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16) 교갱협 제1차 장로섬김수련회 저녁집회

본문: 에스겔 14:1~11

반갑습니다. 한참 더운 여름에는 목사님들이 여름 설교할 때 유머로 하십니다. 너무 조시는 분이 많아서 어느 목사님이 '사이다'로 삼행시를 하셨습니다. ‘사’ 교인들이 운을 띄우니까 ‘사랑해 당신’ ‘이’ ‘이 세상 다 들어’ ‘다’ ‘다시 태어나도 사랑해’ 였습니다. 그것을 듣고 연세 많으신 어르신이 몸이 아파서 교회에 못나온 권사에게 가서 그대로 했습니다. "여보, 운을 한번 띄워봐." "사" "사랑해. 당신" "이" "이 세상 다 들어" 아내 권사가 "다" 했는데 연세가 좀 드셔서 깜빡 까먹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너무 좋아서 흐뭇한 표정으로 물어보는데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있어서 한마디 던졌다고 합니다. "다 뻥이야. 다 뻥." 솔직히 장로님들 되시고 부인 권사님 집사님들 되시면 가끔 '왜 내가 장로가 되었나?' '내가 왜 장로 부인이 되었나?' 이걸 가끔 까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런 좋은 섬김수련회를 허락하시고 여러분들에게 재충전과 재헌신의 시간을 주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장로 몇 분이 바벨론 포로로 있는데 장로인 우리들과 이 백성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에스겔 선지자를 찾아왔다고 본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몇몇 장로님들의 신앙은 이미 혼합적인 신앙, 이중적인 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환경이 바벨론 포로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속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또 집에는 바벨론 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에스겔에게 찾아와서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아주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죠.

