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지금까지 나는 ‘고박’(固縛)이란 단어를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 배웠다. ‘견고하게 단단히 묶는다’는 뜻이다. 선박은 짐을 단단히 묶어야한다. 그런데 세월호는 이제껏 그러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4·16 그날, 맹골수도(孟骨水道)를 만났던 것이다. 때문에 상하이 샐비지는 뻘 속에서 수면위로, 반 잠수선으로, 다시 목포신항으로 구조작업을 이어가면서 계속 ‘고박, 고박’했다. ‘고박’하지 않았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던 것이다.

세월호만 그러한가. 숨 쉴 틈없이 전 국민의 시선을 붙들어 매 놓고 있는 청와대사저, 헌법재판소, 삼성동자택, 서울지검 1001호, 서울지법 321호, 그리고 서울구치소의 수인번호 503호 사건은 어떠한가. 그간 몇 번이나 경고음이 울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비선실세를 꽉 붙들어 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 또한 ‘대통령 위에 누구, 그 위에 또 누구’라는 첩보를 분명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 여성을 고박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다가 결국 참담한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그러므로 고박은 포박(捕縛) 혹은 결박(結縛)과 일견(prima facie) 비슷한 듯하나 전혀 다른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배웠다. 그것은 ‘간섭현상’(干涉現象)이다. 원래 이 단어는 음파·광파·전자파와 관련된 용어다. 쉽게 설명하면 저마다 다른 주파수인데 이게 너무 인접해 있는 경우 송수신에 혼선이 생기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 현상이 바지선과 세월호 사이에 나타났다. 이 둘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면서 자칫 로프가 끊어질 수도 있는, 그래서 구조가 늦어진다는 브리핑이었다. 그러니까 ‘간섭현상’은 제각각 따로 놀면서 상대편에 위해(危害)를 가하는 일종의 거부현상을 일컫는 단어다.

영적항해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먼저, 자신을 고박해야 한다. 내 내면 속에 단단히 묶어놓아야 할 것들이 있다. 꼼짝하지 못하게 붙들어 매 고박시켜야 할 것들, 분명 많이 있다. 이것을 느슨하게 풀어놓으면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내 영혼을 분탕질하다가 급기야 긴 세월 땀 흘려 쌓아온 공든 탑을 한 순간 와르르 무너뜨린다. 이 고박보다 더 중요한 것 있다. 그것은 구조과정에서 간섭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은 침몰한 세월호와 빼 닮았다(요 8:1~11). 한 번, 두 번, ‘뭐 별일 있을라고, 이번 한 번 만이야’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덧 어둠의 삶에 익숙해져 버렸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의 의지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던져졌다. 그런 그녀가 그곳에서 건짐을 받았다. 아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끌어내 주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요 8:3).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저들은 무엇으로 그녀를 ‘고박’하려했던가? ‘모세의 율법’이었다(요 8:5). 율법이란 포승줄로 그녀를 꽁꽁 묶으려했다.

하지만 그건 고박이 아니라 포박이었다. 때문에 서로 간에 ‘간섭현상’ 즉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저들은 여인에게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 여인 또한 입을 닫고 고마운 마음조차 표하지 않았다. 소통이 단절된 이 심각한 간섭현상, 이것은 율법의 한계였다(롬 3:20). 율법은 그 최종목표가 고박이 아니라 포박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구조실패를 자인한다. 나아가 어른들로부터 젊은이들까지도 다 그 현장을 철수해 버리고 만다(요 8:9).

바로 그 현장에서 한 분이 구조작업을 재개하신다. 그분은 우선 몸을 굽힌 후,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셨다(요 8:6,8). 이 인상깊은 액션은 여인을 향한 호기심어린 시선을 멈추고, 정죄를 쏟아내는 입술을 닫으시겠다는 의지적 표현이다. 이게 포박인가? 고박인가? 그렇다. 고박이다. 주님은 지금 사랑의 줄로 천천히 그러면서 단단히 그녀를 고박하기 시작하신다. 이 과정에 ‘간섭현상’이 일어났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 긍휼히 여기는 눈빛이 전달되고 있다. 깊은 대화가 오가면서 긴밀하고 끈끈한 신뢰가 형성되고 있다. 드디어 그 여인은 그 깊은 죄악의 뻘구덩이에서 건져냄을 받았고, 영적 인양작업은 성공리에 완성되었다. 이 현장을 묵상했던 크로스비(F.J. Crosby) 여사는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찬 380)라고 했으며, 이 줄에 묶인바 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고 외쳤다.

한 때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던 자들의 포박된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다. 저들은 평소에 고박을 소홀히 하다가 포박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고박하는 자들이다(갈 5:24).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자들이다(고후 4:10).

고난주간을 열고 있다. 한 주간 주님의 사랑에 꽁꽁 묶이는 ‘고박’이 있기를 바란다. 그 분과의 사이에 그 어떤 ‘간섭현상’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고박하지 않으면 포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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