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23) 교갱협 제10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예레미야 20장 9절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년 동안 교갱협 귀한 사역을 허락해 주시고 은혜를 주셨는데, 저는 올라오면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일은 처음엔 잘 되지만 끝이 안 좋은 일이 많은데, 우리 교갱협은 시작도 좋고 끝도 더 좋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런 마음입니다.

저는 21년 동안 미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서 사랑의교회를 섬기고 있은 지 3년째 들어갑니다. 미국에서 저는 우선순위를 훈련 사역에 두었습니다. 제자훈련 사역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 다음에 설교를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설교 사역을 중심으로 두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사역하는 것은 훈련 사역과 동시에 강단 사역이 굉장히 중요한 것을 느끼면서 요즘 설교 때문에 죽겠습니다. 못 살겠습니다. 제가 서울에 들어와서 허리가 2인치가 줄었습니다. 아실 지 모르겠는데 허리가 2인치가 준 이유가 순전히 설교 때문입니다.

저는 매 주일마다 많을 때는 여섯 번씩 설교를 합니다. 여섯 번 예배를 드리고, 여섯 번 설교를 하고, 또 마지막 찬송 마무리 인도까지 다 하고 그래서 저는 매 주일마다 죽음과 부활을 경험 합니다. 매 주일마다 타오르는 불이 되고, 또 타다 남은 재가 됩니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에는 거의 타다 남은 나무처럼 맥이 빠져서 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에는 월요일 날 달리기도 하고, 조깅도 하고 그랬는데 할 힘이 없습니다. 서울의 공기가 안 좋아서 그런지, 그러면서 설교자, 특히 대형교회 목사는 신 3D 업종 중에 하나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거보다도 설교를 통해서 더 절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큰 교회든, 적은 교회든, 열두 명으로 시작 된 개척교회부터 시작해서 오늘 까지 교회를 섬기고 있고 제가 말씀을 드린 것처럼, 열여섯 살부터 설교를 시작했고 만 스물세 살 때 저희 교단에서는 큰 규모의 대학부라고 할 수 있는 대학부를 섬겼고, 그때부터 설교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20년을 훨씬 넘게 설교를 하고 있는데, 죽을 쑤는 일도 너무 많았고, 요즘에도 우리 원로 목사님만 보면 설교 때문에 주눅이 들고 말도 잘 안 나오네요.

하여튼 설교 때문에 얼마나 짐이 되는지, 전에는 제가 토요일 저녁이 되면 그때가 제일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개척한 교회이니까 '뭐 못하면 어때. 내 마음대로 하지' 주일날 1부는 워밍업하고, 2부는 세게 하고, 3부는 할렐루야 하고 완전히 제 식으로 했는데, 제가 서울에 와 보니 사랑의교회에는 옥한흠 목사님이라는 한국 교계의 설교에 대해서는 거의 모델이 아닙니까? 모델 목사님의 토양에 제가 설교를 한다는 자체가 사실은 불가능입니다. 오죽 하면 제 친구가 "그렇게 옥 목사님의 뒤를 잇다니... 삼가 조의를 표한다."

