하지는 않았습니다. 루터의 부모는 자녀 교육에 엄격하였다고 합니다만, 이 당시 부모들은 다 엄격하였다고 하는 것이 보편 현상이기도 합니다. 아이스레벤에서 만스펠드로 옮겨가서 초등 교육을 받습니다. 문법(물론 라틴어), 수사학, 논리학을 배웠고, 그리고 이 때 음악을 배웠는데 남달랐다고 합니다. 루터가 작사, 작곡에도 조예가 있었음은 이 때 쌓은 음악적 재능이고, 이는 후에 “내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사, 작곡했다는 것은 유명합니다.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지요. 아이제나흐에 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코회의 참회 설교자, 요한 힐텐입니다. 그는 루터의 뇌리에 강하게 남는 설교를 합니다. “로마 교회는 큰 음녀요 이 행위는 종말을 맞을 것이요, 1516년 경 수도사 한 사람이 나타나 교회를 개혁할 것입니다.”

이 묵시적 설교가 루터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루터의 문헌에 보면 여러 번 언급합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때가 점점 가까이 옵니다. 1501년 18살 나이에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합니다. 당시 유명한 대학이었고 특별히 교회론(보편적 교회는 없고 단지 개별 교회만 존재, 여기서 루터는 invisible church – una sanctorum- 그리고 visible church를 구별해 낸다. 그리고 구원론도 보편 구원론을 인정하기 않고, 구원은 하나님과 한 영혼의 일대 일 관계임.)을 이 때 배웠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대학교에서 루터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루터의 삶 속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1505년 7월 2일, 고향을 방문하고 나서 다시 에르푸르트로 돌아 오는 도중에 정말 무서운 여름 뇌우를 만납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함께 한 친구가 이 뇌우로 죽었다는 말도 전해집니다. 이 장소의 이름이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입니다. 이 때 루터는 공포에 떨며 한마디를 하게 됩니다. “성 안나여 나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이를 루터 학자들은 바울의 다메섹 체험과 비교하면서 “슈토테른하임의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강권하여 간섭하신 사건이 아니라 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 우리 목사님들 중에서 우리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회심의 경험, 돌아섬의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루터가 체험한 슈토테른하임의 경험과 같은 경험 말입니다. 15일 뒤 7월 17일에 루터는 곧바로 성 어거스틴 수도원에 수도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평생 멘토이며 스승이신 Johnnes von Staupitz 원장을 만나게 되고, 들어간 곳이 어거스틴의 신학의 맥을 이으며, 반 펠라기안적 신학의 수도원이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섬세하고 신비로운 인도하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에 대해 깊이 영적으로 고뇌(Anfectung)하는 수도사 루터

수도원에서 수도사의 일과는 엄격하였습니다. 루터는 가장 열심이 있는 수도사였고, 이 수도원 생활을 그는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 한 가지 부족을 고백합니다. “엄격한 규칙을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수도원 생활 속에서 결여”를 꼽고 있습니다. 1507년 4월 3일 사제로 서품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수도사 시절부터 루터는 영적 고뇌(Anfectung)를 지독하게 앓게 됩니다. 특별히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렇게 루터를 공포로 몰아 넣었습니다. 결국 루터가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의 사건이었음을 깨닫는 바로 이 중요한, 그리고 처절한 질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서운 의의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내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것인가? 죄가 자신을 더럽힌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루터는 자신의 등을 채찍으로 치곤 하여 실신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고 그의 스승 스타우피츠는 전해 주고 있습니다. 스타우피츠는 멀리 계신 하나님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말로 가르침을 줍니다. 그 충고가 루터로 하여금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고 연구하였고, 후에 루터의 유명한 십자가 신학을 우리에게 전해주게 됩니다.

수도원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성경을 본 적도 없는 루터는 이후 무섭게 성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회고하기는 그 때 일년에 2회 이상 성경을 읽었고, 많은 수도사 중에서 자신이 성경을 읽는 유일한 수도사였다고 회고합니다. 그러면서 루터는 후에 자신의 종교 개혁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Sola Scriptura, 종교 개혁의 두 번째 원리를 강조하게 됩니다. 루터는 특별히 시편을 사랑하여 시편을 다 외우고 있었습니다. 교수로서 루터의 첫 번째 강의도 시편 강의였습니다.