이러한 모습을 본문 7절에서 무엇으로 표현했을까요? 이러한 장로님들의 모습은 "자기를 위하여 찾아오는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묻고자 목사를 찾아오는 분'이라는 말씀이죠. 이미 너무 오랜 시간동안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번성하는 바벨론에 와보니까 황금으로 만든 독종 개구리 황소 신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소원을 빌고 예언을 받는 그들의 앞날이 너무 영롱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너무 작아 보이기 시작했고 점점 물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신전 곁에 있는 신접한 여인들의 예언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예언이나 다 같다고 장로님들이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나한테 좋은 말 해주는 것은 다 좋은 선지자이고, 신접한 사람이든 에스겔 선지자든 나와 내 가족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선지자들은 나쁜 선지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면서 별로 더 이상 좋은 권면이나 좋은 예언의 말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입을 다물게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삶과 우상을 정확히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말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은 그들을 향한 징계와 형벌이었습니다.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예언도 되지만 거울도 됩니다. 혹시 우리들이 장로와 장로 부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혹시 우상이 있지 않을까 조용한 이 저녁 시간에 자신 밖에서 자신을 한번 보는 것도 아주 유익할 것입니다. 물론 장로님 내외분이 이상한 형상의 우상을 섬기진 않습니다. 그러나 무형적인 우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앞장서서 섬기면서 지나치게 자기 주관적인 판단을 귀히 여기고 강조한다면 무형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장로 부인으로서 장로님인 남편을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뒤에서 기도로 뒷받침할 때에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과 경험, 상식, 인간적인 지식을 너무 강하게 주장한다면 어쩌면 그것이 우리들 가운데에 있는 보이지 않는 우상일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고 소리를 크게 내서 말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담임목사도 다뤄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것도 우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일주일 동안 얼마나 힘들게 사회생활을 하고 교회에 오는데, 저 교인들이 생존 경쟁이 아니라 생존 전쟁을 치루면서 일주일 동안 피투성이가 되서 들어왔는데 담임목사가 하나님의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설교를 해야지. 이게 무슨 설교야? 목사님 설교도 좀 바뀌어야 해.' 하는 생각이 꿈틀거린다면 제가 잘못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자아라는 우상이 내 안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주관과 경험과 판단과 상식과 세상 지식이 가득해서 자신을 지배하고, 그리고 담임 목사까지 다뤄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깔려있다면 어느새 나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하나님까지도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이 깔릴 수 있습니다. 마치 타이타닉처럼 말입니다. 타이타닉호가 처음 출항하기 전에 광고를 대대적으로 했습니다. 광고 내용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타이타닉은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다." 자기들이 만든 최고의 배, 큰 배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상식과 경험으로 판단했습니다. '이 배는 하나님도 침몰할 수 없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교회, 전통을 보수와 개혁을 추구하는 장로교에서 그것을 끝까지 지켜야 된다 하면 그것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전통이야. 전통은 함부로 바꾸는 것이 아니야. 너희도 우리 나이 돼 봐. 다 이해할 수 있는 거야. 잘 들어. 목사는 왔다가 다시 떠날 수 있는거야. 그러나 우리 교회를 끝까지 지키는 것은 우리야. 정신 차려.’ 이러면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지나친 자아와 목사와 하나님까지도 내 판단에 의해서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고, 이것이 교회의 전통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고 하면 어쩌면 변화를 두려워하는 평신도 지도자가 아닐까 한번쯤 생각하는 것도 유익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보수주의가 아닙니다. 보수와 성경이 허락하는 개혁이 병행하는 것이 장로교회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목사가 변해야 산다고 90%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통감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10%는 한국교회 장로님들도 변해야 살 수 있고, 새 힘을 얻을 수 있고 청소년, 청년, 집사들이 힘을 얻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복음에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말씀이 해당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릴 것이요, 혹시 그러한 부분이 있다면 기독교의 핵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둘째 나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눈치를 본다. 이게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장로님 내외분의 자세와 중심은 출애굽기 18장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당회정치입니다. 물론 교회의 머리는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교인의 대표는 장로님이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대표는 담임목사님 이십니다. 이러한 분들이 모여 있는 곳이 당회겠죠? 이 당회에서는 다수결 원칙에 의해서 공동 의결하는 대의정치체제를 택하고 있습니다. 다수결 원칙에 의해서 공동 결의하는 대의정치체제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이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대의정치 체제는 삼권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장로교회의 당회 정치체제는 삼권이 당회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절대적인 권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들이 우리 교회가 더 민주적으로 발전하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들이 더 민주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면 삼권 중에 한 가지 권한만 가져야 합니다. 민주정치체제가 그렇습니다. 그럼 두 가지 당회가 가지고 있는 권한은 다른 체제나 당회에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지도체제라는 대의정치가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체제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갈 때에 출애굽기 18장 13절에서 그 방법론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였습니다. 하루 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자 재판하는 모세가 선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네, 그러다가 자네도 지치고 백성들도 기다리다가 다 지쳐. 이것은 자네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제 정치체제를 좀 바꿔야 해.” “모세야, 잘 들어봐. 지덕이 겸비된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 무망하고 불의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한번 뽑아봐. 그래서 너희에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서 나눠줘.” 그리고 출애굽기 18장에서 우리들에게 제일 조명해 주고 있는 중심은 “이제부터 큰 일, 어려운 일은 지도자 모세가 하고 작은 일, 충분히 재판할 수 있는 객관적인 상황과 구체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은 천부장부터 십부장이 도맡아서 재판을 하도록 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도 지도자입니다. 백성 중에 대표로 뽑힌 천부장, 그리고 십부장까지 다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대의정치체제는 큰 일, 결정하기 힘든 일은 모세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넉넉히 객관적으로 피차 합의될 수 있는 일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역시 백성의 대표인 천부장과 십부장이 감당하게 되면, 백성들도 기뻐하고 모세와 평신도 지도자들도 힘을 얻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회 정치의 성경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회는 하나님의 대변자입니다. 동시에 당회는 교인의 대변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 책임이 막중합니다. 일개 대통령이 갖고 있는 책임보다 더 막중한 책임입니다. 만왕의 왕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피 흘려 그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이 막중한 당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대변자, 교인들의 대변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할 분담이 분명하지 아니하면 십중팔구 그 당회는 얼마 지난 후에 서로 싸우는 당회가 되고 맙니다. 교인들이 존경하지 않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도 전도하고 구제하면 당회에 있었던 아픈 소식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서 동네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우리한테 전도하지 말고 당신들끼리 싸우지나 마시오. 들리는 소식이 좋지 않수다."

