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4) 한목협 제31차 열린대화마당

사랑 안에서 만남이라는 귀한 선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저는 제 가슴을 태우고 있는 한 메시지를 나누며 마음을 같이 하려고 합니다. 그 제목을 “루터의 종교 개혁 500주년이 한국과  한국교회에게 주는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저에게 2월 말과 3월 초에 걸쳐서 뜻 깊은 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CBS 이사 20여 분이 종교개혁지 탐방이라는 이름 아래, 영국 프랑스 독일을 방문하게 됩니다. 영국에서 존 웨슬리를, 프랑스 리용의 깔뱅의 생가에서 깔뱅을, 그리고 독일에서 루터를 배워보려는 취지에서 다녀왔습니다. 특별히 날짜는 3월 1일입니다. 3·1절이죠. 이 나라에 대한 독립 만세 사건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도시는 베를린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앞서서 1990년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이룬 상징적 도시, 베를린에서, 저희 이사들은 호텔에 준비된 예배 장소에서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거기서 제가 설교를 증거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영광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대단한 설교가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사실 저에게 설교를 부탁한 당시 CBS 이사장이신 감리교단의 권오서 목사님에게 극구 사양의 의사를 전했습니다. 저는 능력이 있는 설교가가 아니라고, 말이 참 어눌한 사람이라고, 그래도 이사장님께서는 막무가내이셨습니다. “루터의 나라, 독일에서 루터교 총회장보다 더 뜻 깊게 설교를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권오서 목사님의 뚝심에 기가 질려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권오서 목사님을 통해서 설교를 저에게 강권하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라 믿습니다. 정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화려하고 현란한 설교를 포기하고 뜻을 담는 일에 기도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본문, 그리고 설교 제목은 “나그네, 거지, 머슴”이었습니다.

한국 루터교회의 총회장 임기는 4년이며 중임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총회장으로 8년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목회직을 내려놓고 전임직으로 교단을 섬깁니다. 지금 입고 있는 보라색의 로만 칼라는 우리 교단 목사 중에서 저만 입을 수 있습니다. 원래 외국 루터교회에서는 ‘총회장’ 칭호보다는 ‘주교’라는 칭호로 불립니다. 장로교회가 한국 개신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어서, 저희도 한국 백성에게 낯설지 않은 ‘총회장’이라는 칭호를 쓰면 교회가 더 부흥할까 싶었는데, 크게 부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역할은 감당하고 있다 믿어집니다.

한국 루터교회는 1958년 6·25가 끝난 후에 미국 루터교회에 의해 선교가 시작되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선교 정책 A와 선교 정책 B 사이에서의 고민이었습니다. 선교 정책 A는 우리도 지 교회의 숫자를 갖자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선교 정책 B는 이미 한국에 교회 숫자는 많으니  한국교회 전체를 섬기는 교단이 되자는 정책이었습니다. 결국  한국교회 전체를 섬기는 선교 정책 B를 택하였고, 그 결과물이 루터란 아워, 기독교 통신강좌, 베델성서, 특별히 최근에는 베델 성서 자녀 교육 편을 발간하여, 어떻게 나의 자녀에게 신앙으로 바르게 교육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믿습니다.

지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저는 한구석 지도자로서 또 한 번의 큰 결단을 했다 싶어집니다. 즉 영어판 루터전집(Luther Works) 55권, 지금은 75권으로 늘었습니다만, 이 전체를 번역하기로 결정하고 지금 한국의 최고의 루터 학자들을 모아서 5억 원의 예산을 세워 번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2017년이면 일차 루터 연구에 중요한 31권부터 55권을 우리 모두가 만날 수 있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러면 루터에 대하여, 2차 문헌 즉 secondary source가 아닌, 제 1차 문헌 preliminary source으로 루터의 글을 직접 일고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  한국교회 전체 섬김, 모든 목회장의 섬김이라 믿고 이 또한 우리 교단의 존재 목적에 맞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섬김이라 믿어집니다.

그래서인지 저희 교단을 아시는 목사님들께서 우리 교단에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작은 거인” ‘Little Giant’ 이런 뜻이지요. Little in number, 숫자에서는 작지만, 50개의 교회뿐입니다. 여러분 시찰회보다도 작을 것입니다. 그러나 Giant in impact, 영향력에 있어서는 거목이라고, 그래서 저는 Little Giant 별칭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 루터교회가 한국에 존재하는 정체성이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터교 총회장 직은 4년이라 말씀드렸고, 재선을 통해 중임이 가능하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지금 저는 총회장 1기 3년차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섭리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귀한 일이 저에게 있습니다. 2017년 10월 31일, 즉 종교개혁 500주년의 날입니다. 이 날이 저의 총회장 임기의 공식적, 공식적 마지막 날입니다. 하루 먼저도 아니고, 하루 나중도 아닙니다. 바로 2017년 10월 31일입니다.