오죽 하면 이런 상황 앞에서 제가 이것도 문제이지만, 더 이제 본격적으로 설교에 대해서 고민을 합니다. 전에는 토요일 저녁이 미국에 있을 적에는 좋았습니다. 토요일 점심에는 원고가 다 끝나 있고, 토요일 저녁에는 산책도 하고, 음악도 듣고, 제 자신을 재충전하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저녁에는 피곤하니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토요일 밤에도 애를 볶습니다. 어떻게 "주여! 내일 주일 예배를!" 물론 주일을 딱 시작하면 해와 같이 빛나는 얼굴로, 물론 내 생각이지만, 환하게 합니다. 하여튼 설교 때문에 벅벅 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제목처럼 '타오르는 불꽃처럼 설교하기'라는 제목이 사실은 제가 잘 하기 때문에 하는 제목이 아니고 제 소원입니다. 그래서 제 속에 있는 내용들을 여러분에게 나누겠습니다. 나누는 것이니까 같이 고민하며, 가면 갈수록 더욱 부담되는 설교에 대한 내용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제일 큰 명제와 고민은 이것입니다. "설교가 무엇이냐 보다 설교를 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왜 설교를 합니까? 가르치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까? 사역을 잘 하면 잘 할수록 강단 사역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시죠? 사람들의 시선을 매주 한 시간 동안 잡아놓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 설교자 외에 누가 또 있겠습니까? 그만큼 설교자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을 한 시간씩 잡아 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이 힘이 약화되어 있거나, 잊어버렸거나, 낭비하거나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는 어떤 때 보면 주일날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 시간씩, 두 시간씩 차를 타고 와서 눈을 초롱초롱 하면서 저를 쳐다보면서 기대하며, 저의 눈을 주시하는 그 눈을 보면 감격이 있지만 때로는 소름이 끼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시지만 제가 이제 만 오십이 되는데 여러분, 제가 나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젊은사람들 가운데서, 그래도 그 청중들 가운데서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고 경륜이 많으신 분들이 얼마나 많으십니까? 내가 설교자이니까 봐 주는 것입니다. 내가 목회자라고 해서 인정을 하고 들어 주시니 내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지, 세상적으로 나보다 더 훌륭하고 괜찮은 분들이 얼마나 더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설교자랍시고 말을 그냥 툭툭 내어 뱉고 한 마디씩 하는데 사실은 얼마나 두렵습니까? 거기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은 말로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한 것은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저는 설교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설교 때문에 학위 논문도 썼습니다. 아마 설교에 관한 책을 저만큼 갖고 있는 분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에 관한 책을 읽어보면 포커스가 틀렸습니다. 설교에 관해서 정보를 주는 것이지, 설교에 관한 핵심을 찌르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설교를 왜 하는가?' 하는 설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힘든 것입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것은 오늘도 영혼이 죽느냐, 사느냐인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전하는 이 말씀으로 사람이 살고, 안 전하면 죽느냐? 죽는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무지하게 힘든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변화가 목표입니다. 안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훌륭한 설교자는 많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위대한 설교자는 많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시면 정말 그 분의 설교를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변하는지, 아니면 여러분이나 나나 내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변하는지, 변화의 문제를 앞에 놓고 냉정하게 볼 때, 여러분들의 설교 지식이나 이론이나 모든 것을 앞에 두고 볼 때, 내 설교를 듣고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생각할 때 이것은 진짜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함부로 설교하면 안 됩니다. 설교는 메시지입니다. 메시지는 전달이지, 교수가 아닙니다. 메시지는 공부가 아닙니다. 강단은 속죄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사람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를 마음껏 뽑아서 편집해서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를 들어본 사람들은 느낍니다. '그 설교는 들을 만하더라. 그 설교는 배울 만하더라. 그 설교는 뭐가 있더라. 그런데 은혜는 없더라.'

여러분, 이것이 뭔지 이 시대의 어른들의 하시는 말에 경종을 들어야 합니다. 잘 하는 설교, 조직적인 설교도 다 필요하지만, 무디는 문법적으로 다 틀린 설교를 했지만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가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벅벅 기는 것이 아닙니까? 제10차 교갱협 수련회를 하면서 저희들이 전하는 말씀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은혜가 없더라'가 아니라 전하는 메시지마다 은혜의 기름이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거룩한 일이지만, 거룩한 사역이다. 그리고 위대한 일이면서, 부담스러운 사역이다. 축복된 일이지만, 지극히 부담스러운 사역이다. 저에게는 설교가 활기와 역동력도 주지만, 저의 힘을 다 앗아가는 일입니다. 저를 활활 불타오르게도 하지만, 저를 소멸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너무 좋아하지만, 설교를 너무 싫어하기도 합니다. 모순 같지만은 이런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저는 월요일마다 타다 남은 나무와 같습니다. 주일날 더 뜨겁게 탈수록, 더 뜨거운 확신과, 더 분명한 비전과 소명을 갖고 말씀을 전할수록, 월요일은 마치 바닥까지 타버린 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옥 목사님과 저하고는 될 수만 있으면 서로 설교를 안 하려고 싸웁니다. 희한한 일입니다. 다른 교회는 원로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싶어 하시고, 서로 하려고 하신다는데 옥 목사님은 그렇지가 않으십니다. 심지어는 저와 약속하고 설교하시기로 하셨지만 설교하시기 한 주일 전에 “오 목사, 나 아프다” 하실 때는 저도 정말 미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정말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오죽하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불타오르는 일이기도 하지만 소멸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하실 것이 너무 많아서 머리에서 술술 나오고 하신답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가 너무나 즐겁답니다. 그래서 설교가 힘들다고 하는 그 이유는, 설교자가 혼자서 다 해먹으려고 하기 때문에 일부러 힘들다고 하는 거랍니다. 그런 말을 하는 젊은 목사들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도 저 나름대로 설교를 수없이 해서 설교가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점점 더 무거운 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감이라는 것,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그 사람의 기대를 채운다는 것, 그것도 매 주일마다 저 부흥집회 같은 것도 잘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나이 들어 홀로 되신 할머님하고, 설교 못하는 목사님하고의 공통점, 영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매 주일마다 영감을 가지고 설교한다는 것, 정말 듣는 입장에서 이 말씀을 듣고 삶의 변화를 느낄 만한 엑기스가 매 주일마다 주어져야 한다는 것, 내 입장에서 좋은 설교, 그저 좋은 말을 하고 던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러나 저에게 가장 힘든 것은 다음 주일에도 이 큰 짐을 다시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이 힘든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아무도 없는 곳에 도망가서 피하고 싶습니다. '아이스케키 장사나 할까?'

