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4) 한목협 제23회 전국수련회 기조발제

머리말: 성장에서 성숙으로

2023년은 1973년 여의도광장에서 빌리 그래함 서울전도대회를 개최한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교회는 이 전도 대회를 기점으로 명실공히 전 세계에서 유래 없는 급격한 교회 성장과 선교의 진보를 이루어 왔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는 기독교 2천년 역사상 아직까지도 가장 많은 연 인원 320만 명이 모인 집회로 기록될 만큼, 당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회심과 부흥의 역사는 한반도를 긍휼히 여기신 큰 은혜였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때로 교회사에 있어서 성령의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하심 다음에 인간의 나약함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 그 부흥을 온전히 담아내는 질그릇의 역할에 실패하거나, 그 역할을 충실히 행하는데 게을러져서, 성령의 역사를 소멸케 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이다. 은혜를 은혜 되게, 부흥을 참다운 부흥되게 하는 복음 맡은 자의 역할은 부흥 자체만큼 중요한 과제이다.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들 마다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고, 숫자상으로 성장할 때, 리더들은 성숙으로 가는 길을 기도하고, 준비해야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교회는 교회 성장을 넘어서, 이제 성숙의 단계로 진보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성공은 성숙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시험대에 오른 팬데믹 상황

최근에 기독교 내부에서 나오는 글과 통계 그리고 동향들을 보면, 전 세계 교회들의 화두는 ‘예배 회복’, ‘공동체성 회복’, ‘선교 회복’, 이 세 가지에 집약될 수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이 세 가지 부분들이 팬데믹 상황에서 시험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예배 회복이 하나님과의 관계라 볼 수 있다면, 공동체의 회복은 믿는 자들 간의 교제와 사역의 역동성이라 볼 수 있고, 선교의 회복은 그것을 통한 이웃들에 대한 사랑과 복음 전도의 회복이라 볼 수 있겠다.

예배 회복, 공동체성 회복, 선교 회복, 이 세 가지는 서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특별히 우리는 오늘 공동체성 회복에 대하여 다루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성장에서 성숙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공동체성에 대한 성찰이 지금 가장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렬한 우리의 고민 가운데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공동체와 더불어 팬데믹 상황이라는 시험대에 올랐다. 이 용광로와 같은 불의 시험대 위에서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공동체와는 어떻게 다르게 대처했는가? 

동시에 팬데믹은 앞으로 다시 닥쳐올 것이다.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주기적으로, 광범위하게 발생할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여기에 대하여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가? 세상의 기업들과 공동체는 이미 심각한 구조 조정에 들어갔다. 인력과 예산을 줄이고, 인프라를 새롭게 구축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 나서고, 메타버스 공간이 이제는 가상 공간이 아니라, 가상도 현실의 일부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안목으로 비전을 제시 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 기업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기업은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말하지만, 구조 조정할 때는 피도 눈물도 없다. 기업은 철저히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무엇이 달라야 하겠는가? 우리에게도 닥친 불의 시험대 앞에서 우리 스스로 그동안 교회 성장이라는 목표 아래, 우리의 내부에 스며든 비 성경적인 불순물들이 불의 시험대 앞에서 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본질을 회복해야 하는가? 어떤 영적 구조 조정을 해야 하는가?

필자는 우리 모두가 여기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12제자 비전에서 찾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현대인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

미국 복음주의위원회(Evangelical Council for Financial Accountability, ECFA)와 하트포드 종교 연구소(Hartford Institute for Religion Research)가 공동으로 실시한 “Mega Church 2020” 설문조사의 결과는 오늘날 교회가 처한 현실을 확인시켜 준다.1)  몇 가지 영역의 결과가 도출되었지만, 소그룹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이 있어 소개한다.

그 중 중요한 질문 두 가지는 ‘소그룹이 기독교적 양육과 영적 성장 전략에 있어 중심인가요?’ 그리고 ‘성도님의 영적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였다. 

