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8/22) 교갱협 제6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저는 몇 달 전에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집회를 했습니다. 이 분이 집회를 하는데 저녁마다 식사를 안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왜 식사를 안 하냐고 물으니까 설교하기 전에 기도를 해야 설교가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켜보니까 최소한 3시간, 많을 때는 5시간씩 기도를 하셨습니다. 저도 집회하면서 기도하긴 하는데 3시간, 4시간 해본 적은 별로 없기 때문에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만 그런 게 아니라 계속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집회에 이민교회의 전무후무하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제가 조 목사님께 며칠 뒤에 물었어요. "목사님, 3시간쯤 기도하고 강단에 올라가면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3시간 기도하고 강단에 서면 온몸이 찌릿찌릿해요"라고 하세요. 영어로 얘기하면 Spiritually Electrify 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지 설교하는 분들은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 하여튼 말씀 듣는 가운데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조 목사님께 이것을 다른 사람한테도 얘기한 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빌리 그레함 목사님께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도 기도에 대한 도전을 받고 두 시간은 기도한다고 합니다. 두 시간 기도하니까 빌리그레함 목사님은 온 몸이 붕 떠있는 느낌이라고 했답니다.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를 보면 대부분 불신자들이 많이 오는데, 불신자들이 예수 믿을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는 영적인 당당함이 생겼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균형에 대한 얘기하며 영성에 대한 균형, 사역에 대한 균형을 서론 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조 목사님 집회를 하면서 장로교 합동 개혁주의 신학을 훈련받은 목회자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약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떠나가라" 명령기도도 잘 못하잖아요. 저는 마음이 약해서 "주여!" 삼창 기도도 제대로 못해봤어요. 그저 귀신아 떠나가라, 떠나가면 좋겠사옵나이다. 솔직히 이런 입장 아니에요?

우리는 구름 위에 살고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집회하고 변화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만에 베다니로 갔습니다. 가서 제일 먼저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마리아를 만났어요. 마리아를 만났는데 "믿으면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하니까 마리아가 "부활의 영광중에 우리 오라비도 살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좀 이따가 마르다가 나타나더니 예수님을 보는 순간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살았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셨어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치유와 기적과 표적과 은사가 미래에 일어날 일만이 아니고, 과거에 있었던 사실 행적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이 순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 목사님이 본인은 본인의 폐병이 절대로 나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성경을 보는 순간 성경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살아났다고 합니다. 만약 처음부터 교회를 나갔고, 목사를 알았다면, 병이 안 나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참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어요. 핵심은 2,000년 전의 병이 지금도 있습니다. 2,000년 전의 슬픔, 상처도 지금 있어요. 심지어 2,000년 전의 천사, 귀신도 지금 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의 기적,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과 능력과 은사가 앞으로 일어나야 할 일, 과거에 있었던 일로 족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루어질 일이 아니겠습니까? 옳고 그르다를 떠나서 저희들이 가지지 못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늘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성령론과 교회론에 관한 한 다 안다는 것 자체가 교만이라고요. 균형을 잡고 부족한 것을 보완하면서 굳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사상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오래 가지 못하는 거 같아요.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민족종교를 100년 만에 바꾼 나라는 우리 민족밖에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부분의 나라가 아시는 대로 기독교 국가로부터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그런데 유일하게도 우리 한국만 비기독교국가인 일본으로부터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과거 일제 강점기 때의 2천 5백만 인구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1-2%도 되지 않았습니다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믿지 않는 99%의 사람들이 자기들은 교회를 안 나오고 안 믿어도 예수 믿는 것이 애국애족하는 것임을 나름대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아시는 대로 북한에서 제일 존경받았던 고담 조만식, 민족의 사표였는데 장로님이었어요. 남강 이승훈, 월남 이상재, 심지어 해외 지역에서도 추앙을 받고 있었던 도산 안창호, 문암 이승만 등등 제헌국회를 할 때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고 기독교적 영향력이 컸습니다.