여러분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인공 이영애가 나옵니다. 주인공이 목사를 만났을 때 빙그레 조소어린 표정으로 한마디 던졌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대학로에서 두 청년이 싸우고 있는데 이 청년이 너무 싸우니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말리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런데 연세 많으신 분이 중간에 들어가서 학생들을 다 제껴놓고 중간에서 딱 한마디 던졌더니 싸움이 끝나버렸데요. "야, 이 녀석들아. 여기가 교회냐? 이놈들아?" 그랬데요. 다들 어리둥절해서 흩어졌다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천주교, 불교에 이어 3위로 떨어진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평신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당회장과 평신도의 대표인 우리들이 역할 분담이 잘 되지 못하고, 당회의 모습이 완전히 벌거벗기듯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보고 뭐라고 하냐면 글로 표현하고 그들이 또 만나서 이야기할 때에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하고 ‘목사’를 ‘먹사’라고 합니다. 장로들은 교회 주식회사 이사들이고 교인들은 이중인격자로 치부해버립니다. 물론 저는 그런 비판을 위한 비판 때문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단은 이미 교회 밖 사람들은 자기 수하에 들어왔기 때문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단의 관심은 교회에 있습니다. 당회장과 당회원들을 흔들어서 거기에서 썩은 냄새를 나게 하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8장을 통해서 한 가지를 분명히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당회장과 당회원의 관계는 천생연분이 되어야 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한 7, 8년 지났을까요? TV 프로그램인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오셔서 할머니가 문제를 할아버지한테 손짓 발짓으로 알려주고 맞추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딱 보았더니 너무 너무 좋은 단어고 자기 부부의 모습과 같기에 빙그레 웃으면서 했습니다. 그것은 천생연분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면서 "우리 사이, 우리 사이, 우리 관계 말이야"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웬수" 그러셨습니다. 할머니가 당황해서 "아니, 아니, 우리 사이. 네 글자" 했더니 할아버지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평생웬수" 그랬다는 겁니다.