스타우피츠는 영적 고뇌로 너무 지쳐가는 의 싸움에 지쳐가는 루터에게 로마를 다녀오도록 권면합니다. 그래서 1510년 11월경에 방문하여 로마의 라테란 성당에 있는 빌라도 계단 28계단을 맨 무릎으로 오르게 됩니다. 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루터는 회의적으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내가 무릎으로 이 계단을 오른다고 할아버지 영혼이 구원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전해오는 이야기는 바로 이 순간, 이 계단을 오르는 순간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큰 깨달음이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몇몇 학자들은 “탑의 체험”(Tower Experience)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탑의 체험보다는 오히려 루터의 지독하리만큼 깊은 성경 연구 결과로 이신칭의의 신학(Justification by gracethrough faith)을,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 말씀이, 이 이신칭의가 루터의 대표적인 신학이 되며, 오늘날 개신교회의 중심 신학이 되게 됩니다.

 

4. “오직 말씀(Sola Scriptura)”이 최고 권위임을 고집하는 교수 루터

루터는 1512년에 29세 나이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가 40년 이상 남은 생애를 살게 되며, 결국 그 도시가 종교 개혁의 중심지가 되는 비텐베르그 대학의 성경 교수로 옮겨 가게 됩니다. 여기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연속적으로 강의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es)의 토대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95개조 논제를 작성하여 당시 로마 교회의 타락의 상징인 면죄부와 동시에 영광의 신학(thologia gloriae)을 비판하게 됩니다.

비테베르그 대학에서 시편을 첫 강의로 시작했을때, 루터는 시편 31편 1절 “주의 공의(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를 읽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 루터가 배우고 알고 있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의(righteousness of judgement)만 알고 있었는데, 과연 심판의 의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루터는 하나님에게는 심판의 의가 아닌, 다른 의가 있음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결국 루터는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시는 사랑으로 성취하신 사랑의 의(righteousness of love)가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의는 죄인인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의가 아니라, 십자가에서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절대 은총의 사건으로서 의임을 루터는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칭의 신학은 로마서를 강의하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 안에 내재하는 의(per domesticam)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밖에서 오는 의(per extraneam iustitiam)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함을 자신있게 믿고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의는 우리 바깥에서 낯설게 성취하신 의(externa et aliena iustitia)라 말합니다. 이 의는 오직 믿음(ex fide)으로 우리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율법 행위(opera legis)를 헐고, 신앙의 행위(opera fidei)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신앙 행위는 자유롭게 만드시는 영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ex spiritu libertatis amore solo Dei) 행해지는 행위”입니다.

성도들은 내적으로 항상 죄인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유명한 루터의 명제 ‘simul iustus et peccator’(항상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의는 십자가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이고, 이는 하나님의 전가(Sola Dei reputatione)를 통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생각할 때, 인간은 병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병든 것을 낫기 위해 인간이 무엇를 해보려고 할 것입니다. 또 공적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구원에 관해서는 인간은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고로 죽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이 자기 구원(생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밖에서 살려 주신 의를 통해서 인간은 그의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게 하신 이는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은혜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강의를 통해서 이신칭의의 신학을 더욱 분명하게 발전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간을 죽이신 후에 살리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고유한 일(opus proprium)이 있습니다. 이 고유한 일이란 인간의 구원입니다. 자기 백성의 살리심입니다. 그런데 그 고유한 일을 낯선 일(opus alienum)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 낯선 일이란 하나님 자신의 자기 결단인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대속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이시고, 우리의 구원에 충분한 의를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낯선 일입니다. 그리고 그 낯선 의를 믿음이라는 통로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의롭다 부르시는 칭의를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며 동시에 칭의의 신학인 것입니다.

2016년 6월 21일(화) 나사렛대학교에서 열린 한목협 제18회 전국수련회에서 한목협의 밤 시간에 김철환 목사(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장)가 설교를 전하고 있다.