저는 한국을 오면 서울의 곳곳마다 네온사인의 붉은 십자가가 바다로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합니다. 저는 어릴 때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쟁이 지나간다고 돌멩이로 맞기도 하고 했습니다. 저희 부친은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 지역에서 교회가 영광스럽고 단단했습니다.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교회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베트남이 공산화 통일되기는 했지만 호치민을 보십시오. 30년 동안 그는 신앙도 없었지만 불란서군과 미군들과 중국군과 싸울 때, 역사 앞에서 서 봐야겠다는 마음가짐 하나 가지고 마음으로 싸웠어요. 불란서 특무도, 홍콩 경찰도, 중국 사람들도 호치민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이 가슴 아픈 현실 앞에서 제자의 도, 현실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온전한 사람을 키우겠다는 자세로 역사의 길목에서 민족 앞에서 붙잡을 수 있는 사역의 깃발을 하나님께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교회는 중국 칭화대학 출신 조선족 3세를 중국 사역을 위해서 키우고 있습니다. 그에게 중국이 저렇게 발전하는 이유와 공산화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던 그 원인을 들었습니다. 모택동이 다한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인물을 알게 되었어요. '진독수'와 '이대수'라는 빼어난 사상가들의 영향으로 모택동이 출현했고, 그리고 모택동과 함께 21명이 처음 모여서 공산당을 창당함으로 근현대 중국 역사가 바뀌어졌다는 말을 들으면서 변화된 한 사람이, 사상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사람이 나라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결국 우리의 영성이 우리 사역의 밑바탕인데, 우리 교회 산하 사역의 흐름에 나타나는 영성의 흐름을 살펴보고 균형감각을 가진 영성을 봅니다. 그 다음에 또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전체 흐름을 통해서 본 균형감각을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아날로그 시대에요. 그리고 다음 세대는 디지털 시대에요. 우리 시대의 특징은 뭐냐 하면 듣는 것이 익숙해요. 듣는 것이 익숙하다 보니까 잔소리가 많아요. 그런데 디지털시대의 특징은 보는 것이 익숙한 시대에요. 어른들이 잔소리를 많이 하면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말고 삶으로 보여 달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한 십자가', '헌신한다', '고생한다’라고 하면 마음에 딱 와 닿잖아요. '주님을 위한 고난과 헌신이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을 지킨다.' 이것이 마음에 와 닿지만 십자가를 지라고 디지털 세대한테 물어보면, 자기들은 십자가를 목에다 걸고 다닌다고 생각한다는 거에요. 십자가를 지라고 그러면 목걸이를 뒤로 넘긴다는 거예요. 우리와는 개념이 완전히 달라요. 그들은 B.C와 A.D가 나눠졌죠. Before Christ가 아니라 Before Computer 시대에요. 우리하고는 완전히 달라진 시대에요.

저들을 시대에 맞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고 균형감각을 가지고 역사의 길목에서 일 할 사람으로 빚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균형감각입니다. 저는 처음 시작할 때 교회 밖 선교단체와 교회의 균형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강점, 고난을 이기는 신앙과 열정, 헌신, 희생, 이런 거죠. 서구교회의 강점은 정직과 성실과 합리성이고요. 동양은 예지나 사색적 깊이가 있고, 서구는 실용주의, 합리주의 같은 것이 있죠. 사역의 균형은 영성의 균형에 대한 것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세속적 물질주의의 영향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깊은 영성을 통해 해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영성을 한 일곱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묵상을 강조하는 영성이 있습니다. 영성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도시의 삶을 도피하여 수도원을 세우고 고독과 묵상과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 영성을 세우는 길은 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결한 삶을 강조하는 영성이 있습니다. 거룩성, 성결성을 강조했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죄악된 습관에 대한 척결의지가 강했습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요한 웨슬레와 그를 따랐던 성결클럽이 대표적인 성결한 삶을 강조하는 영성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죄의 문제를 엄숙히 다루었고 성결한 삶에 이르는 독특한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강조한 것은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으로 개발되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성령을 강조하는 영성입니다. 물을 필요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의해 빚어지고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성령은 진정한 영성을 이룩하신 하나님의 대행자임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회라든지, 퀘이크교도 같은 경우인데, 대표적인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예수를 믿지만 성령체험 혹은 제일축복을 통하여 참된 영성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영성이 있습니다. 아시시 성 프란시스부터 시작해서 월드비전과 같은 현대구호기관에 이르기까지 교회사의 많은 인물들은 그들의 삶을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위해서 이전의 풍요한 삶을 완전히 포기했고 또 일상의 삶 가운데서 의식적으로 이런 고난의 행군을 패턴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여기서 주장하는 올바른 영성은 가난하고 헐벗은 자를 위하여 예수님이 걸어 가셨던 본과 교훈을 따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특수한 사역을 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저희 부친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교회를 개척하셨기 때문에 제가 이것에 대해서는 아주 실감이 갑니다. 