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평 장로 이야기(2)

‘아름다운 이름’ 을 남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좋은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전도서에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라 하였다.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는 말씀이다. 그 ‘아름다운 이름’이 믿음의 자취를 남기는 것이라면 시련과 역경을 통해 연단 받은 믿음이요, 헌신과 충성을 말하는 것 아닐까. 원치 않은 한센병을 앓게 되어, 평생을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생활을 했던 양재평 장로님이 그런 한 분이라 생각한다. 그의 간증은 한국 교회, 그리고 한 때는 한국대학생선교회에 속한 젊은이들에게 들려졌다. 대학생선교회 총재를 지내셨던 김준곤 목사님과 동향이고 또 가까이 지냈던 사이였다.

양재평 장로님(1924-2007.10.15.)을 애양원 성산교회 성경암송반에서 만났었다.

내가 출석했던 광주동명교회에서 간증을 들은 후로 실로 오랜만의 재회였다. 그분 소식을 알아보려했을 때 ‘혹시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애양원에 전화를 했더니 건강하게 활동하고 계셨다.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그 때부터 별세 하기까지 자주 찾아뵙고 말씀을 나누었다.

2007년에 한국 교회는 ‘평양대부흥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집회 관계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울집회에 양 장로님의 ‘영상 메시지’를 띄우려하니 그 일을 주선하라는 것이었다. 말씀을 들은 장로님께서 완곡하게 사양했다. 한센병 후유증으로 중도에 시력를 잃었고, 걷기가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고, 근래에는 중병(장암)을 앓게 되었으니 ‘이러한 내 삶에 자랑할 것이 없디. 부끄럽다.’하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시련을 겪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장로님의 삶 자체가 특별한 메시지라면서 강청했었다.

우리 교회 남전도회원이나 여전도회원들과 동행해서 성경암송반과 친교를 나누고 장로님의 말씀을 들었다. 인생의 황혼을 살며 나누고 싶은 믿음과 지혜의 말씀을 들었고, 손을 맞잡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의 휠체어를 밀고 숙소로 모셔다 드리면서 길에서 나누었던 대화도 참 다정다감했었다.

양재평의 고향은 남도 섬마을 신안군 지도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서울로 유학해서 공부하던 시절, 그는 총명한 소년으로 알려졌고,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몸에 이상한 증상이 있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닭털 같은 것을 몸에 대보기도 하고, 따뜻한 물이 담긴 병을 만지게도 하면서 감각을 확인하더니 진단서에 ‘나병’이라 썼다. 의사는 그의 부모에게 즉시 학교에 알려 학업을 중단 하고, 가족과도 격리해야한다고 말했다. 날벼락이었다. 아버지는 학교에는 가지 않겠으니 나병이라는 사실만은 숨겨줄 수 없느냐고 통사정을 했다. 그리고 치료를 하겠다고 말했다. 거절당했다. 의사는 법에 따라 관계기관에 즉시 신고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재평이의 하늘이 무너졌다. 천지개벽이었다. 학교생활은 중단해야하고, 꿈꾸던 장래는 접어야했다.

귀향. 금의환향이 아니라 산처럼 무거운 근심과 걱정을 짊어졌다.

갑작스러운 귀향에 동네 사람들도 어리둥절했다. 얼굴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의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나섰다. 좋다는 약을 먹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바뀌고 병색이 얼굴에 나타났다. 이웃들이 놀라서 재평이만 아니라 가족까지 멀리했다. 그 시절로는 엄청난 전염병이라 생각했고, 가까이 할 수 없는 재앙덩어리였다. 말은 하지 않지만 당사자와 가족이 고향을 떠나야한다는 것이었다. 끔직한 병, 전염되면 가문이 망하는 병, 나을 수 없는 천형(天刑). 그런 생각들이었다. 그러니 그런 경계심도 당연하지 않았을까. 동네 샘물 길러가는 것도 걱정이었다. 마시는 물이니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재평이네는 부담이고 서러움이고 차별이고 억울함이고 죄송함이었다. 가족은 죄 없는 죄인이 된 것이다.

딸 다섯에 하나뿐인 아들.

삶의 기대가 무너졌다. 그 무엇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살았다 할 것이 없었다.

‘천형의 섬’이라 부르는 소록도로는 보낼 수 없었다. 어미 아비의 심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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