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은혜와 삶의 행복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

내 속에 내(가시)가 너무 많아 우리가 잘 아는 하덕규의 ‘가시나무’란 노래는 그렇게 시작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 마사이 주거 지역인 나록 우물 개발 사역을 위해 가는 도중 광야에서 본 가시나무.(사진·박정식 목사)
과거 오랜 목회 현장에서 가장 힘든 일이 사람을 세우는 일이었고 그 핵심에는 늘 변화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고통과 그 변화를 위한 진통이 수반되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 속에 가시가 너무 많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날카롭고 뾰족한 가시는 늘 누군가를 향해 찌르려 했다. 보이지 않는 가시지만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그 가시는 그 인생의 오래된 아주 깊고 깊은 내면의 상처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아니 어찌할 수 없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하나 된 상처였다.

쏟아내는 말, 표정, 태도, 관점, 눈빛 등 모든 것이 상처였다. 심지어 다른 지체가 사랑과 관심을 베푸는 것조차 상처로 해석하고 거부하며 경계했다. 목사지만 그런 사람에게 다가가며 그 영혼을 껴안는 그 두려움과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그걸 풀어내는 유일한 시간과 공간은 새벽기도 시간에 강단 내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때론 짐승처럼 신음하며 토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너무 잘 알았지만 목사로서 느끼는 절망감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게다가 그 한 사람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관계하는 모든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를 깨뜨리는 공동체의 쓴 뿌리였다. 한 사람이 뿜어내는 독소는 많은 괴로움을 주었고, 공동체의 평화를 무너뜨리기 일쑤였다.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의 구원이 의심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선교지에 나와 보니 마찬가지다. 아니 선교지에서 보는 가시는 더욱 날카롭고 파괴적이었다. 선교지라는 어찌 보면 척박한 영적 환경 때문인가? 대다수의 선교사들이 메말랐고 황폐하며 날카롭고 독해져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타문화권의 생활과 그 환경에서의 사역은 늘 엄청난 스트레스와 긴장, 압박을 주니까. 더욱 멤버 케어(member care)가 거의 없는 한국 선교계의 현실을 감안하면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성경은 광야학교에서의 놀라운 은혜를 말한다는 점이다. 광야가 얼마나 척박하고 메마르며 황폐하고 살기 어려운 곳인가? 그러나 광야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놀랍게 다루시며 깎으시고 새롭게 빚어 가시는 은혜의 현장이다. 광야가 무엇인지를 알고 직접 체험한 것은 순전히 선교지 방문을 통해서이다. 우리나라 국토에는 광야가 존재하지 않는다. 파키스탄과 탄자니아, 특히 케냐에서 광활한 광야를 목격할 수 있었다. 광야는 단절, 침묵, 척박 등의 이미지로 지칭되는 곳이다. 광야에 무엇이 있을까? 퍼붓는 불볕, 건조한 열기, 거친 모래, 키 작은 가시나무 관목 말고는 없다. 아무리 눈을 들어 여기 저기 살펴봐도 광야에는 특별한 게 없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이 나오지만 광야를 직접 목격하기 전에는 그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교지에서 광야를 수차례 방문하고 목격하며 체험하면서 광야의 이미지는 실체로 다가왔다. 광야에선 기존의 모든 것들과 단절해야 한다. 대화하며 소통할 상대는 모래와 불볕, 키 작은 가시나무 관목밖에는 없다. 결국 광야는 침묵의 학교가 된다. 얼마나 척박한지. 하나님이 왜 이런 광야를 만드셨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더구나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물조차 구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낮에 퍼붓는 불볕과 달궈진 뜨거운 대기가 상승하면서 복사열을 만들어 내고 이 때문 밤에 그 자리를 메꾸며 몰려드는 차가운 대기에 의해 내려가는 기온의 일교차는 생존을 2중으로 위협한다.

▲ 케냐 서북부 오지인 투르카나 광야에서.(사진·박정식 목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에서 물을 주신 것과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며, 낮엔 구름기둥과 밤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동행하시는 것은 광야와 사막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이며 가장 완전한 은혜였다. 도대체 광야는 왜 존재할까? 그런데 광야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특별한 은혜가 있다. 4년 전 오지인 케냐 중북부 코아(Korr) 사막을 방문해서 3박 4일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하늘과 구름, 태양과 모래, 가시나무 관목, 열기, 태풍 같은 밤바람 밖에 없는 그곳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가장 깊고 깊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 세상의 모든 것과 단절될 수밖에 없는 삶의 자리, 내가 가진 모든 것과 삶을 내려놓고 오직 나 자신의 존재만 느껴지는 곳, 침묵을 통해 광야가 들려주는 하나님의 임재에 집중하게 되는 곳에서 나는 내 평생 체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를 놀랍도록 체험했다. 얼마나 강렬하고 황홀하며 감격스러웠던지 광야는 초월적인 신비와 은혜의 현장이 되었다.

거침과 메마름, 척박함의 현장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 임재의 깊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그 경험을 통해 마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생수처럼 마르지 않는 영혼의 시은소(施恩所)에 들어갔었다. 그래서 광야는 일상에서 체험하지 못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는 신비한 곳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고, 오직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달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광야의 단절과 침묵은 가장 부요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초월적인 세계를 향한 기초가 된다.

그뿐인가! 광야에서 느끼는 감사와 행복함은 광야와 정반대로 얼마나 풍요한지. 광활한 광야에서 잠시 작은 그늘을 찾아 마셨던 차 한 잔, 커피 한 잔은 지구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와 커피였다. 그 막막하고 척박하며 광활한 광야에서 차 한 잔, 커피 한 잔에 담겨진 행복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도 광야는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 그러나 광야는 진정한 은혜와 삶의 행복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다. 광야에서 목격하고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 경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투르카나 광야.(사진·박정식 목사)

다만 "광야에 있다."고 '광야학교의 은혜를 저절로 누릴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일종의 광야이며 광야학교에 입학한 타문화권의 선교사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내 안에 있는 그 숱한 가시를 주님의 은혜로 부드러운 그 무엇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그 생명과 사랑이 흘러넘치도록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간구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여기 저기 그 속에 가시만 무성한 선교사들의 현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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