10년 전만 해도 ‘목회자 설교’를 첫 번째로 꼽았다. 그런데 5년 전부터 이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로나를 지나며 훨씬 더 많이 바뀌었다. 놀랍게도 90% 이상의 사람들이 영적 성장에 가장 도움을 주는 것은 ‘소그룹’이라고 답변했다. 우리는 대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위엄과 존재하심을 체험한다. 그리고 이 체험과 받은 말씀을 바탕으로 소그룹에서 성도 개개인의 삶을 나눌 때 신앙 생활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성장한다고 다수의 사람들이 고백한 것이다.

 

두 가지 온전한 만남 사이에서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2020년, 2021년도 통계청2)의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 나라 1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40%를 넘어섰고, 한 유력 경제 일간지3)는 [외로운 한국인, 1인 가구 더 늘다] 라는 기사를 내보낼 만큼, 팬데믹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호소한 단어는 [답답함, 외로움, 두려움]이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의 절대 고독 문제를 해결할 키는 무엇일까? 답은 그 고독을 채워주는 온전한 대상을 만나는 것이다. 바로 관계성을 통한 문제 회복이다. 그 관계성이란 첫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러 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대면한다. 야곱의 이야기는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절대 고독의 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파스칼(Blaise Pascal)은 31세에 하나님을 만났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옷에서 이런 짧은 글귀가 발견되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 즉 공백이 있다. 이것은 그 어떤 피조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채워 줄 수 있는 공백이다.” 그가 발견한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자신의 옷 속에 넣어 항상 지니고 다녔을까?

인간의 수많은 삶의 문제들은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할 해답을 사람과 물질, 환경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동시에 두 번째 중요한 관계성은 인간과의 만남이다.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이지만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 상처가 치유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만남이라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훈련인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오트버그(John Ortberg)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모든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공허감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관계에 대한 내면의 요구는 다른 어떤 대체물로도 인간 대신 채워 줄 수 없다.”4)

인간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말이다. 오트버그의 이 말은 성경적이다. 삼위일체라는 공동체로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를 위해 두 번째 인간을 계획하셨다. 그 두 번째 인간은 여자이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를 통해 그와 동등하게 창조된 존재이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여자를 보고 이런 고백을 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아담의 감탄에 찬 문장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면 엄청난 친밀감이 묻어 나오는 고백이다. 이것은 이 땅에 최초로 탄생한 공동체의 모습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장면이다. 또한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이시며, 태초부터 이런 친밀감이 가득한 공동체를 인간사에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단편 적인 예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공동체성을 이룬 인류 최초의 인간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은 서로가 완전에 가까운 사랑을 하는 친밀한 공동체로 이 만남 공동체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결국 교만이라는 죄가 우리의 생명력인 공동체를 파괴하고 말았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교회 공동체의 첫 번째 역할은 이 무너진 두 관계를 다시 온전히 연결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 사람들과 무너진 관계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다리를 놓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죄로 말미 암아 단절된 하늘과 땅을 온전히 연결하고,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사람들의 관계를 연결해 주시는 중보자이신 것이다.

 

12제자들을 부르시고 공동체의 중요성을 보여 주신 예수님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열둘을 부르시고, 온전한 공동체가 무엇인지 시험적으로 보여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훨씬 더 대규모 적이고, 훨씬 더 기적적인 방법으로 파괴된 공동체를 회복케 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 그가 택한 소수 열두 명과 3년간 함께 먹고, 자고, 울고, 웃으며, 공동체로 묶어 주신 것은 우리에게 시사는 바가 크다.

그 열두 제자 소그룹 공동체에서는 하나님과 해결해야 할 문제를 예수님과 해결하고, 사람에게 받은 상처들을, 사람 안에서도 회복하는 기회도 주신 것이다. 