중요하죠.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한국의 일반 사회 앞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의 이미지가 대체적으로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영성을 가진 분들이 기독교의 대표적인 것처럼 드러나기 시작하는데요. 전통적인 목회를 신실하게 하는 이런 분들의 이 특수한 사역과 동시에 전통적인 목회를 통하여 균형 잡힌 영성을 가지고 묵묵히 흘러가는 사역의 뒷받침도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말씀을 강조하는 영성입니다. 종교개혁자들, 특히 요한 칼빈과 마틴 루터는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며,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과 인도하심이라는 확신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이분들은 평신도들이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접근할 수 있음을 피력하였고, 이것이 결국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 영성을 꾸준하게 계발하는 노력의 문을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의 왕같은 제사장직을 강조하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특권을 훈련시켜서 가톨릭과의 차별화를 성공한 영성의 강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훈련을 강조하는 영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성의 개발은 특수한 공식적인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전통에서 사제 훈련, 로마 가톨릭 사제단을 가보면 개인방에 샤워실이 없습니다. 미국의 세인트 메리 칼리지 같은 가톨릭 대학이나 신학교들이 각 지역마다 여러 군데 있습니다. 사제들 방에 개인적인 샤워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즐거움이나 이런 것들을 철저하게 막는 편입니다. 훈련이죠.

그 다음 일곱 번째 공동체적 삶을 강조하는 영성입니다. 러시아의 베네딕트는 처음에 묵상과 은둔의 삶을 통한 영성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검증된 삶의 필요성을 깨닫고 나서, 그의 이름을 따라 베네딕트회라고 불리게 될 수도원식의 믿음의 공동체를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자신의 주위에 모으심으로 보여주셨듯이 참 영성은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서 개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일곱 가지 방법을 보았는데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조 목사님 순복음의 영성을 보면서 내게는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고민해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일곱 가지 중에서 어느 것 하나만 강조해도 괜찮을 만큼 지난 2000년의 교회사가 얄팍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2000년 간 신약의 교회사는 어느 것 하나만을 강조할 만큼 그렇게 치우치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강점과 약점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독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할 때 균형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묵상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매일 맞이하게 되는 현대 세상의 필요를 잊고 있을 수가 있고, 성결을 주장하는 거룩주의자들은 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잊을 수 있으며,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구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성령의 은사주의자들은 은사를 지나치게 찾다가 은사를 주신 분을 잊을 수도 있으며, 사회운동가들은 사회정의에 초점을 맞추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잊을 수도 있고, 말씀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필요성을 간과할 수도 있고, 고행과 훈련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즐거움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생활의 옹호자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독교 지도자들도 영적인 훈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여전히 양무리 중의 한 사람임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은 그렇습니다. 참 영성의 계발, 모든 균형 잡힌 영성의 계발은 제자의 도와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참 영성의 계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정상적인 성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삶이 곧 영적인 삶입니다. 우리 모두는 물질적인 측면과 비물질적인 측면을 소유한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전인격적인 성장을 이룩할 때가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예수님께서도 지성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감정적으로 균형 있게 성장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참된 영성의 계발은 제자의 도와 연결되고, 현재의 삶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을 '제자의 도'라고 정의하고 싶은데, 이 정의는 균형 잡힌 영성과 나름대로 일치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균형 잡힌 제자의 도는 요한 칼빈이 갈라디아서 4장 19절의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까지"에 대해 말한 것을 예로 들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형성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빚어져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고 