그러나 놀라운 것은 다시 주일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제 속의 저의 영은 다시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저는 매 주일 하나님의 손에서 새롭게 타오르는 횃불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설교자로서 받은 소명이 있는데 내가 설교하지 않는다면 더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이겠지요.

그래서 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오늘 예레미아서입니다. 20장 9절 예레미아가 우리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뼈 속에 불과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두려운 일이지만 해야할 일이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내 생명을 불타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는 특권인 동시에 부담이요, 좋아하기도 하지만 싫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짐입니다.

놀라운 것은 20여 년을 본격적으로 말씀을 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일부러 썼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더 높아지고, 부담감이 더 예민해지고, 더 날카로워지고 있습니다. 설교에 대해서는 열정과 고통의 복합 현상의 양면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쨌든 매주 월요일에는 돌아오는 주일까지 걸어가야 하는 두렵고도 거룩한 길이 저희 앞에는 놓여 있습니다. 강조합니다. 설교는 일이 아닙니다. 사역도 아닙니다. 설교는 직업이 아닙니다. 여러분, 설교는 타오르는 불입니다. 소명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날마다 이 불을 타오게 할 수가 있습니까? 불이 되어 타오르다가 다시 재가 되고, 변함없는 설교자로서의 은혜의 믿음을 어떻게 유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만병통치약 내지는 계속 승리하는 비책은 없습니다. 제 개인의 계속적인 승전보는 없습니다. 그저 남은 것은 '어떻게 하면 잘 해볼까' 아니 '좀 더 잘 해볼 수 없을까' 하는 강박증 내지는 그저 '어떻게 하면 잘해 볼까' 하는 기도의 제목, 혹은 수첩에다 매일 적어놓은 메모지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 계속 불타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일 좋은 방법은 이것입니다.

 

첫 번째, 집중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계속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집중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계속 연습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단어를 주목해 주십시오. 집중한다는 말과 의지한다는 말과 연습. 특별히 '집중'한다는 말과 '연습'이라는 두 말에 주목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왜 집중이 필요하냐? 그만큼 방해물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강의 부탁을 받고 정말 안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것이 아니어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꼭 도살장에 끌려오는 소처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원고를 준비하는 데도 얼마나 방해물이 많은 지 모릅니다. 여러 가지 방해 요소들이 많은 가운데서도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어떻게 할까?