 

공동체를 경험한 제자들이 세운 교회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예수님과 친밀한 공동체를 경험한 열두 사도들이 이 땅에 세운 공동체가 “교회” 인 것이다. 만약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그런 친밀한 소그룹의 교제가 없었다면,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DNA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초대 교회들은 가정에서 모이면서 [오이코스] 운동을 지속하고, 사도들이 가르쳐준 말씀과 교제에 대한 기쁨을 계속 누릴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사실 교회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우리 모두가 교회를 처음 경험한 것은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첫 걸음을 내디딘 지역 교회이다. 자연히 우리는 그 지역 교회의 성숙도에 따라서 교회를 평가하고 선입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성경적인 교회론에 눈을 뜨기 위해서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신약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교회가 세워진 배경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회복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열둘을 부르시고, 함께 하신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열두 제자 비전을 통해 소그룹의 중요성을 몇 가지 나누기를 원한다.

 

1. 12제자 비전은 목회 트렌드가 아니다.

- 12제자 비전은 교회 성장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 12제자 비전은 교인 관리를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 12제자 비전은 시대에 따라 바뀌는 목회 트렌드가 아니다.
- 12제자 비전은 취사 선택 사항이 아니다.

 

2. 12제자 비전은 교회론의 출발이자, 가장 충실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직접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능력을 보여 주는 데 주력하셨다. 마가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처럼 예수님은 스스로가 움직이는 하나님의 나라, 움직이는 교회셨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역을 마가복음은 이렇게 설명한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먼저 선포하며 보여 주시고자 한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세워질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 즉 공동체의 정체성을 선포하신 후에 예수님은 12명을 부르셨다. 그 거대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최소한의 공동체가 무엇인가를 삶으로 보여주기 위해 12명의 겨자씨를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시고 사탄의 시험을 거치셨다. 그 후 곧바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가르치고 실제로 그 나라의 능력을 보여 주셨다.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교회 탄생 사이에 발생했다. 예수님의 목적은 분명했다. 3년간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능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나라의 비전을 이 땅에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분명하고 실제적으로 가르치기 위함이셨다.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신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3-15).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들에게 행하신 일을 알 수 있다. 먼저 그들을 택하셨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을 통해 자신의 삶으로 제자훈련을 시키고 재생산이 가능하도록 하셨다. 다음은 ‘보내사 전도’ 하게 하셨다. 전도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는가를 훈련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귀신을 내쫓는 권능’ 도 가지게 하셨다. 즉 실제적인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단순히 이론이나 지식이 아닌 그 나라의 실제적 능력을 가르치며 보여 주신 것이 열두 제자 비전이다. 

이후 고난을 받고 부활 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실제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공동체가 한마음이 되어 전심으로 기도하자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역사가 그들에게 임했다. 그리고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했다. 베드로의 첫 설교를 통해 3천 명이 예수를 영접했고 이는 예루살렘 공동체가 형성되는 단초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디에서 모여서 교제하고 예배를 드렸을까? 어디서 어떻게 모일 것인가는 초대 교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시작은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배당을 지으신 후에 제자를 부르지 않았다. 사람을 부르고 그들을 교회로 삼으셨다.

 초대 교회의 원문이나 성경을 미루어 볼 때, 초대 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오이코스 공동체였다. 이 작은 공동체가 조금씩 대그룹으로 성장해 나간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그 놀라운 변화를 이렇게 고백한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행 2:46-47).

여기서 ‘집’이 곧 헬라어로 오이코스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건축물인 집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정, 가계, 확장된 가족 친교 단체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최초의 예수 마을 공동체는 한번도 한 자리에 대그룹으로 모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모여 친교하고 주의 만찬을 나누었다.

 후에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하며 교회를 세울 때도 이 전통은 계속되었다. 로마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다(행 18장). 예루살렘교회는 마리아의 집에서, 빌립보교회는 루디아의 집에서,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 모든 셀 교회의 모형은 바로 예수님이 시작하신 12제자 비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핍박이나 기근과 같은 상황에서도 셀그룹으로 모여 모임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 연약해 보이는 소그룹이 가장 강력한 공동체의 기초가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교회의 모형과 원동력은 12제자 비전에 있다.

목회자는 목회를 하면서 어떤 위기 상황에도 이렇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열두제자 비전으로 돌아 가서, 힘을 얻고, 회복하고, 올인해야 한다. 우리 역시 열두제자처럼 그렇게 부름 받고 사역하는 주님의 종들이기 때문이다.

