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평 장로 이야기(3)

살아서 다시는 못 만날 가족,

가족과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고, 고향에 돌아오는 것도 생각하면 안되었다. 소록도 가는 길. 그래서 한센병을 천형(天刑)이라 했을까?

소년 양재평도 자기 얼굴에 증상이 나타나면서부터는 집안에 들어박혀 지내며 바깥출입을 금했다.

부모와 누이들이 짊어진 멍에 또한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웠을까.

나 한 사람 때문에 가족이 겪어야하는 염려와 희생은 너무 가혹했다. 가족 가운데 나환자가 있으면 그 형제들이 결혼하기도 어려웠다. 잠복한 병이 누구에게 선가 나타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불안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났다. 정처 없는 떠돌이 인생을 살고, 그의 호적은 사망이나 실종으로 처리하기도 했단다. 외국으로 갔는지, 어디서 죽었는지 소식이 끊겼다는 이야기만 남는 것이었다.

양재평 소년도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어머니의 갖은 정성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병은 고칠 수 없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함께 살다가 죽어야한다는 부모의 심정이었지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별보다 더 아픈 슬픔, 잊을 수 없는 병든 자식. 어찌 잠이라도 발 뻗고 잔단 말인가. 그래도 헤어져야 했다.

1942년 12월 25일. 양재평은 소록도 아닌 애양원으로 가게 되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설립해서 운영하는 한센병 환자들의 안식처였다. 병원이 있고 예배당이 있는 그곳은 ‘예수 마을’ 이었다. 새벽마다 기도하러 예배당에 나가고, 주일이면 여러 차례 예배를 드렸다. 낯 선 미국인들이지만 항상 웃는 얼굴은 기적 같았다. 치료 손길은 지극정성이요 따뜻했다. 차별하는 사람도 없었다. 서로 동정하고 의지하는 별천지 공동체였다. 양재평 장로는 그 때 일을 생각하며 “그것이 예수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애양원은 어떤 곳이었는가. 그 역사를 보자. 소록도병원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6년 5월 17일 전남도립 자혜의원으로 개원했다. 전국의 나환자를 격리수용하기 위해 섬 한 부분을 경계로 해서 100명을 입원시켰다. 나중에는 섬 전체를 국립병원으로 확장했다. 인원이 많을 때는 5, 6천명에 이르렀다.

애양원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었다.

‘예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설병원이었다. 그 발단도 매우 감동적이다. 1909년, 목포서 사역하던 포사이트(Forsythe) 선교사가 광주로 오다가 길에 쓰러진 여자 나환자를 발견하여 데려다가 치료해주었다. 다른 환자들과 함께 할 수 없어서 벽돌 굽던 빈 가마에 격리시켰다. 그때부터 나환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1911년 윌슨(Wilson-우월순) 선교사에 의해 효천면 봉선리(광주광역시)에 광주나병원이 개설되었다. 환자가 많아지면서 1927에서 1929년까지 애양원으로 이동했다. 1927년에는 인원이 749명, 1948년에는 1천여 명 대가족이 되었다. 세상은 그들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선교사들을 보내 그들을 안아 주셨다.

고향에 있을 때는 자살 생각도 했지만,

생명이란 것이 쉽게 끊어지지 않더라고 말한다. “여러 번 죽으려 했지요. 그 심정은 겪어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어요. 쥐약이나 양잿물을 먹고 죽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죽지도 못했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그의 간증이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피하게 하여 예수촌으로 보내주신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믿음이 자랐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기도생활을 하던 그는 1978년에 장로가 되었다. 절망 중에 눈물로 만난 예수님이었다.

“사람들은 나병을 천형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든 것이 선하다 했거든요. 이 일로 나를 예수 믿게 하셨습니다. 저는 쉽게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러니까 천혜(天惠)를 받은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천국 소망으로 행복합니다.”

불평 가득했을 삶에도 범사에 감사했던 믿음의 사람,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던 간증이 환한 얼굴과 함께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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