그러면서 저는 예수님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계속되는 방해물 가운데서의 사역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항상 방해받으셨습니다. 눈먼 자들을 통해서, 문둥병자들을 통해서, 밤에 갑자기 찾아온 바리새인, 귀신들린 아이를 구해 달라고 찾아온 아버지, 간음한 여인, 38년 된 병자, 향유를 붓는 여인, 이렇게 항상 방해받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집중력 있게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대해서 레위인을 알 것입니다. 레위인도 방해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방해받는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을 놓쳐버렸습니다. 너무나 방해받는 것에 대해서 몰입을 하다가 보니,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해서 뭐가 중요한 것인지도 모를 감각까지도 다 놓쳐 버리지 않습니까? 저는 저 자신 나름대로의 해결책은 이 모든 방해물로부터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것에 헌신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제가 이것을 준비하는 가운데서 계속 전화가 오곤 했었습니다. 그 방해물로부터 내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찾겠다고 헌신한 후로는 어떤 전화가 오느냐 하면, 김병보 집사님이라고 최근에 회사 사장인데 자기 사원에게 콩팥을 제공하신 분이십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이십니다. 속으로 '내가 이런 교우들에게 설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이 되나' 물론 또 부담이 되었지만, 그러나 제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방해물을 방해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기로, 집중하기로 연습하는 방향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통찰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사역에 있어서 '불꽃처럼'이라는 말을 쓰기가 조금은 거창하기는 하지만, 그 말을 쓸 수 있도록 저 나름대로의 은혜가 되었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내가 하는 어떤 사역을 통해서도 더 나은 사역, 더 나은 결과, 더 나은 일을 주님이 요구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나의 섬김과 나의 사역을 통해서 주님과의 집중력 있는 더 나은 관계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설교도 부담도 되고 힘도 들지만, 이것을 통해서 주님과의 더 나은 관계가 내게 내려주신 기회이고, 축복이라고, 의도적인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지금까지의 과정의 역사를 보면, 그래도 5년 전 보다는 지금이, 10년 전 보다는 지금이 주님과의 더 나은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도적으로라도 연습하면서 주님과의 더 나은 관계에다가 집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과의 더 나은 관계를 위해서, 매일매일의 방해물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헌신을 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주님과의 더 나은 관계가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인데 하나는 QT이고, 하나는 기도생활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여러분들이 잘 하시니까, 한달 전에 CCC 전국수양회를 하는데 제가 강해하면서 바로 앞에 박성수 장로님이 간증을 하시는데, 그 분이 올해까지 34년째 경건의 시간을 계속 지키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34년째 계속 경건의 시간을 하니까 가면 갈수록 경건의 시간의 소중성을 느끼고 있고, 성경적 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시더랍니다. 그러니 주님과의 더 나은 관계를 위하여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도생활이겠지요? 그래서 그 분은 회사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회사에 만들어 놓은 기도실에 새벽 4시 반에 출근을 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제가 볼 때는 사람마다 다 특징이 있습니다. 성격이 내향적인 분들은 조용하고 명상적인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의 더 나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 같고, 성격이 외향적인 분들은 철야기도나 통성기도와 같은 폭발력이 있는 기도를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생활 가운데 내향적이든 외향적이든, 주님과의 더 나은 관계를 위하여 자기의 약점을 보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은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런 성숙한 사람은 자기의 강점은 개발시키고, 자기의 약점은 보안하려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령의 인격적인 능력을 통해서 사람을 성숙시키고, 사람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을 다듬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 하나는 은사적인 측면, 사역적인 측면에서 전도하게 하며, 선교하게 하며, 기적을 일으키며, 한 시대를 바꾸어 놓는 그런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도 있습니다.

제가 리처드 포스터 같은 분을 만나보고 하니 기도라든지, 생수의 강이라든지, 내면이라든지, QT라든지 이런 것들을 잘 하시는데, 그 분을 보니 영적으로 깊이가 있고 너무 좋습니다. 제가 그 분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이 분이 전도를 열심히 하겠는가? 이 분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겠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조금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다 안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 가지고 그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사역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가진 강점만 가지고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완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좀 성격이 내향적이고 부족한 스타일이라면, 통성기도라든지 합심기도라든지 사역적인 면에, 외적인 관심을 기울여서 폭발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사는 모습이 필요하고, 또 성격이 외향적이어서 하나님의 폭발적인 사역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내면의 인격에 대해서 보완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의 보완을 가질 때에 의도적으로 헌신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쨌든 방해물조차도 방해물로만 생각하지 말고 내 영혼에 신선한 산소를 불어넣어 불이 다시 타오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불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한데 물과 바람과 땅입니다. 이것은 제가 추상적으로 썼는데 물은 말씀의 물이라고 생각하고, 바람은 성령의 바람이고, 땅은 토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물과 성령의 바람과, 이 말씀과 성령으로 절제된 메시지가 살과 뼈의 토양인 땅 속으로 흡수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계속 불처럼 타오르기 위해서는 말씀의 메커니즘이 물처럼 자연스럽고, 생수같이 스며드는 토양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물과 바람과 땅을 제가 이렇게 한번 해 보았습니다. 말씀이라는 물, 성령의 개입하심, 그리고 또 하나 토양, 그래서 이것을 저는 깊이와 영감과 전달, 이 세 가지 문제가 저에게는 늘 하나의 화두였고, 집중적인 연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고 계속 이 불을 타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말씀의 물처럼 생수처럼 날마다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저는 강해설교를 굉장히 많이 강조하고 주장하는 신학교에서 4년을 공부했습니다. 그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것은 많이 있지만 요약을 하자면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원어 분석이었고, 주해고, 강해입니다. 원어 분석의 핵심은 원문 연구입니다. 이 원문 연구의 핵심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주의해 주셔야 합니다. 모든 성경이라는 말과 모든 성경, 하나님의 감동,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든 성경, 하나님의 감동!