 

5.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 Ich stehe hier” 개혁자 루터

1517년 10월 31일에 면죄부의 부당성을 알리는 95개조 논제를 개혁의 상징적 시작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개혁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1517년 9월 4일에 스콜라신학 반박문을 통하여 루터는 스콜라 신학과 결별하게 됩니다. 이는 이성에서 믿음으로 대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518년 4월 하이델베르그 토론이 있게 됩니다. 여기서 루터는 자신은 바울과 어거스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 때 28개 신앙 항목을 기술하여 제출하며, 자신의 신학을 ‘역설의 신학’(theologia paradoxa). 쉽게 예를 들자면 죄에 대해 완전히 죽으면, 하나님의 의로 완전히 산다. 이런 것이 루터의 역설입니다. 이 하이델베르그 회의에서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개념을 소개합니다. “교회는 율법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율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공적을 쌓는 수단으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성경에서 율법과 복음을 잘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참 신학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죄 인식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인식하는 자리는 오로지 십자가임을 루터는 강조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만 참된 신학과 하나님 인식이 있습니다. 또한 하이델베르그 회의에서 율법의 행위와 신앙의 행위를 구별하게 됩니다. 율법 행위는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지만, 신앙 행위는 늘 이웃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늘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사랑을 그리면 하나님을 그릴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특별히 하이델베르그에 제출한 28항의 마지막은 “죄인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가 아니다.” 즉 죄인인 인간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수도사 시절에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의이신 하나님을 루터는 미워하였다고까지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발견한 하나님의 의는 밖에서 이루신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하시려는 다른 의를 발견한 것입니다. 루터는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여기서 나는 내가 완전히 새로 거듭나서 열린문을 통하여 내가 낙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이 깨달음이 바로 개신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 뿌리가 된 것입니다. 바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의에 대한 믿음입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교수로 있었던 비텐베르그 대학 안에서도 계속 진행되었는데, 스콜라주의의 영광의 신학에서 십자가 중심의 십자가 신학으로, 율법의 공적에서 복음의 은혜로, 신학 중심의 교리에서 목양 중심의 신학으로, 교회의 권위에서 성경의 권위로 큰 개혁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성경은 자기 자신의 해석자”(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신학을 또 발견합니다.

즉 성경은 반박될 수 없는 신적인 권위를 가집니다. 이를 인정하면 참 신학자라 루터는 강조합니다. 그리고 루터가 십자가 신학을 강조하는 것과 신앙의 고뇌(Anfectung)와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신 후에도 왜 하나님은 어려움을 주시는 가에 대한 대답은 그의 유명한 명제에 담겨져 있습니다. Oratio, meditatio, tentatio faciunt thologum : 기도와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영적 시련이 신학자(참 신앙인)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tentatio’와 ‘anfectung’과 같은 의미로서 십자가만이 모든 허위의식과 거짓을 드러내기(Crux ipsa omnes ostendit mendaces) 때문에, 그러므로 신앙 고뇌는 괴로움이 아니라 루터에게는 선물이 것입니다. 그 어려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루터 자신이 이신칭의의 신학을 확신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교회 개혁의 어려운 길로 루터를 인도하시기 시작합니다. 그 첫 길이 95개조 논제입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1507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발행합니다. 1513년 레오 10세가 재발행하고, 브랜덴버그(Albrecht of Brandenburg)는 마인쯔 대교구를 얻기 위해 교황에게 뇌물을 바칩니다. 그리고 그 금액은 면죄부 판매 대금에서 채우기로 하고, 판매책임자로 Johann Tetzel를 세웁니다.

이를 보면서 라틴어로 면죄부의 부당성을 95개의 논제로 밝힌 것입니다. 이 95개조 논제는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의 발명에 힘입어 발전되고 있는 인쇄술로 인해, 몇 주 안 걸쳐서 독일어로 번역되어 전 지역으로 보급되게 됩니다. 이 95개조 논제에서 중요한 조항은 1항과 62조항입니다.