이 종교개혁 500주년은 너무나 큰 바윗덩어리처럼 저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기에, 정말 무거운 책임감으로 매일을 삽니다. 더 두려운 것은 제 자신 때문입니다. 능력 없지요, 지혜도 부족하지요, 교단도 심히 작지요, 정말 저 때문에 종교개혁 500주년 중요한 사건이 그냥 그렇게 넘어가지 않을까 싶어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총회장 임기 중에 교황 프란체스코 방문 시에 만나, 악수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본 것은 교황은 한국 백성의 마음도 빼앗고, 많은 개신교 교인들이 속절없이 천주교로 옮아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생일날, 그것도 500번째 맞는 생일날에, 개신교회도 우리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등을 돌리기 시작하는 그들을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게 해야 하는데, 그 책임이 이 작은 어깨에 있다 믿어지니, 어찌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이기에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새벽 예배 인도의 책임을 벗은 총회장 직이지만, 그 습관 그대로 지금도 4시 30분에 기상하여 5시면 총회장실로 향합니다. 그리고 총회장실 뒤에 마련한 기도 방에서 기도합니다. 루터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무서운 기도의 사람입니다. 루터의 어록 중에 “나는 하루 두 시간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쁜 날이 될 것이다 싶으면 세 시간 기도합니다. 바쁜 틈을 타고 사탄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루터를 닮고 싶은 후예로서 기도하게 됩니다.

총회장의 공식 임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늘 하던 대로 새벽 기도를 하고 있는데 영감을 주시더군요. 500주년 슬로건으로 받았습니다. “칠천만 동포여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그렇게 외치고 기도하다가 통일을 선물로 하나님께로 받게 된다면 최고의 종교개혁 500주년의 축제가 될 것입니다. 물론 타종교를 배려하여 다른 표어로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칠천만 동포가 다 하나님의 자녀 아닌가요? 우리야 찾아진 자녀이지만, 그들도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보기에, 선교적 신앙으로 우리 교단은 그렇게 쓰기로 했고, 전 교단이 같은 표어로 통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500주년의 준비의 중압감으로 인해, 먼저 TF팀을 가동했습니다, 그들이 대충 100여 가지의 행사를 기획하여 가져 왔습니다. TF팀을 실무팀으로 바꾸고, 그리고 많은 모임과 웍샾과 세미나를 통해서 12가지 행사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교단은 이 일을 위해서 우리 교단으로서 출원할 수 있는 최대의 예산 25억 원 정도를 확보하여 정기총회에 허락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사적 준비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저의 마음은 계속 무겁기 그지없었습니다. 속으로 저를 무겁게 하는 질문은 대충 이렇습니다. “행사는 진행될 것이다. 행사는 누군가는 할 것이다. 크게 할 수도 있고, 작게 할 수도 있고, 그리고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도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메시지 아닌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개신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고 있고 무엇을 개혁해야 합니까? 그러면 단골로 제기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교회 세습, 성직자의 세금, 교회 재정의 공공성, 목회자의 권위주의, 하나 됨을 기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 등등이 단골로 제기되는 개혁의 주제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요즈음, 저는 교단장을 만날 때, 신음소리로 호소 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 또한 제도적인 개혁 중 한 개혁입니다. 바로 1년직 총회장 제도에서 모든 교단장의 임기가 적어도 4년으로 개혁되었으면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천만 기독교인이 이렇게 무기력할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 후보들이 천주교회 문 앞에 가서 읍소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개신교 교단장에게 오지를 않습니다. 모래알이기 때문입니다. 개신교회를 두려워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를 찾는다면 1년직 총회장 제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1년직 임기의 총회장임에도 많은 목사님들이 이전투구를 합니다. 돈도 씁니다. 몇 억이 아니라 몇십 억도 쓴다 합니다. 어느 총회는 똥도 뿌렸다 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 백성들에게 성직자들도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성직자 경시 풍조를 낳고 말았습니다. NCCK는 9개 교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큰 교단, 즉 예장 통합, 기장 등이 큰 소리를 못 냅니다. 오히려 작은 교단인 구세군, 성공회, 루터교회가 큰 소리를 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들 교단장은 적어도 4년 이상 그 곳에 있습니다. 이번에도 신당 창당을 하면서 개신교회는 찾아오지 않고, 김희중 천주교 대주교를 찾아가며 9시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힘없는 개신교 영향력 없는 개신교회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가는 곳마다, 가능하시다면, 4년 임기의 총회장 제도, 더 길면 더 좋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했습니까? 왜 보고도 배우지를 못합니까? 우리는 숫자도 더 많고 더 가능성이 있는데, 그래서 이렇게 외쳐 봅니다. 각 교단에 신학이 다르고 정치제도가 뜻이 있겠지만, 가장 작은 교단장의 한 사람, 그래도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악순환의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를, 선순환으로 바꾸는데 이 제도가 너무 필요함을 느끼기에 만나는 목사님들에게 읍소하고 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제도적 개혁 중 그 하나일 뿐입니다. 루터에게 물어봅니다. 이 정도의 제도적 개혁이라면  한국교회가 개혁되고, 살아날 수 있고, 이 땅의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루터에게 조언을 구하면, 루터는 다른 개혁을 우리에게 부탁하는 소리가 있다 싶습니다. 그 소리란 “나부터 개혁”이다 싶습니다. “나부터의 개혁”