그래서 이 말씀 가운데서 집중되고 은혜를 받았던 것은 성경에 의하면 저자가 영감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원문이 영감을 받았습니까? 이것에는 신학적인 차이는 좀 있겠습니다만, 여기에 의해서 설교자의 확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불꽃처럼 계속 타오를 수 있느냐, 아니냐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저자가 영감을 받았습니까? 원문이 영감을 받았습니까? 원문에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보면 '모든 성경'에서 글자 글자가, 원문이 한 책 한 책이 감동받았습니다. 물론 저자는 성령에 의해서 통제받았습니다. 그러나 영감은 한 책 한 책, 원문이 받은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깨달아지고 난 다음부터는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요즘 진보주의 학자라든지, 더구나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성경해석에 대한 것들이 많이 난무하고 온갖 많은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 가운데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했을 때 원문이, 성경이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는 이 사실로 인해서 저를 불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한국말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영어로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구약은 히브리어고, 신약은 헬라어입니다. 구약의 에스겔서의 부분과 다니엘서의 약간의 아람어를 빼어놓고 구약은 몽땅 다 히브리어고, 그 다음에는 헬라어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우리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다 모른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어느 정도 헬라어로 스터디와 리서치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원어 분석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성경의 원문이 영감이 되었다고 확신하는 담임목사 밑에서,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은 적어도 성경이 한 책 한 책, 원문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목사님 밑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을 성도들이 확신할 때, 그래서 원문에 대한 확신이 없는 목회자가 확신 없는 성도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가 능력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그 자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주 우리는 그런 유혹에 빠집니다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내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원문 자체가 성령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절대로 타협하면 안 됩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비롯해서 온갖 것들이 지금 더구나 진보, 통일, 이런 것들이 나타나서 온갖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타협할 수 없습니다. 몰라도 적어도 한번은 원문을 리서치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두 번째는 주해입니다.

주해에 대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이 주해에 관해서 저에게 제일 도움이 되었던 것은, 우리가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본문을 보는 안목입니다. 저는 일년 동안 계속 훈련을 받은 것이 '프로(pro)'와 '콘(con)'이었습니다. '프로'라는 것은 이 본문에 관해서는 이런 견해에 찬성하는 사람, '콘'이라는 것은 이런 견해에 관해서 반대하는 것. 그래서 어느 정도의 기본적으로 괜찮은 주석가라든지, 괜찮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천 년 동안 그 본문에 대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프로'와 '콘'을 정확하게 해서, 심지어 이 대해서 제대로 강해설교하는 신학교에서 만든 주석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균형 있게 보는 시각, 이것이 주해에 있어서 중요한 안목입니다. 균형감각을 제대로 가지고 보는 시각. 모든 본문에 대해서 반드시 수많은 '프로'와 '콘'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관찰과 해석과 적용의 단계를 거치는 것입니다. 특별히 관찰에 있어서는 내용 관찰에서 적용의 왕도가 따로 없고, 관찰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다 아는데 우리가 문법적 역사적, 구속학적과 같은 많은 것들을 공부했기 때문에 다 압니다. 이 적용에 관한 것들은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한국 분들에게 제일 약한 것은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주자학의 영향을 받아서 선지후행의 영향이 우리에게 너무 크기 때문에 지행합일에 대한 개념이 각각이 약한 것을 늘 고민하면서, 익스포지션에 대한 안목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런 것들이 말씀의 깊이에 관해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영감에 대해서입니다. 성령의 개입하심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저에게는 자신의 스타일을 잘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저의 성향이 어떤 것인지, 내향적인지, 다혈질의 성향인지, 무엇을 통해서 이것을 보완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특별히 영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21세기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는 영성과 감성과 체험의 시기는 이제 듣는 복음의 시대가 아니라 보는 복음의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진리를 외치면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능력을 보여줘서 진리를 증명하는 시대로 바뀌어졌습니다.