다른 표현으로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태어남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생명으로 살며, 그분을 균형 있게 닮아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귀한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균형 잡힌 제자의 도는 첫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경험하고, 두 번째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한 대가를 지불하고, 세 번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고, 네 번째 성령으로 능력을 공급받으며, 다섯 번째 삶 전체가 매일매일 개발 성숙되어지고, 여섯 번째 믿음의 공동체에서 검증을 받고, 일곱 번째 세상 속에서 매일의 삶의 현장 가운데 적용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제게로 와 닿기 위해서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하면, 지성과 영성의 균형이었어요. 균형 잡힌 제자의 도는 지성과 영성의 조화를 어떤 식으로 이루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교회사에서 가장 탁월한 지적, 영적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회심하기 전에 마니교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이 마니교에서 나온 이유가 모니카의 기도의 후원도 있었지만, 그 마니교가 어거스틴이 가졌던 의문에 대해서 대답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당한 식견의 지식인이었던 어거스틴의 대해서 마니교의 지도자였던 파우스투스가 어거스틴의 지성적, 지식적 의문에 대해서 답을 해줄 줄 알았는데 결국 못해줬습니다. 나중에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섭리로 로마서 13장을 통해서 그가 회심했다고 생각하지만, 엠브루스 감독이라던지 콘티타누스 같은 교부들을 통하여 어거스틴의 지성적 의문과 회의의 문제들이 그대로 해결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어거스틴은 암부르스 감독과 같은 분들과 함께 신앙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지성에 대한 균형을 갖춘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 지성의 깊이가 어거스틴의 회심과 성장의 큰 요소로 작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에게 있어서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갖추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두 구절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에 나타난 내용과 베드로전서 3장 14절과 15절입니다. 저는 신학교를 4-5군데를 다녔는데 제가 M.div를 한 신학교와 Th.M을 한 신학교가 큰 흐름으로 볼 때는 동일하게 복음주의적인 흐름에 있었지만, 조직신학 같은 것을 공부하는데도 참고서적들이 하나도 같은 책이 없었어요. 큰 흐름이 복음주의의 내용 안에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우리의 신학도 자칫 잘못하면 외골수가 되기 십상이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두 구절 로마서 12장 1-2절, 베드로전서 3장 14-15절 간단하게 요약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이것이 저의 열쇠였거든요. 이 구절은 개인과 교회의 제자훈련에 있어서 훈련의 정의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 확실한 성경의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인 통찰력으로 깨닫게 해주는 귀한 본문입니다.

여기에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헬라어로 '아나카이노시스'입니다. 이것은 아주 직설적인 뜻인데 '새 것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노우스'라는 단어 아시죠? 단순히 'heart'가 아니고 지성과 이성과 이해의 기능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된 지성과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것을 많이 강조하고 외우다 보니까 이 구절의 독특함과 새로움일 잊을 때가 많습니다. 바울은 얼마든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다른 영적 변화의 중요성을 언급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혹은 계명의 순종, 성도의 교제와 예배의 은혜 등등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지성의 변화, 이해의 변화,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오늘 이것이 우리에게 와 닿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포함한 지성의 변화야말로 신앙의 성품을 결정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다듬는 것이 영적 변화의 중심부가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지성 마음이야말로 지속적인 영적 성장 과정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변화할 수 있겠느냐? 저의 경우는 변화된 지성과 마음으로 제자훈련 목회를 통해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이것이 지성적인 면에 더 다가올 수 있도록 제 변화된 마음을 갈고 닦을 수 있는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저에게는 찬양 같은 것들도 그렇게 와 닿을 수가 없어요. 요즘 아날로그의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무엇이냐면 찬송을 할 때 가락에 익숙한 시대에요. ‘내주는 강한 성이요’ 이런 것들이 아직 익숙해요. 디지털 시대의 젊은이들은 리듬에 익숙한 시대에요. 지금 젊은이들의 노래를 어른들 입장에서는 거의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그런 찬양이 있는데 그 앞에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이런 찬송을 하려면 거의 40대 이상으로는 무리입니다. 이게 따라가지를 못해요.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 주 말씀이 선포되고 또 주의 종 모세의 때와 같이 예배가 회복되네 비록 전쟁과 기근과 핍박 환란 날이 다가와도" 여러분, 거의 랩 수준 아닙니까?