당회원과 당회장 사이가 ‘평생 웬수’가 되느냐, 아니면 ‘천생연분’의 관계가 되느냐에 하나님의 교회의 생사가 달려있습니다. 어쩌면 성경을 조명해서 보았을 때 당회장과 당회원분들의 관계는 공동운명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운명체입니다. 흥하면 같이 흥할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면 같이 받을 것이고, 그 영향이 우리 가족과 우리 교인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당도 야당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주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축복도 하지만, 때로는 권면도 할 수 있고 회개도 촉구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 말씀을 유심히 보면 하나님께서 이럴 때 내리시는 징벌은 더 큰 징벌을 막기 위함이요 더 큰 아픔이 있기 전에 화합하게 함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받게 되면 몸은 낫습니다. 그러나 상처는 영원히 간직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면 그 죄는 용서받지만 죄책은 오래 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개와 소와 동물처럼 맞아야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당회원들이 담임목사님들의 권면이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열 번 한다면 몇 번 정도는 이해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의 원리가 영의 원리를 약간 가르쳐줍니다. 프로야구선수 가운데 양준혁 선수가 있습니다. 그 모습과 태도가 남성다워서 남성팬도 많지만 여성팬도 꽤 있습니다. 그러나 양준혁 선수가 그렇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는 그는 3할 타자입니다. 3할 타자라는 것은 열 번 타격을 하면 그중에 세 번 안타를 치는 것입니다. 3할 타자는 한국 프로야구계에서 누구나 존경하고, 귀히 여기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3할 타자가 인정받는 곳이 야구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30년째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짧은 것 같으나 지금 보면 너무 길고 아득했던 30년 목회 여정 속에 제가 느낄 수 있었던 좋은 당회원들은, 이렇게 열 번 설교할 때 세 번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와 회개의 열매를 강조하는 설교를 은혜 가운데 받는 분들이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아름답게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담임목사님들이 장로님들 부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솔직히 설교를 준비할 때 장로님들과 부인들 눈치를 보면서 단어를 조심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3할 담임목사가 점점 적어지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사단이 교회 안까지 들어와서 칼 날 위에서 춤추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교회 사정은 모릅니다. 객관적으로 말씀 올리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3할 담임목사를 인정하고 수긍하고, 그 말씀을 좋아하고 존경한다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더 인정하고 부흥시켜주실 것입니다. 회개를 촉구할 수 있는 3할 담임목사님들이 점점 많아지고, 3할 담임목사님들을 향하여 당회원들이 내가 먼저 은혜받았다, 내가 먼저 변하겠다고 말씀해주겠다는 교회가 점점 많아지면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고 이 민족도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59년 되었습니다. '인천제2장로교회'라는 것은 인천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라는 의미입니다. 그 전에는 장로교회가 설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감리교로 선포했기 때문이죠. 인천에선 굉장히 오래된 교회입니다. 60년 된 장로교회가 인천제일장로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보다 1년 많은 것이죠. 그 교회는 통합 측이고 우리는 합동 측이죠. 합동측으론 제일 오래된 교회죠. 시무, 은퇴, 원로 장로님들을 합쳐서 서른 일곱분이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놀라지도 않으시네요. 저는 우리 교회 출신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태어나서 부목사로 다시 와서 담임이 되었습니다. 59년 동안 담임목사님이 딱 두 번 밖에 안 바뀌었습니다. 1대 담임목사님이 이승길 목사님, 우리 교단 25대 총회장 하셨습니다. 그때는 정년은퇴가 없었으니까 그 어르신께서 한평생 목회하시다가 소천하셔서 그분 밑에서 부목사님 생활하던 2대 이삼성 목사님께서 담임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평생 목회하시다가 만 70에 은퇴하시자 제가 부목사로 있다가 3대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또 12월 9일이 되면 부목사 6년에 담임목사 15년이 됩니다.

저희 교회의 특징은 합동 측의 천여 개 교회 가운데 59년 동안 담임목사님이 두 번 밖에 교체가 안 되었고, 두 분이 다 총회장을 하셨고, 어떠한 특별한 유고가 있어서 바뀐 것이 아니라 소천, 은퇴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은혜 중에 바뀌었습니다. 1대 이승길 담임목사님은 별명이 호랑이셨습니다. 저도 아주 어렸을 때 이승길 목사님이 나타나면 저와 함께 모든 아이들이 골목으로 숨거나 화장실 뒤로 숨었습니다. 워낙 무서운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따뜻하셨는데 그것을 우리들이 몰랐을 뿐이죠.

2대 담임목사님은 77회 총회장을 하셨어요. 성품이 온화하고 너무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니다 싶으면 공개재판을 해버립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우리 2대 담임목사님 계실 때에는 예배드리다가 화장실 가고 싶어서 중간에 나갔다가는 그 수많은 교인들 앞에서 공개 재판을 받아버립니다. 다신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직접적으로 쏴버리십니다. 목사님도 굉장히 온화한 분이지만 이건 성경적이 아니다 할 땐 굉장히 호랑이였습니다. 3대 목사인 저도 얼굴이 이렇게 인자하게 생기고 목소리가 은혜스럽지만 성질나면 무섭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1대나 2대나 3대나 솔직히 이것은 교회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10번 설교할 때 3번 정도 잘못을 지적합니다. 회개를 촉구합니다. 때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해도 어느 주제를 분명히 얘기해서 회개하도록 합니다. 회개 설교할 때에 그 3할을 장로님 내외분들은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담임목사를 인정하고 포용하고, 좋아하고 존경하니 장로님 가족이 먼저 복을 받습니다.