요즘은 볼 것이 너무도 많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와라!" 하면 왔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오지를 않습니다. 제가 1990년 정도 되었을 때 중국이나 러시아에 가서 설교를 하면, 두 시간쯤 설교를 하고 내려오면 사람들이 막 화를 냈습니다. 설교를 너무 오래 해서 죄송하구나 싶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더 길게 하지 않는다고 화를 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러시아나 중국에 전도지 하나만 나누어 주어도 이 사람들은 너무 자세히 읽었습니다. 볼 것이 너무도 없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러시아나 중국에 볼 것이 너무 많습니다. 삼성하고 엘지에서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팔아서 볼 것이 너무도 많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능력을 보여줘서 진리를 증명하는 시기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었던 동안에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청소년 아이를 둔 엄마가 "얘야, 오늘 교회 가자" 그러니까 "엄마, 교회 안가" "왜 안가니?" 그 아이의 하는 말이 "엄마, 교회 가서 10불 헌금하지?" 10불이면 만 원입니다. 그 때 그 아이가 한 이야기인데 "엄마! 10불 내고 볼 게 뭐 있어?" 그 다음 말이 걸작인데 바로 근처에 디즈니랜드가 있었는데 그 아이 하는 말이 "디즈니랜드도 입장료가 50불인데, 10불 내고 볼 게 뭐 있어?"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시면 조금 곤란합니다. 듣는 복음의 시대가 아니라 보는 복음의 시대입니다. 보여줘서 진리를 증명하는 시대로 바뀌어졌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기도의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올라갈 때에 기도를 많이 하고 올라가야 한다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제가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집회를 한번 하는데 저녁집회였습니다. 식사를 모시고 하려는데 저녁집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식사를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날도 또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러시냐고 물었더니 옆에 계시는 분들이 저녁식사를 안 하신다고 합니다. 하루에 보통 몇 시간씩 기도하시냐고 물었더니 많을 때는 5시간, 적을 때는 3시간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제가 슬쩍 약이 올랐습니다. 나는 집회 가면 저녁 먹는데... 그래서 제가 "목사님, 3시간씩 기도하고 강단에 서고, 5시간씩 기도하고 강단에 서면 어떻게 됩니까?" 말씀하시는 답이 걸작이었는데 "3시간, 5시간씩 기도하고 강단에 서면 온 몸이 찌릿찌릿 하지." 전기가 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씀을 누구에게 또 해준 적이 있습니까?" 그러자 빌리 그래함에게 해줬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사람도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는 두 시간씩 기도하고 설교하면 어떤가를 물어보니 미국사람은 약간의 과장이 있으니 온 몸이 붕~ 뜬 것 같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무슨 말인지 아실 겁니다.

김삼환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한번 하셨는데, 사람들이 집회 기간 동안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자훈련을 하면서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뭐가 은혜가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기억이 안 납니다. 기억이 잘 나는데 은혜가 안 되는 집회와 기억이 안 나는 데 은혜 되는 집회와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습니까? 비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분들이 잘한다 못한다를 떠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영감에 관해서는 내가 영감이 있다, 없다가 설교자가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영감이 있다, 없다는 것을 회중들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강단에 서기만 해도 은혜가 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서기만 해도 은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 같은 교역자인데 어떤 사람은 은혜의 기름이 떨어지고, 어떤 사람은 은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이것을 인격이라고 해야할 지, 기도의 깊이라고 해야할 지, 은혜의 역량이라고 해야할 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내용들이 저에게는 성령이 개입하시기 위해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제자훈련을 하면서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하는 모든 은사는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모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은사를 안 주신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윽박지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믿고 구원받고 또 설교자로서, 소명자로 부르신 우리들에게 성령께서 누구나 주시는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장 9절에 그 말은 육이 영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육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영감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영이 육을 통제하는가! 어떻게 하면 성령이 나를 통제하는가? 어떻게 하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나를 통제하는가? 하는 이 문제가 내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말도 잘못하는 남쪽 출신인데, 제가 만 스물 세살 때 서울 내수동교회 첫 설교를 부탁받고, 설교를 하고 내려오니 못 알아듣겠답니다. 이유가 뭐냐? 말이 너무 빨라서랍니다. 이런 사람을 오늘까지 사용하시는 분 앞에 내가 얼마나 감격이 되든지요? 제가 그 당시에 얼마나 곽선희 목사님, 박조준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말 천천히 또박또박 "조용히 하라우야~" 하면 다 조용히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남쪽 출신이라 "쫌 조용히 해주이소. 예?" 하면 아무도 조용히 안 합니다. 이런 한계가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신다는 사실 앞에 하나님께 무언가 말할 수 없지만 영이 육을 지배하는 것이 저에게는 기도의 제목이 될 수 있었고, 기름부음이 있는 찬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부르는 찬양. "아멘 주를 찬양하나이다. 주 영광 여기 임하사~" 우리 교회에서 예배 시작할 때 부르는 찬양입니다. 영이 육을 지배하는 것, 영이 육을 통제하는 것, 그것이 저에게는 크게 와 닿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영의 생각을 거스르고, 영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을 거스르고, 육신의 사람은 육신의 생각을, 영의 사람은 영의 생각을 하고,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고,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 이 둘 중에 어느 것 하나가 폐퇴하기 전까지 내 삶에 진정한 평안은 없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 성령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으면 강단 올라가기전에 할 수 있으면, 토요일 저녁 성령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도록, 육체의 소욕이 아무리 힘들다 할지라도 할 수 있으면,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을 통제할 수 있도록, 지배할 수 있도록 성령의 개입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깊이와 영감의 문제입니다.