그런데 시대를 초월해서 지성을 연마하고, 지성에 대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감정적인 부분까지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데 제게는 찬양 같은 것도 큰 도움이 되요. "하나님, 사색적 깊이나 생각의 통일 정도만 되지 않게 하시고 이것이 영성과 연결되는 부분으로 균형 있는 지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영감의 찬양 속에 흐트러진 마음과 지성을 하나님 앞에 새롭게 하고, 은혜로 재충전할 수 있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4-15절 넘어가 보시죠. 우리에게 변화된 지성을 제시해주는 것이 있는데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여기에 소망에 관한 이유 헬라어로는 '라가스'입니다.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 헬라어로 '아폴로기아'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균형 잡힌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문과 영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폴로기아'와 '로고스' 이 두 단어가 매우 중요한데, '아폴로기아'는 법전과 같은 장소에서 증거를 제시하고, 반대공격에 대처함으로서 변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전도할 때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에서 지성을 무시하지 않고 이성적인 논리를 제시함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권면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을 보면 심지어 이교도 철학자였던 아라스투스 같은 사람을 인용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의 제가 읽었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성적인 논리의 중요성에 대해 건의 정도가 아니라 명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 명령형이었습니다.

'로고스'는 어떤 믿음을 위한 이성적인 증거, 혹은 논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 모두가 무엇 때문에 믿는가에 대한 이성적인 논리와 이유를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단 온유와 두려움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을 강조하면서 감정 싸움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베드로에 대해서 한 가지 마음속에 각인된 은혜가 뭐냐 하면, 사도행전 4장 13절을 보면 유대장로들과 관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볼 때에 본래 학문이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균형 감각이 없는 영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자의 삶은 마치 반지성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많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이 없었다고 얘기했지, 그들이 비지성적이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식했다고 말하고 있거나 비이성적이고 지성의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베드로와 요한이 공식적인 랍비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에 초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30년 뒤에 그가 베드로전서 첫 서신을 썼을 때 그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의 서신을 읽었을 때 그의 지성과 영성의 대단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무식한 어부 베드로가 이 교양 있는 헬라어의 용법을 쓰면서 베드로 서신을 썼겠느냐고 저자성을 부인하는 정도까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3장 15절을 자신에 대한 채찍질과 충고로 받아들여서 사도행전 4장 13절, 그의 초기 사역에서 이 서신서 쓰기까지 약 30년이 경과하는 가운데 지성에 관해서도 '아폴로기아'와 '로고스'에 대해서 지독한 절차탁마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건강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자신에 대한 지성에 대한 개발에 전적인 헌신을 했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흩어진 헬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서신을 쓸 무렵에는 지성과 영성이 잘 조화되어 있던 것입니다. 균형 잡힌 지성은 인간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기본적인 도구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숙과 발전을 위한 기본적인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진리는 우리의 지성을 통하여 표출되어진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용하는 지성은 능력이 있고, 하나님 안에서 계발된 이성은 소중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70년대, 80년대 대학 캠퍼스의 부흥을 경험했던 이유는,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그들의 지성적 기초 위에 복음의 열정을 접목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그런 정체성이 없어져 버렸어요. 역사의 강점을 이어받아야 해요. 그 강점을 이어받지 못하고 과오를 되풀이하면, 우리는 역사의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캠퍼스가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의 지성을 리드할 수 있을 정도의 가치관을 보여줘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저는 도올 김용옥을 보며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올은 통나무라는 말이거든요. 진짜 통나무 같은 그 인생을 향하여 왜 기독교가 할 말이 없냐는 겁니다. 김용옥 한 사람 때문에 피 묻은 복음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졸지에 조롱거리가 된 이 가슴 아픈 사건 앞에,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이룬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반박할 사람들이 그리 없었던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현대판 엠브로스와 현대판 어거스틴과 현대판 바울은 없던 것인가! 독일의 신학자들이 썼던 성경 비평 방법으로 그가 얄팍한 마니교의 파우스투스와 같은 인물임을 파헤칠 인물이 없느냐 이 말입니다. 압도하는 지성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능력있게 논증할 사람들이 오늘 이 시대에 없느냐 이 말이에요. 우리가 다 못하더라도 이런 사람들을 한국교회가 키워서 사회 앞에, 역사의 길목에서 매니지먼트만이 아니라 창조적인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을 말할 사람이 없느냐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가 안 되면 우리 다음세대라도 이런 사람을 키워주시길 바랍니다.