우리 교회는 인천에서 최후로 남은 낙후 지역입니다. 와 보면 이런 데서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온통 가게고 작고 큰 공장입니다. 바로 옆에는 축구장이 있고 뒤에는 야구장, 그리고 맨 뒤에 실내수영장, 테니스장, 그리고 오른쪽에 유명한 음식점이 있습니다. 교회 근처에 아파트가 한군데도 없는 공장지대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적, 질적, 구조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99%는 하나님의 은혜지만 1%는 담임목사의 3할 설교를 그대로 받고, 아무 말 하지 않고 본을 보이는 당회원과 그 부인들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씀드리면서, 기쁨으로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담겨져 심비에 새겨져 여러분의 새로운 인격과 당회원 내외분의 성품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천생연분의 관계는 설교도 그렇지만 목사님들이 너무 단순해서 실수가 많습니다. 교회 분위기를 보면 실수를 덮어주는 교회, 인내하는 교회를 하나님이 굉장히 사랑하십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말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얼마나 실수를 크게 했느냐 하면 축도를 하는데 그날따라 너무 더워서 정신이 없어서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님들 머리위에 임할지어다'인데 머리가 생각이 안나는 거에요. 순간 당황하다가 얘기한 게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해골 위에 있을지어다." 아이고 해골이 움직일 정도로 교인들이 축도 시간에 웃었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 후에 여러 가지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어요.

젊은 목사가 성찬을 집례하는데 목사도 당황합니다. 당황해서 떡을 먼저 줘야하는데 포도주를 먼저 준 거에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포도주를 먼저 주는데 장로님들이 누가 그걸 거절하겠습니까? 다들 그걸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선임장로님이 오셔서 "목사님, 떡부터 주셔야 합니다." 그러자 그 젊은 목사가 더욱 당황해서 "그냥 주는 대로 잡수세요." 그랬어요 그 친구는 그 후에 목회에 조금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교회 오전 예배 설교하러 딱 들어가서 묵상기도 할 때 굉장히 당황합니다. 말씀을 전하면 성령님이 역사하는 걸 느끼지만요. 큰 교회에서 장례식만 담당하는 젊은 목사가 있습니다. 얼마 지난 후에 결혼식을 집례해야 하는데 결혼식을 집례해 봤어야죠. 그래서 결혼식 하면서 친구한테 물어봐서 왠만큼 잘 했거든요. 그런데 끝부분에 결혼식을 마칩니다. 해야 하는데 뭐라고 그랬을까요? "이로써 하관식을 마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 친구 하관 안된 거 감사한 일입니다.

목사님들이 실수가 많아요. 생활이 단순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해 못할 부분들이 많아요. 그리고 대중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항상 긴장해서 실수합니다. 심지어는 결혼식에서 혼인선언할 때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감히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렇게 해야 하는데 "사람이 짝 지어준 것을 하나님이 감히 나누지 못할지니라" 그래서 하나님이 그냥 빙그레 웃고 끝나셨답니다. 하객, 일가친척들도 다 봐주었다 합니다.

근데 솔직히 목사들이 실수가 많습니다. 어떤 영적인 실수도 있고 목회적인 실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요즘 인성 테스트 나온 게 굉장히 많거든요. 총신 입학할 때 인성 테스트 한번만 하면 그 지원자의 인성 성품을 금방 알 수 있거든요. 그런거 한번 도입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구요. 신학교에서 헬라어, 히브리어 좋지요. 꼭 배워야겠죠. 그런데 헬라어, 히브리어만큼 신학교 교과목 가운데 목회자로서의 기본적인 예의와 성품을 가르켜주는 과목이 있었으면 하는 아주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들이 영적으로나 인격, 성품적으로 솔직히 자질이 장로님이나 장로님 부인보다 못한 분이 목사 안수 받는 현실을 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사실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실수 성품적인 자질의 부족함도 있지만은 대중 앞에 서야하기 때문에 항상 긴장 속에 예기치 못한 실수도 하고, 어떤 때는 치명적인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소천하셨지만 장충교회 이규율 목사님 밑에서 목회하는데 목사님이 1부 예배 사회보러 올라오시면서 설교하는 저한테 "이 목사 오늘 성찬식 있으니까 설교 15분으로 짧게 해야해" "예, 알고 있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감동했는지 악령이 감동했는지 난 모르겠습니다. 제가 35분을 해버렸습니다. 장충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 틀림없이 기억이 나실 겁니다. 이 앞에 장로님들이 다 하얀 가운을 입고 앉아계신데 저는 '저분들이 왜 하얀 가운을 입고 있지?' 이런 생각만 했습니다. 이규율 목사님이 뒤에서 사인을 주시는데도 저는 35분 설교를 했습니다. 그 다음은 제가 말하기 싫습니다.