 

다음이 토양의 문제입니다.

토양의 문제에 있어서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저는 토양의 문제는 의사소통과 관계된 것이고, 전달에 관한 문제이고, 또 청중과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청중을 제가 분석하라는 개념 보다는 청중의 입장에서의 메시지의 교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갖습니다.

쉽게 말하면, '청중의 입장에서 메시지가 어떻게 들릴 것인가?' 요즘 저의 제일 큰 화두입니다.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어떻게 잘 할 것인가가 아니라 '청중의 입장에서 어떻게 들릴 것인가?' 설교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성도들의 입장에서 설교를 미리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교우들의 관점에서 설교를 들어보시고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부터 저 혼자 버릇이 하나 생겼는데, 저 혼자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교회에 가서 교회 뒷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토요일이나 금요일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실에 앉아서 상상으로 제가 하는 설교를 들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제가 얻는 유익은 내가 설교해야 할 부분과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저께 새벽 2시에 기독교방송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본의 아니게 제가 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1년 반 전에 한 설교가 나오는데, 보면서 참 많이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주일에 여섯 번 설교할 때가 많은데 1부부터 6부까지 설교가 많이 달랐습니다. 1부는 원고를 중심으로 많이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빼야할 부분을 빼지 못하고 설교할 때도 있어서 제 설교는 6부와 많이 다릅니다. 설교는 복사가 아닙니다. 복기입니다. '복기'란 바둑용어인데 특별히 젊은 설교자들에게 부탁합니다. 제대로 설교하시는 어른들의 설교를 복기해 보십시오. 그대로 모방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의 강점과 기름 부으심과 유형과 은사와 중요점과 깊이와 전달에 대해서 한번 복기를 해 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전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가 저에게는 음독의 가치였습니다. 제가 이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자주 하는 하나가, 조선 오백년의 한자 음독이 중국 오천 년의 한자 실력을 이겼다고 합니다. 여러분, 조선 오백년 한자 음독이 무엇입니까?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황 집우 집주.... 어릴 때 이 천자문을 외웠던 것이, 음독으로 한 것이 중국 오천 년 한자 실력을 뛰어 넘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독의 파워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이 음독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을 때 경험했습니다. 제일 첫 주 같은 경우에는 쟁쟁하신 분들이 오셔서 설교를 하시는데, 한번은 로이드 오길비라는 분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분은 지금 미국의 상원의원이신데 그 당시에는 헐리우드제일장로교회의 담임목사님이셨는데 거의 완벽하게 설교를 했습니다. 강단에서 그의 동작하나 하나와 그의 음성은, '배우'라고 여길 정도로 너무 완벽하게 멋진 설교를 했었습니다.