 

3. 12제자 비전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목양 사역의 가장 건강한 모델이다.

많은 사람이 소그룹을 택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여기에 속해 있는가? 나는 여기서 어떤 존재인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이 질문들을 통해 소속감, 존재감, 사명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롭고 고독한 이들이 자신을 받아 줄 곳을 찾아 유랑하는 시대이다. 이 외로운 시대에 12제자 비전이 답이 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마태복음 4장은 우리에게 네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8-22).

첫 번째 단어는 ‘보셨다’ 이다(18절). 이것은 공감을 뜻한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소외된 보잘 것 없는 제자들을 주목하여 보셨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공감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공감하시며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과거와 연약함, 모든 죄성을 다 아시고 나의 미래까지 예측하신다. 

두 번째 단어는 ‘부르시고’ 이다(21절).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주셨다. 이 부르심은 예수님의 초청이다. 아무 데도 갈 곳 없는 우리를 불러 그의 공동체에 속하게 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셨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신 것이다(요 14:18).

세 번째 단어는 ‘나를 따르라’ 이다(19절).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존재감을 주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존재감은 가장 큰 존재감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네 번째 단어는 ‘만들리라’ 이다(19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사명감을 부여하셨다. 이 선언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선언이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자 그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는 그 사랑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공동체이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던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 그 사랑으로 변화된 제자 공동체. 이것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갈 교회를 향한 대답이다. 우리 모두 소속감, 존재감, 사명감이 필요하다.

 

4. 12제자 비전은 소그룹 사역을 통한 제자훈련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거나, 교회 성장 신드롬의 유혹에 있을 때 우리는 제자 훈련을 왜 하는가? 물어야 한다. 우리시대의 스승 존 스토트(John Stott)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전도를 하지 않고 영혼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성경공부를 그만두던지, 성경공부의 목적을 바꾸라”고 도전했다.

필자는 제자 훈련을 [예수님 사랑! 예수님 자랑!] 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분을 자연스럽게 닮아가게 되어 있고, 그러다 보면 인격이 성장해 간다. 동시에 그분 마음속에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나의 삶 가운데 만나는 사람마다 그분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제자훈련의 목적은 [예수님 사랑, 예수님 자랑] 이다.

그런데 이것은 혼자 할 수 없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서로가 보고 배우고, 도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12제자 소그룹에서는 이것이 친밀감 속에 가능했다. 예수님은 늘 이 열둘을 따로 부르셔서 가르쳐 주셨다. 단순히 답 달고, 단계가 올라가고 시험 보는 제자훈련으로는 인격은 성숙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구촌교회의 목장 사역의 특징은 소위 말하는 제자 훈련 과정을 소그룹에서 녹아져 내리게 한다. 배우고 훈련받은 지식을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훈련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모든 소그룹 사역의 목적을 아주 간단히 세 가지로 가르친다. [돌보고, 나누고, 전하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중요한 모범이다. 

마가복음 1장 32-39절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 속에 이 세 가지, 영혼을 돌보고(CARING FOR), 말씀을 나누고(SHARING WITH), 복음을 전하는(REACHING OUT) 사역을 중심적으로 잘 보여 준다. 지식적으로 배운 제자 훈련은 반드시 소그룹에서 검증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대로 소그룹 사역은 돌보고 나누고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5. 12제자 비전은 함께 죄와 대항하고, 죄에 넘어진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개인과 가정 및 공동체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제시하셨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즉 그의 몸을 통해 생성된 예수 마을 공동체인 교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주의 만찬” 과 “세례(침례)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 예식은 치유와 회복 그리고 연합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보여 준다.

“하나님이 공동체를 주신 이유는 바로 ‘힘을 합쳐 죄에 대항하여 승리하고 서로를 섬기기’ 위함입니다. 나아가 죄를 지어도 서로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용서하는 영혼의 힘을 키우며, 죄를 지어도 서로 아주 엎드러지지 않도록 격려하며 함께 일어서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를 세상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5)

“죄를 고백하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며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그 죄를 고백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지 못하면 하나님께도 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고백하지 못하면 사람에게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주신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죄의 고백입니다.”6)

 

6. 12제자 비전은 전쟁이나, 핍박, 기근, 전염병 같은 환난의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이다.