새로운 지성과 깨달은 마음이 되기 위하여 저는 이 시간 이사야처럼 노래하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도와줄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 학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제자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아침마다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침으로 곤핍한 자를 위로할 수 있는 성숙한 제자됨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 한국교회에 다시 한 번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거스틴부터 시작해서 존 스토트까지 하나님께 제대로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지성에 대한 통찰력을 가졌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1년간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문법적으로,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구속학적으로 명확하게 풀었습니다. school of alexandria가 있었습니다. 필로와 오리겐을 통하여 알레고리컬하고 풍유적인 해석이 풍미할 때에 철저하게 school of 안디옥 출신들, 바울과 바나바 이후로 어거스틴, 엘리콧이 위클리프, 존 스토트 이런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이루어 왔는데, 우리 시대 때에 이것을 도외시하고 역사 앞에서 빛나는 깃발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은사가 없는 것보다도 영성과 지성의 조화를 위하여 나름대로의 절차탁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깨닫는 한국교회에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저는 조지 보우라는 OM국제선교회 총재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대단한 지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단한 열정과 헌신과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저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에서 개인적으로 그가 지성적으로 대단한 학위를 가진 빌리 그레함을 영적인 아버지로 모셨고, 빌리 그레함의 삶과 책과 테이프를 들으며 오스왈드 J 스미스를 멘토로 삼고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리고 100여 명의 다른 사람들이 모델이 되어서 감사하다고 했어요. 41년 동안 그와 함께한 그의 아내에게도 지극한 애정을 표현한 것을 보았어요. 그가 저에게 내 인생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고 20가지를 보내왔어요. 다시 얘기합니다만, 그가 지성적으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베드로처럼, 또 바울과 같은 선교적인 마인드를 가졌습니다. 그가 말한 20가지, 그냥 핵심만 듣고 느껴보십시오.

1. 매일 규칙적인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찬미와 예배를 드린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즉시 얘기하고 감정이 서로 상한 상대가 있으면 즉시 사과한다.
3. 성령께 자신을 의탁하여 성령이 모든 행동과 태도를 주관하시게 한다.
4.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동기가 된 복음의 은혜를 규칙적으로 전한다.
5. 사람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훈련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꾸준히 개발하고 시행한다.
6. 개인적인 기도와 중보기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시간을 내어 그룹기도 사역에 동참한다.
7. 하나님의 사람들과 지역교회 지도자들을 격려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은사를 동원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참된 친구가 된다.
8. 개인적인 죄와 실수에만 민감한 것이 아니라 단체, 국가의 죄와 실수에도 적극적으로 민감해야 한다. 인종차별, 물질만능주의, 불평등과 위선, 악법들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주의 교회가 사회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9. 언제나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비전과 필요성을 과감하게 도전한다. 특히 무슬림 지역에서.
10.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특히 기독교 서적과 잡지에 대한 전반적인 공부와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11. 마음을 다해 남들이 나보다 더 낫다고 여기고, 특히 비전의 동역자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12. 육체의 정욕에 대한 모든 모양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싸울 수 있는 대책을 생각해 둔다. 자신의 약점에 대해 진실하게 공개하고 항상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3. 내 혀가 얼마나 빨리 자주 죄를 지을 수 있는지를 잊지 않는다.