이 일로 인해 1518년 10월에는 아우그스불구에서 카예탄에게 심문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루터는 압도적 신학의 깊이로 카예탄을 압도합니다. 이어서 1519년 7월에는 라이프치히 토론이 열립니다. 이 때 로마 교회의 상대는 엑크(Eck)입니다. 루터 쪽에서는 먼저 칼 슈타트가 나섭니다. 결국은 루터와 엑크의 논쟁으로 점화되고, 이 토론에서는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유일한 권위요, 규범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자 교황의 교서(Exsurge domine)가 1520년 6월 15일 발표됩니다 그러면서 교황의 사절단이 루터의 저작물들을 불태우자, 루터도 12월 10일 교서와 법전을 불태워 버리는데, 이 때 비텐베르그에는 400여 명의 교수와 학생이 운집했고, 오후에는 수천 명의 루터 지지자들이 환호하였다고 합니다.

1520년이 귀한 것은 이 때 종교 개혁 3대 논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주옥 같은 작품이 쓰여지게 됩니다.

(1) 독일귀족에게 보내는 글. 교황의 세속 권력에 대한 우위성(만인사제직); 성서해석에 대한 교황의 권한; 교회회의는 교황만 소집할 수 있다는 것 부정.
(2) 바벨론 포로(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가톨릭의 7 성례전을 부정하고 두 개의 성례전 즉 성만찬과 세례로 국한합니다. 성례전에서 중요한 것은 표지(sign)가 아니라 죄사함의 약속의 말씀. 여기서 ex opera operato(성찬 그 자체로 공적이 되는) 것의 거부하게 되면서, 가톨릭의 화체설 거부하고 희생제사로서의 미사 개념 거부.
(3) 크리스찬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
“A Christian is a perfectly free lord of all(칭의-속사람-그리스도 안에서), subject to none; a Christian is a perfectly dutiful servant of all, subject to all(신앙행위-겉사람-사람 안에서).”

이 세 작품을 통해서 루터의 신학은 실제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모든 학자들은 인정합니다. 이 도전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로마 가톨릭 교황청은 결국 1521년 1월 보름스 의회(Worms Reichstag)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합니다. 루터는 1521년 4월 16일에 보름스에 도착하게 되고, 4월 17일에 제 1차 심문을 받습니다. 두 가지 질문이 엑크의 입에서 나옵니다. 이미 진열해 논 루터의 작품들을 지적하면서, “네가 썼느냐?” 루터는 대답합니다. “예, 제가 썼습니다.” 둘째 질문은 “철회하라(recantation)”였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오히려 대답하기 위해서 하루라는 시간을 얻게 됩니다. 그날밤 루터는 죽음에 이르는 두려움에 사로 잡힙니다. 그 밤에 처절하게 기도합니다. 얼마나 기도를 크게 하였는지 옆에 있는 사람이 받아 적을 정도였다 합니다. 그래서 전해지는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주여,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오소서! 나는 준비되었나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처럼 묵묵히 견디며 당신의 진리를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나이다. 그것은 당신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결코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겠나이다. 비록 온 세계가 마귀로 들끓고 있다고 하여도, 나의 육체가 죽임을 당하거나 무덤에 던져지거나 갈갈이 찢겨지거나 재가 되어 사라진다고 하여도 나는 당신의 손이 행하시는 일을 따를 것입니다. … 나의 영혼은 당신의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도움이 되어 주소서. 나는 나의 주장 그 어느 것 하나도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의 보증을 갖고 있습니다. 내 영혼은 당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나의 영혼은 영원히 당신께 피할 것입니다. 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J. H. Merle,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vol Ⅰ-Ⅴ,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Ⅱ,Ⅱ, 243a)

그리고 그 다음 날 4월 18일에 제 2차 심문을 받으며, 최후 진술에서 그 전날 밤의 기도대로 자신의 기도를 옮깁니다.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확실하지도 순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달리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Hierstehe ich, ich kan nicht anderst. Got helffe mir. Amen - I cannot do otherwise. Here I stand. God help me, Amen”)

이 보름스 의회가 사실 실제적인 개신교 탄생이라 볼 수 있습니다. 루터에게 또 한 사람의 은인은 프레드릭 선제후입니다. 그는 중간에 루터를 죽이기로 결단한 암살단 소식을 듣고 돌아 오는 길에서 급히 납치하여, 루터를 바트부르그 성으로 옮기며 감추어 두게 됩니다.