이규율 목사님은 천사도 흠모하는 성품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이 나오셔서 광고하실 때에 "도저히 지금 1,2부 사이 시간이 촉박해서 성찬식을 할 수 없으니 혹 성찬에 동참하고 싶은 분들은 2부 예배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라고 광고하셨습니다. 나는 성령의 모독죄를 지은 놈 입니다. 이런 큰 실수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제가 이규율 목사님 방에 가서 딱 사표를 내고서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목사님 말씀하시는 대로 처신하겠습니다. 근데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딱 한 말씀 하셨습니다. 빙그레 웃으시면서 "두 번은 실수하지 말게나" 난 그분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두 번은 실수하지 말게나."

장로님들, 담임목사님들이 한번 실수할 수 있어요. 그러면 그냥 웃어주세요. 그리고 두 번 실수하시면 조금 당황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세 번 실수하면 조금 존경 안 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잘 들어보세요. 담임목사님이 네 번 실수를 하면 치명적인 실수에요. 그런데 네 번째 실수를 덮어주면 그 목사가 다섯 번째 실수는 절대로 안할 것입니다. 그가 정말 하나님께 소명 받은 하나님의 종이라면, 네 번째 실수를 덮어주었을 때에 그가 갸롯유다가 아니라면 다섯 번째 실수는 안할 것 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은 단체상급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상급은 개인상급입니다. 하나님은 단체상은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개인상을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특히 당회원 내외분이 담임목사가 네 번을 실수하고 치명적인 실수를 했는데도 덮어주면, 그 담임목사가 다섯 번째는 회개하고 그 일을 하지 않고 여러분 개인에게 영육간의 그리고 여러분의 자손들에게 복을 내려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완전한 나무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무가 완전하려면 네 가지가 완전해야 합니다. 꽃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잎이 고와야 합니다. 과일이 맛있어야 합니다. 그 나무가 재목감으로 훌륭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요. 이 네 가지가 완벽한 나무는 단 한그루도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평신도님들도 장로님 내외분들도 심지어 주의 종이라는 목사도 결코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절대 선한 목사 없습니다. 절대 악한 목사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사님과 아름다운 동행을 하며 천생연분의 관계를 가져서 복은 어떻게 보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거든요. 복을 받으려면 복 받을 일을 하면 되는 것이죠. 담임목사님 내외가 천생연분 관계를 가지면 여러분이 복을 받는 삶으로 여생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담임목사들 인격이 여러분보다 더 못할 수 있고 여러분보다 더 실수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늘 기억해야 할 것은 목사님의 인격보다는 위치를 생각해 주세요. 하나님의 사자라는 위치에요. 위치를 보고 한번만 더 품어주세요. 저는 어떤 면에선 가톨릭 신부들을 좋아합니다. 솔직히 신부님들은 술을 굉장히 많이 드십니다. 제가 아는 신부는 너무 술에 취해서 길거리에서 방황하다가 인천 제물포에서 차에 치여 돌아가셨어요. 신부님들은 결혼도 안하고 자녀도 없기에 줄담배 피시는 신부님도 많습니다. 아시는 분이 성당에서 장례식을 해서 갔더니 너무너무 긴 장례식을 끝내고 본당에서 담배를 물고 나오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신부님들은 도박, 마작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때론 그것보다 더 부적합한 일을 하시는 분들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천주교인들은 신부님의 인격을 보지 않습니다. 위치를 봅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아버지인데 위치를 보면 덮을 수 있고, 위치를 보면 이해할 수 있고, 한 번 더 용서할 수 있고, 한 번 더 품어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 사도바울의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갈라디아 교회 장로님들, 교인들, 여러분들이 시험 들 이유가 제 육체에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육체를 잘 아시죠? 키가 작고 얼굴은 날카로운 교수님 같고 그리고 참 못 생기셨어요.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 장로님들과 대부분의 교인들보다는 연세가 적었어요. 물질만능주의 세계 속에서 바울은 돈이 없고 건강도 얼마나 나빴는지 몰라요. 로마서를 너무 심한 합병증 때문에 대필을 시켰어요. 심한 안질은 합병증이 되어서 바울이 지나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아이고, 종합병원 지나가시네."