재난과 핍박에 가장 좋은 교회 구조는 셀 교회이다. 실제로 핍박을 받고 있는 선교 지역에서는 셀 그룹의 SNS 활동이 두드러진다. 몇 년 전 터키에 선교를 갔을 때, 동부 국경과 인접한 국가의 사람들이 SNS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침례 받는 것을 목도했다.

셀 교회를 추구하는 지구촌교회는 격년으로 예배당이 아닌 가정에서 목장별로 모여서 예배 드리고 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교회에 갈 수 없는 유사시를 대비한 훈련을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셀그룹의 리더인 목자들이 평신도 목회자로서 자리매김하는 훈련의 기회로 삼고자 함이다. 셋째는 그동안 참석하지 못했던 성도를 목장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코로나 초기에 지구촌교회는 자신 있게 온라인 예배로 빠르게 전환할 수 있었다. 고난과 핍박에 강한 셀 교회의 위력을 확인한 셈이다.

예루살렘교회는 계속되는 핍박과 기근에서도 생명력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며 오히려 더 부흥했다. 그들은 비록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져야 했지만 불평하지 않고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행 8:4).

중국이 1949년에 공산화 되고 1966년에 문화대혁명으로 모든 선교사를 추방하며 기독교를 핍박했을 때, 전 세계는 중국에서의 기독교 멸절을 예상했다. 그러나 1998년에 중국 내부적으로 실시한 기독교 인구 조사에서 약 9천만 명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더 놀라운 사실은 중국 정부에 등록되어 건물도 있던 삼자교회의 성도가 1천만 명인데 핍박으로 인해 지하로 스며들어서 소그룹으로 모인 가정 교회의 성도가 무려 9천만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핍박 속에서도 1억 명에 가까운 믿는 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다.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신학교도 교회 건물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이다. 이는 또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의 비전, 즉 소그룹으로 모여 그 정체성을 붙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님이 보여 주신 12제자 비전의 능력을 맛보려면 팬데믹 상황이라도 거룩한 실험과 거룩한 믿음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시대 다시 한번 종교개혁이 필요하지 않은가?

 

7. 12제자 비전은 복음전도에 가장 효과적인 소그룹이다.

- 코로나 상황에서도 계속된 목장 교회 전도 사역과 선교 사역
- 목장 교회가 연결된 블레싱 제주
- 개인전도 팀 사역

 

8. 12제자 비전은 복음의 관심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 Holistic Evangelism 총체적 복음 전도: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의 균형
사례1. 10만원의 기적
사례2. 대한민국 피로회복 헌혈 사역/ 소아암 가족 돕기
사례3. 미자립 교회 돕기 사역
사례4. 구제 긍휼 사역에 최적화된 셀교회
사례5. 소그룹 체험 이야기
- 개척 시절부터 셀그룹 운영
- 목회자 가정을 오픈하고 일주일에 세번까지 셀그룹을 운영
- 일년에 6번 정도 모든 새 가족들을 집에 초대해서 간증을 듣고 나눔을 하고 12제자 비전을 나눔
- 목회의 가장 큰 기쁨은 그 소그룹에서의 나눔을 통해 성도들 삶의 변화와 성장을 목격하는 것.

 

9. 12제자 비전은 미디어의 지배를 벗어나, 참다운 인격적인 만남의 기쁨을 가져다준다.

현대인들은 미디어상에서 구독자 수와 조회수의 영향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거의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미디어의 지배를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사탄에게 빼앗긴 가상 공간을 탈환해서 이 공간을 복음을 증거하는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백히 보여 주시고, 명령하신 메시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장 교회 혹은 셀 교회는 All line 사역(on line, off line)에도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이 팬데믹 상황에서 여러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미디어 자체를 숭배하거나, 거기에 대한 모든 것으로 우리의 사역이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 미디어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그 유혹이 극대화 되어있고, 사역자들의 피로감과 압박은 극에 달해 있다.