Wartburg 성에 있는 10개월을 이용하여 루터는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이는 1522년 9월 출판됩니다. 참고로 구약 성경은 1534년에 번역 완성 출간하였고, 이 루터 성경은 지금도 그 번역이 훌륭하여 독일 백성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루터 시대의 슬픈 사건은 농민 전쟁입니다. 만인 사제론에 용기를 얻은 뮌쩌(Thomas Muntzer)는 성경의 문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이 허락하시는 직접 계시를 말하면서, 결국 천년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 해방 운동을 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며 농민 전쟁을 일으킵니다.(1525년) 이에 대해 루터는 “하늘의 예언자에 대하여”라는 책을 써서 폭력에 대한 부당성과 동시에 귀족도 농민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시의회가 루터의 귀환을 요청합니다. 1525년에 3월 6일 귀환하여 8일 동안 8개의 설교를 하게 되는데 그것으로 농민 전쟁의 상황은 종료됩니다. 여기서 루터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설교가인 줄을 알게 됩니다. 이 때 루터는 그의 두 왕국 이론을 소개합니다.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 즉 Civitas Dei와 Civitas mundi(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를 발전시켜서 regnum mundi 와 regnum Christi, 인간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하는 두 왕국 이론을 소개합니다.

루터의 생애와 그의 신학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현상 하나가 발견됩니다. 어떠한 사건이나 논쟁이 있게 되면, 그들과 결별하면서 신학이 하나 둘씩 완성이 되어집니다. 에라스무스(Erasmus – adfontes 본래로 돌아가라)와 처음에는 같이 했으나 루터의 개혁이 너무 과격하다는 점과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구원에 관하여 무능력하다는 죄의 노예 상태에 있기 때문에 본인이 주장하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기에 결별을 하게 됩니다.

루터는 노예 의지를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두 속성을 소개합니다. 즉 숨기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hidden God)과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latus –revealed God)의 두 속성이 있는데, 숨기시는 하나님의 속성은 노예 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은 알 수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아십니다.

이 두 속성을 루터는 구원에 대해서도 적용합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조차도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루터도 이성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이해하나 에라스무스와는 달리, 인간 이성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는 무용지물이라고 하면서 에라스무스와 그를 따르는 인문주의자들을 잃게 됩니다.

또한 쯔빙글리와도 성만찬 토의를 통해서 결별하게 됩니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을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의 행위로 이해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과거의 회상이요 단지 기념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루터는 천주교회의 화체설을 받아 들이지 않지만, 성경에 있는 약속을 붙듭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이 행하여 질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 연합이 일어나기에, 믿음으로 받는 한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게 되는 것이라고 임재설 또는 실재설 또는 편재설(Ubiguity of Christ)로 루터는 성만찬을 이해합니다. 쯔빙글리와 루터의 결별을 아쉽게 여긴 사람들이 마르부르그에서 1529년 10월 1일 재회의 모임을 가졌으나 성만찬의 신학적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2016년 6월 21일(화) 나사렛대학교에서 열린 한목협 제18회 전국수련회에서 한목협의 밤 시간에 김철환 목사(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장)가 설교를 전하고 있다.

 