루터의 종교 개혁은 “나부터의 개혁”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의롭다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거룩한 욕망으로부터 그는 성경을 무섭도록 연구하고 고행의 훈련을 무섭게 동행합니다. 정말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가로막는 죄에 대해 처절하게 절망하고,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반항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내면의 개혁, 나부터 개혁의 결과가 루터의 두 신학입니다. 바로 “칭의” 와 십자가 신학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 “Justification by the Grace through the Faith”

저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차라리 이 땅에 루터교가 없었더라면 더 낫지 않을까? 루터교 총회장으로서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루터교회는 정말 작은 교단입니다. 그래서인지 여러분이 루터를 떠올리면 루터교 창시자로 압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 루터교회가 없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루터교 창시자가 아닙니다. 루터 자신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루터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루터란’이라는 말을 쓰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후대 사람이 루터를 좋아해서 ‘루터란’이라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루터는 프로테스탄트의 창시자입니다. 당시 교황청에서 루터와 루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반항하는 자들, 그 뜻으로 왜 ‘protest’ 하느냐고 너희는 반항아 ‘protestant’라고, 그러므로 강조합니다. 종교개혁을 준비하는 우리는 루터를 우리 개신교회 신학의 원 뿌리요, 근본 샘물로 분명히 알고 루터의 신앙과 신학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 500주년의 근본 준비라 믿어집니다. 저는 이 땅에 하나님이 내신 소중한 세 사람이 있다면, 사도 바울과 성 어거스틴, 그리고 마르틴 루터라 믿습니다.

루터의 개혁은 “나부터 개혁”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나의 개혁”이냐 루터에게 물으면, 다시금 ‘Three solas’를 제시하고 있다 싶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 “오직 말씀으로만”
그래서 묻게 됩니다. 하나님, 이 세 ‘Solas’가 한국 기독교 안에서도 개혁의 메시지가 될까요?

일반 기독교인에게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면, 대다수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은혜, 말씀이란 세 용어를 세상 사람에게 제시하면 단지 기독교인들만의 자기들 언어라고 개혁의 반응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행사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개혁의 메시지인데, 주님, 이 땅의 기독교인도, 이 땅에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도 이해할 수 있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이끌 동력으로 메시지를 주옵소서. 2014년 지난 한 해는 이 기도로 이 고민으로 연구하고 묵상하고 또 고민하였습니다. 올해 첫 번째 주간은 기도원에서 이 한 가지 기도제목, 주님, 종교개혁 500주년 메시지를 받겠다는 마음으로 금식 기도에 올랐습니다. 4일간의 짧은 기도 기간이었지만, 그 동안의 오랜 기도가 오랜 연구가 고뇌가 응답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로 “나부터 개혁”이 이렇게 일어나면 되겠다 싶더라고요. 바로 나그네와 거지와 머슴이라는 주제입니다.

첫째, 나그네로 삽시다.
– 이는 “오직 믿음으로만”의 다른 표현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천국 소망을 버린 것 같습니다. 있어도 점점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니 아예 천국이 없다고 믿는 기독교인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이 없다고 믿기에 하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 땅을 하늘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사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소망하는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욕심 내려놓기가 가능합니다. 루터에게 배워야 하는 것은 그는 철저한 종말론자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루터처럼 믿은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는다면, 나그네로의 삶이 가능합니다. 이 땅에서 의미 있게 하는 삶의 지혜를 설교라는 선포로 가르쳐야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하늘을 소망하며, 나그네로서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sola fide”입니다.

