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평 장로 이야기(4)

매일 정오가 되면 예배당의 종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그러면 밭에서 쟁기를 끌던 소가 멈추어 섰다. 쟁기를 잡은 주인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 때문이었다. 지나간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이다. 애양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양재평 장로님의 간증이었다.

짐승에게 쉬는 날이 있을까마는 애양원 동네 소들은 주일이면 주인과 함께 편히 쉬었다. 마구간에 편히 누워 방울눈 껌뻑이며 여물을 씹었을 것이다. 짐승들도 예배당이나 집에서 들려오는 찬송가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십계명을 주셔서 우리까지도 이렇게 편히 쉬는 것 아닙니까?” 하고.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를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셨다. 성도들은 있는 곳 어디서나 두 손 모아 기도했다. 하나님 나라 흰옷 입은 거룩한 백성, 택한 백성의 신앙생활이었다.

성경암송반을 방문한 우리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던 양 장로님이 정오 종소리를 듣고는 ‘우리 기도합시다.’ 하고 대표로 기도했다. 나라를 위해, 남북통일과 세계선교를 위해 그리고 오늘을 위한 기도였다. 날마다 기도하는 내용인 것 같다. 모두들 집에서, 병실에서, 밭에서 일하다가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청년 양재평이 애양원에 입원했던 1942년.

일제 강점기로 시국이 어려운 때라서 한센인들도 기도가 절박했을 것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손양원 목사님이 투옥되고 가족도 흩어졌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님의 가르침대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애양원을 나와서 걸식하는 분들도 많았다. 날마다 예배드리고, 날마다 기도하는 애양원을 ‘기도의 성지’라 부르는 사연이다.

그들의 정오기도는 손양원 목사님 지도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때 정오기도를 시작했다. 장대현교회에서 연합사경회를 주관하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은혜를 사모하며 정오기도회를 모였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 회개와 통회의 역사가 일어났다. 성령충만한 분위기가뜨거웠다. 그 소문이 전국에 퍼지면서 새벽기도회와 정오기도가 널리 번졌다.

양재평 장로는 중도에 실명한 시각장애에도 불구하고 수요일이면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이 함께하는 수요예배를 인도했다. 성경과 찬송가를 읽을 수 없지만 그의 심령에서 솟아나는 샘물 같은 말씀과 은혜로운 찬송가(암송하여)는 회중에게 뜨거운 감동이었다. 몸이 불편하자 세상 떠나기 한 해 전에 그 은혜스러운 예배 인도가 중단되었다.

소록도 신성교회는 지금도 정오기도회를 잇고 있다.

필자가 방문할 때면 그 기도회 설교를 자원해서 맡는다. 정오기도팀 인도자인 장인심 권사(81세)가 처음 입원했을 때(1952년)부터 정오기도가 있었고, 지금까지 50년 넘게 기도를 이어온 것이다. 소록도 5개 교회 가운데 신성교회만 예배당에 모이는 정오기도회를 잇고 있다. 할머니들 20여 명이 모인다.

8‧15해방 후에 출옥한 손양원 목사가 소록도교회 부흥회를 인도했고, 담임 목사로 김정복 목사를 소개해주었다. 김정복 목사는 6‧25 때 피난을 가지 않고 바닷가 굴에 숨어 기도하다가 공산군에 붙잡혀 순교했다. 순교자의 신앙, 순교자의 피가 애양원교회와 소록도 교회를 든든하게 세웠던 것이다.

나는 이런 현장, 이런 성도들을 만나고부터 내가 섬겼던 광주동산교회 성도들과 핸드폰 알람을 정오에 맞췄던 때가 있었다. 낮 12시 기도를 실천했던 것이다. 차를 운전하다가 “기도합시다.” 했던 일이 많았다. 일하는 현장에서의 기도는 참 좋은 발상이었다. 기도할 형편이 안되면 마음으로 ‘아멘!’ 한마디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심령의 기도이고 감동이고 은혜였다.

‘순교 신앙으로 기도하자’

소록도 남성교회에 붙어있는 현수막이다. 한국 교회는 주일 성수가 어렵고, 말씀 신앙과 기도가 식어졌다. 선진들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 깨어나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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