6.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한 목회자 루터

루터는 결혼을 합니다. 단순한 결혼이 아니라 개신교 성직자에게 결혼의 길을 연 것이기도 합니다. 1525년은 루터에게 정말 힘든 일이 많았지만, 동시에 16살 아래인 카타리나 폰 보라–루터는 케티라고 애칭으로 부름-와 결혼을 합니다. 카타리나는 영적으로도 루터 만큼이나 깊었습니다. 하루는 루터가 개혁의 힘듬으로 절망하여 집에 가니 카타리나가 소복을 입고 장례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죽었냐고 물으니 하나님이 죽었다고, 충격적인 말을 토해냅니다. 이어서 하는 말이 “당신이 풀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분명 하나님은 죽으신 하나님이 분명하다”고 루터에게 충격을 주며, 루터를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이후 루터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living God)이라고 의도적으로 많은 문헌에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삼남 삼녀를 두었는데 딸 둘은 일찍 죽었고, 대부분 음악을 사랑하면서 음악 가정으로 루터는 인생 후반부에 비교적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삽니다. 루터의 집에는 늘 학생들이 들끓었는데 하숙집 같았다고 합니다. 그 때 식탁에서 루터가 던진 화두를 학생들이 받아 적어서 오늘까지 전해 오는 것이 탁상 담화(Table Talks)입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신학적 개혁이 끝나가자 목사로서 루터는 교회 돌봄에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그 때 루터는 성직자의 영적, 지적인 무지에 애통해 하면서 저술한 것이 소교리 문답서(Small Cathechism)입니다. 이후에 소교리 문답서의 해설서로 대교리 문답서(Large Cathechism)를 쓰게 됩니다. 이어 고백적 신앙을 담은 고백서가 나왔으니 그 유명한 아우그스불그 신앙고백서(Augusburg Confession)입니다. 이어 루터는 1531년 7월 1일부터 시작해서 12월 12일에 갈라디아 강해서를 끝내게 됩니다. 이 갈라디아서 주석은 루터의 신학을 정리하고 집대성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루터는 강해서 서문에 “갈라디아서는 내가 약혼한 작은 서신이다. 나의 카타리나 폰 보라이다”라고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인간 자신이 율법 행위로 구원하려는 시도의 허구성을 공격하면서,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낯선 도움(sine alieno auxilio Christi)를 통해서 구원에 이름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 나아가서 율법의 행위는 능동의 행위이요, 이는 인간으로부터 나오기에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의나 행위는 수동의 의로써 하나님의 절대 은총으로 베풀어 주신 죄의 용서와 사랑의 의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의는 인간인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여받는 것입니다. 이런 영원한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이런 의를 우리는 오직 선물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전가를 통해(per gratuitam imputationem) 그리고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를 통해(per inenarrabile donum Dei)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루터는 율법의 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는 기능상 자기의 한계 안에서 죄를 인식시켜 주고 진노를 일으키는 데만 사용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루터는 율법 폐기론자들, 예를 들어 아그리콜라 같이 이들과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습니다.

그가 마지막 남긴 강해서는 창세기인데, 여기서 칭의(의인)의 이해를 다시 명료하게 제시합니다.

1.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원리이다.
2.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의 원리이다.
3.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로워 진다는 원리이다
4. 오직 전가하심으로 의로워진다는 원리이다.
5.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통하여 의로워진다는 원리를 분명히 합니다.
7. 주님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는 생의 마지막 루터

루터는 공교롭게도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나서 아이스레벤에서 죽게 됩니다. 그의 병명은 오래 아파온 신장병으로 죽었다는 설과, 아이스레벤에서 교회간에 일어난 논쟁을 중재하기 위해 오다가 한겨울 차디찬 냇물에 마차가 빠지므로 감기를 얻고 페렴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때 그렇게 아픈데도 루터는 1시간이 넘는 분량의 설교를 합니다. 그 설교가 루터의 마지막 설교가 되는데 역시 명설교를 남기게 됩니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새벽 세시경에 죽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 설교는 죽기 3일 전 2월 15일입니다. 그러니까 죽기 삼일 전까지 설교를 했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로 부름 받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믿습니다. 그의 마지막설교에서 이미 죽음을 암시한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을 배척하십니다.

이 뜻은 우리가 배우지 말아야 하거나 똑똑한 척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지식에 눈을 감고 오직 말씀만을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라는 뜻입니다. 오, 주님! 주님은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 복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늘 깊이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심히 약합니다. 그러니 복음이 일하도록 하십시다.”

그렇게 운명하는데 요한네스라는 친구가 루터의 품속에서 한 쪽지를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우리는 거지들입니다. 그 말은 참입니다.”(Wir sind Bettler. Das ist wahr) 루터는 하나님의 은총을 언급할 때, 자주 ‘거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하여 루터의 신학은 거지 신학이라고 표현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강연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냥 강연식 설교라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혁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학의 개혁, 바른 신학으로의 무장은 참으로 중요한 개혁이라 믿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오직 그리스도! 로 한국교회의 개혁을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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