둘째, 거지로 삽시다.
– 이는 “오직 은혜로만”의 다른 표현입니다.

거지 신학은 루터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일 수 있습니다. 루터는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나서 아이스레벤에서 죽습니다. 만스벨트 지역 관리 논쟁을 중재하기 위해 방문하게 됩니다. 중재는 성공적으로 이끌지만, 독일에서 극도로 추운 겨울 여행은 63세의 노인이 된 루터에게 영원한 고향으로 인도합니다. 아이스레벤에서 루터는 마지막 설교를 하게 됩니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에 죽는데, 죽기 3일 전 2월 15일에 설교를 하게 되고 이 설교가 그의 마지막 설교가 됩니다. 저는 그 설교 전문을 여러 번 읽었는데 많은 것을 배우며 느끼게 하는 설교입니다. 루터의 마지막 설교를 보면서 설교자는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그 사명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에서 모든 기독교인은 말씀을 붙들어야 함을 재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을 배척하십니다. 이 뜻은 우리가 배우지 말아야 하거나 똑똑한 척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지식에 눈을 감고 오직 말씀만을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평생 연인이었던 예수님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오, 주님! 주님은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예견하는 한마디가 나옵니다. “내가 지금 심히 약합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 마지막 한 문장은 반드시 우리가 놓치지 말고,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니 복음이 일하도록 하십시다.”
그러면서 루터의 한 친구가 그의 품속에서 빡빡하게 적힌 메모 종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지들입니다. 그 말은 참입니다.” (Wir sind Bettler. Das ist wahr).

이 거지 신학은 바로 루터의 대표적인 신학입니다. 이 거지 신학은 루터가 은혜를 말할 때, 전체에 흐르는 주제입니다.

다른 개혁자의 신학과 루터의 신학이 구별되는 자리는 인간 이해입니다. 다른 개혁 신학자들은 인간이 병들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약도 타야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병을 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인간을 병들었다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임을 루터는 분명 믿습니다. 죽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살립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정말 낯선 일을 하십니다. 히브리서 강의를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루터는 발전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신 후에 살리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고유한 일(opus proprium)이 있습니다. 이 고유한 일이란 인간의 구원입니다. 자기 백성의 살리심입니다. 그런데 그 고유한 일을 낯선 일(opus alienum)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 낯선 일이 하나님 자신의 자기 결단인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대속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이시고, 우리의 구원에 충분한 의를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낯선 일입니다. 그리고 그 낯선 의를 믿음이라는 통로로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하나님의 전가(Sola Dei reputatione)를 통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의롭다 부르시는 칭의를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며 동시에 칭의의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철저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는 루터가 하나님의 절대 은총 은혜가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기에,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어 사는 거룩한 거지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도 우리 힘으로 살 수 있다고 믿기에 은혜의 종교가 아니라 공로의 종교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겸손의 흔적은 자취를 감추며, 교만의 목 곧음만이 흔히 보는 현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 저는 고급 승용차를 포기했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만진다는 지도자로서 고급 승용차가 거북한 옷처럼 느껴져서, 거지 신학의 고백으로 아반테로 바꾸었습니다. 지도자가 고급차를 타야 한다는 문화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성공회 주교님이 혼자 살려고 했다고 나무랍니다.

저는 거지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거지입니다. 그래서 거지는 부자를 바라보듯이, 거지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거룩한 거지가 우리 기독교인입니다.

셋째, 머슴으로 삽시다.
– 이는 “오직 말씀으로만”의 다른 표현입니다.

머슴은 주인만을 위한 사람입니다. 머슴에게 두 주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머슴인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야 합니다. 머슴은 주인을 위해 죽기도 합니다. 머슴인 우리는 말씀을 지키는 머슴으로 말씀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루터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Deus Loquens”(하나님의 말씀이 머슴이 선포할 때, 하나님이 선포하신다.) 우리에게 용기와 책임감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제가 하나님에게 허락받은 메시지는 우리는 정말 나그네로 살고, 거지로 살고 머슴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금식으로 정리한 마음을 가지고 1월 8일 내려오고, 1월 9일 금요일 김영주 총무님께서 저희 교단을 방문하셨고, 그 때 이 개혁의 메시지를 말씀드렸고, 총무님께서 기뻐하시더니 제 노트를 빼앗아 거기에 있는 종교개혁의 일곱 가지 기도까지 적어 가시더군요. 7가지 기도제목은 또 기회 있을 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강의를 이렇게 정리하려고 합니다.

칠천만 동포여,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칠천만 동포여,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이 땅의 백성들이여,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오직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거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오직 은혜만이 되어야 합니다.
머슴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지켜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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