모든 면에서 바울은 장로님들과 성도님들에게 존경받을 외부적인 조건이 전혀 없었어요. 그러나 갈라디아서 4장 14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고백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장로님들, 성도님들 너무 고마워요. 나를 떠나지 아니하고 나를 버리지 않은 것 너무 고마워요. 나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접해주신 것 너무 고마워요. 아마도 일부 장로님, 일부 장로님 부인들께서는 내가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를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을 제가 알고 있으니 그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여러분들 위해서 기도합니다"라는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섬기고 있는 담임목사님 내외분들이 바울보다도 못한 육체적인 조건을 갖고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섬기는 그 교회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우연이라는 용어는 불교에서나 쓰는 용어에요. 여러분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셨고, 여러분들이 장로님이 되시고, 권사님이 되시고, 집사님이 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자시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해서 그 교회 가게 한 것, 여호와 하나님이여 그 직분 맡게 한 것,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여러분의 담임목사님도 우연히 지금 그 교회에 온 것 아니에요. 역시 그 담임목사 내외분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오신 것이에요. 우리는 우연히 만난 사이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러한 관계로 창세 때부터 예비하시고 때가 차매 이 교회를 담임목사 내외로 장로 내외로 섬기게 하신 것을 기억하시면서 한 번 더 눈감아주시고 덮어주시고, 용서하시고 아내와 자식에게 말씀해 주시고 그걸 하나님이 보시고 계신 거예요.

시편 11편 4절 말씀에 보니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가 하늘에 계심이라. 그 눈이 우리를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는도다."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 것이며 지켜보시는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동행을 하며 어떻게 살아도 천생연분의 관계를 가지려는 장로님과 그 가정을 보면서 흐뭇해 하시는 거에요. 행복해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때로는 기도하지 않았던 기도까지 그 장로님 내외분과 가족들에게 허락해주시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이 해주시는 선물 중에 그러한 장로님 내외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좀 늦어도 같이 가는 은사가 임합니다. 일보다 관계를 더 우선하게 됩니다. ‘아,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실까?’ ‘목사님의 실수를 내가 어떻게 할까? 한 번만 더 덮어야지. 성령이 하실 일인데.’

'장로'라는 단어는 유대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그건 '지도자'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을 다른 단어로 '감독'이라고도 씁니다. '감독'은 헬라적인 문화 근거가 있습니다. 감독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평신도들과 목사를 보살피시고, 그리고 덮어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라는 단어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감독이라는 단어에는 어머니의 덮어주는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단은 교회에 갓 등록한 교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을 건드려봐야 우리 교회에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아픔, 그리고 오해, 분열, 다툼의 90%가 담임목사님과 당회원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당회원들 간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계신 저와 여러분들은 사단의 주공격 대상중 최고의 대상인 것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 됩니다. 큰 일 어려운 일의 최종 결정권은 그저 목사님께 맡겨주세요. 그러나 같이 이야기하다가 합일이 되면 그 일을 구체적으로 맡아서 주님을 위하여 충성하면 더욱 좋을 줄 압니다. 우리는 평생 원수가 아닙니다. 천생연분으로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목사님께 설교권을 주세요. 필요하시면 가끔 인사권도 주세요. 그리고 목사님의 실수를 한 번만 더 덮어주세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귀로만 들었었는데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여생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소망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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