제가 마치고 난 다음에 개인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왔는데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설교를 잘하느냐?" 하고 물으니 "비밀인데" 하고 말하는 것이 자신은 초창기 시절에 설교 원고를 완벽하게 작성해서 아홉 번을 소리 내어서 낭독을 했답니다. 다른 것은 다 필요가 없고 아홉 번을 소리 내어서 낭독을 하면, 그 소리 내어서 낭독을 하는 가운데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빼야 하고, 내 설교가 너무 영감이 없구나, 내 설교의 단어가 너무 신선 하지 못하구나, 내 설교에 클라이막스가 없구나, 서론이 너무 평범하구나 , 결론이 너무 약하구나, 아홉 번을 소리 내어서 음독을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독할 정도의 자기 연구를 통해서 그와 같은 설교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음독을 일곱 번까지는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 보니 확실히 저의 약점과 부족한 점이 다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공부를 할 때 시편을 매일 다섯 편씩 소리내어서 낭독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 보니 굉장히 중요하게 히브리어가 이미지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자면, 화자와 청자의 구조 이해입니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인체 구조적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1분 동안에 125 내지는 150 단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듣는 능력은 1분에 거의 500 단어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화자와 청자의 사이에 350 단어의 공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350 단어의 공백을 채우지 못한다면 그 시간에 청중들은 멀리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온갖 공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350 단어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래서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교회 설교자들 가운데 강력한 설교자들, 또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힘이 있는 설교자들의 대체적인 공통적인 특징은 말이 빠른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외로 앵커나 아나운서의 말을 듣고 시간을 재어 보면, 아나운서의 말이 굉장히 빠릅니다. 우리들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런데 그 아나운서의 말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나운서들은 말 끝을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약점이었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호남 사람도 그렇지만 말 끝이 어리버리한 것입니다. 말 끝이 어리버리하면 뭐가 뭔지 못 알아듣습니다. 350 단어의 공간을 카리스마로 채우든지, 미국 같은 경우는 설교 노트로 채웁니다. 지금도 릭 워렌은 그의 설교 노트가 있습니다. 적어도 설교의 대가들은 썼다 하면 그 분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200 단어를 채우는 것입니다.

또 그 분을 사모하는 설교자가 강단에 서면, 죄송하지만 웬만한 교회에는 매니아들이 있습니다. 그 분은 서기만 해도 300 단어는 채워집니다. 그런데 그 어떤 카리스마도 영감을 주는 것도 없이 느려터지게 1분에 70 단어 정도를 말하게 되면 다 졸게 됩니다. 이 350 단어의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에 말씀하신 것은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이 공간을 효율적으로 장악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의사 소통의 토양은 실패입니다. 이 내용들이 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토양을 가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신실한 설교자들을 제 앞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하루에 네 시간씩 본문을 보는 설교자를 보았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3절에 보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1분, 2분의 설교를 위해 한 시간 이상을 투자하고, 30분 설교에 30시간을 투자하는, 한마디로 제가 이름을 붙이기를 '위대한 성실성!' 이것이 바로 목자의 심정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30분, 1시간, 2시간씩 차를 타고 예배드리러 온 이 영혼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스승과 아비를 비교하면 스승이 더 지혜가 있고, 스승이 더 학식이 뛰어나고, 스승이 더 똑똑 합니다. 아비는 부족합니다. 어머니와 간호사를 비교하면, 조산실의 간호사가 훨씬 더 아이를 낳는 것에는 똑똑하지만 그러나 아이는 엄마가 낳습니다. 자식은 아버지가 키웁니다. 왜? 엄마와 아빠에게는 목자의 심정,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빌립은 없는 200 데나리온의 돈을 다 대었지만 안드레는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았습니다. 가난하지만 자식을 많이 가진 부모의 심정입니다.

저는 개척교회 목사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는 힘들었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제가 힘들어서 못 먹는 것을 보면서 "너 굶고 있어라" 하고 넋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자식을 먹여볼까 온갖 것을 다 찾아서 다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대언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언어 실력도 부족하고, 어떤 분들은 많은 것들을 설교를 위해서 준비하려고 할 때 많은 것들이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식을 내가 한번 먹여 봐야지. 우리 성도를 변화시켜 봐야지. 제대로 키워서 제자 만들어 봐야지. 한 생명에 목숨 걸어 봐야지' 하는 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7월 19일 파리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 비행기에서 신문을 일고 있는데 특집이 나와 있었습니다. 조엘 오스틴이라는 지금 미국에서 최고로 부상하는 한국에 '긍정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책도 번역되어 나와 있습니다. 농구장을 고쳐서 1만 6천 석이 되는 교회를 목회하십니다. 신문에 쓴 기자의 마지막 글이 제 마음을 때렸습니다. 기자의 글은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대형교회는 깊이가 없고, 또 깊이가 있다고 하는 교회는 청중을 모으지 못한다.” 

내가 어떤 목사님을 압니다. 깊이 있는 설교를 너무 잘 하십니다. 그런데 청중은 없습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 왜 사람들이 모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면서도 왜 깊이가 있으며 안 됩니까? 한국교회의 강단이 제자훈련을 통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영적 메카니즘을 제대로 형성하고 난 다음에, 깊이가 있으면서도 영혼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까? 깊이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모일 수가 없습니까? 깊이가 있으면서도 사람이 변화될 수가 없습니까?

오늘 교갱협 10주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선배님들, 사랑하는 후배님들,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되 깊이와 전달과 영감과 사람들의 변화가 잘 어우러져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일들을 이루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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