우리는 미디어를 활용하다가, 세상 사람들처럼 그곳에서 주는 열매에 도취되어 공동체의 본질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미디어는 인격이 없다. 아무리 작은 공동체라도 서로가 함께 대면으로 만나서 말씀과 삶을 나누어야 한다. On line과 Off line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 On line은 대면의 모든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12제자 사역이 더욱더 중요해진 대목이다. 더 많이 가상공간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더 큰 외로움이 밀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서던 복음주의 신학교 총장 리처드 랜드(Richard Land) 박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매우 짧은 시간에 전 세계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세계로 전환시켰고 이러한 전환은 기하급수적인 가속을 보여 주고 있다. 팬데믹 이전에도 사람들은 인터넷 혁명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인 Y세대는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더 많이 소비함에 따라서 외로움과 고립, 소외감,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다.”7)

그의 말처럼 공동체성의 파괴는 절대 고독으로 인한 개인의 파괴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개인의 파괴는 다시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현상을 낳고 있다. 전염병 시대는 이렇게 개인주의와 공동체 추구라는 양가감정이 드러나는 시기이다.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그의 베스트셀러 《두 번째 산》(The second mountain: the quest for a moral life)을 통해 전염병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가 초개인주의 사회에서 추구하는 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사람은 인생에서 큰 산을 두 번 오른다… 그 두 번째 산은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복해야 할 사랑, 가정, 소명, 공동체이다.”

이런 이야기가 초 개인주의 시대에서 마치 바벨론에 붙잡힌 영적 포로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을 열광시켰고 이 책은 모든 부문에서 차트 1위에 올랐다. 그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이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며, 위기의 시대, 우리가 진정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이 만드신 공동체라고 담대하고 선언한다.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개인은 다 두렵고, 절대적, 상대적 고독감에 시달리고 있다. 분노가 가득 차 있다. 가상공간에서의 만남과 이와 관련된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허전함에 신음하고 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통한 교제의 필요성을 깊이 갈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열두 제자 비전이 가장 필요한 때이며, 그런 강력한 소그룹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기회이다.

 

맺음말: 교회 공동체, 불의 용광로를 지나다

나의 한국 목회 경험 3년 중에 2년 반은 코로나 상황
결혼 6개월 후 신부가 도망가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수많은 목회자들이 탈진을 경험하고 있다. 두려움과 우울증을 호소한다. 과거처럼 성도들이 모이지 않고, 헌신도도 떨어지고, 헌금도 줄어들고, 다음세대에 대한 기대도 소망도 보이지 않는다.

극히 일부 교회들만 헌금이 증가하고, 교인수가 증가할 뿐 수많은 교회들과 평신도 리더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교회 외부의 사회적 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 목회자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겸손히 보여주신 열두 제자 비전이다. 교회사 2천년을 지켜온 공동체도 그렇고, 앞으로 세워질 교회 공동체도 그렇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새롭게 하시는 중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만지심과 인도하심을 바라보고, 주님이 세우신 공동체를 다시 성경적으로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더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실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팀 켈러(Timothy Keller) 목사는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 “You cannot know God apart from community”라는 의미 심장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12제자 비전 공동체에 목숨 걸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주.
1) 메가처치2020 조사는 미국 대형교회 트렌드에 대해 연구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국가적인 연구이다. 위 조사는 5년에 걸쳐 진행됐으며, 2천 명 이상의 출석하는 교회 582개가 참여하였다.
2)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 결과 https://kostat.go.kr/portal/korea/kor_nw/1/2/2/index.board
3) 매일경제, “외로운 한국인…1인가구 비중 더 늘었다”, 전경운 기자 https://www.mk.co.kr/news/economy/view/2021/12/ 1124221/
4)  John Ortberg, Everybody’s Normal Till You Get to Know Them, Zondervan Publishing Company, 2003, p.31-32
5) 최성은, 온전한 연결, 두란노서원, 2022, p.118.
6) 같은 책, p.114.
7) Christian Post, Arise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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