14. 요한1서 2장 1절의 말씀을 언제나 묵상하여 죄와 실패의 자리에 있게 되면 빨리 벗어나려고 실제적으로 노력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15. 매스컴과 인쇄물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기회가 있는 대로 이것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복음과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한다.
16. 예수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되어 주님을 위한 고통과 고난을 감사로 감당토록 성장하기를 원한다.
17.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있으면 재빨리 용서하고, 가능한 한 모든 방법과 자원을 써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같이 지어간다.
18. 많은 극단론과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계와 분별력을 위해 계속 관심을 갖는다.
19. 비판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의 훈련을 한다.
20. 모든 삶의 현장에서 성경적인 기초를 에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능력이 실제화되는 것을 삶의 우선순위가 되도록 한다.

조지 보우가 균형감각에 대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으면 이런 명품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 한국교회나 우리 세대와 젊은 세대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균형감각을 가지고 어느 것 하나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시대를 꿰뚫을 수 있도록 저와 여기에 오신 목사님들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사역에 대한 균형입니다. 미국교회의 흐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미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교회 앞에서 그대로 흘러간다고 할 수 있는데요. 세계교회의 사역에 대한 균형입니다. 최근 저희 교회에 한국의 잡지사에서 한 자매가 와서 일주일 동안 취재하고 갔는데, 미국을 처음 온 자매였어요. 그런데 교회 취재도 하고 미국 전체를 두 주간 쭉 훑어보고 간 후에 저에게 이런 이메일이 왔어요. "목사님, 제가 미국을 둘러본 후의 소감은 우물 안의 개구리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만 알면 그게 제일인 줄 알고 큰소리 치는데 세계 흐름을 보니까 자기가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뭔가 제게 와 닿더라고요.

사역의 흐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사역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주님과 동행하게 하고, 온전하게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게 본질입니다. 특히 각 세대마다 제자 삼는 일을 다가오는 파도처럼 세대마다 효과적으로 발전하고, 재정비할 수 있도록 안목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온전한 자로 만드는 제자의 삶에 대해서 본질은 똑같지만, 진부하지 않게 사역의 흐름이 어떻게 되는지를 나름대로 안목을 가지고 볼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민족 앞에서 큰 그림을 그리려는 입장에서, 이 시대에 특별한 흐름을 살피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역의 단순한 평행선을 그리지 말고 유기적 방향으로 전진해 가는 내용들을 보면서, 새로운 사역에 대한 강점과 약점들을 눈으로 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지금 사람을 키우는 의미에서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네 가지 흐름을 가지고 있어요. 첫째는 성인 주일학교였어요. 그 다음은 일대일 양육이 있었어요. 지금 노도강풍과 같이 영향을 끼치는 소그룹에 관한 것도 있고요. 그런데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Spiritual Formation, '영적 형성'이라고도 하고 '영성 형성'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로 닮아 가는 전인격적 영적 형성!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역을 위한 전인격적 영적 형성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인 주일학교, 일대일 제자양육, 소그룹, 영적 형성, 이 네 가지 흐름에 나름대로 안목을 가지게 되면, 영혼들을 섬겨갈 때에 균형 잡힌 감각을 가지고 사역에 헛발질하지 아니하고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고 봅니다.

먼저 제 1물결인 성인 주일학교입니다. 이것은 침례교가 굉장히 강했습니다. 이 성인 주일학교라는 것은 과거 한국교회의 장년공과공부가 한국교회에서 토착화된 것인데요. 지금도 시골교회에 가면 하는 곳이 있지요. 여기의 도구는 교사와 교실과 교육 커리큘럼이었습니다. 강조점은 성경 전체에 대한 정보입니다. 기독교 교육이란 전체적 흐름입니다. 교리가 있습니다. 주입식입니다. 연역적 방법입니다. 2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1부 예배에 와서 성인주일학교에서 공부하고, 1부 예배를 마친 사람은 2부 예배에 그랬습니다. 약점은 집중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재정산이 없는 지식입니다. 성경 지식에는 효과적입니다만, 영적 변화를 경험하게 하는데는 약점이 많았습니다. 교사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의존적입니다. 획일적입니다. 과거 중심입니다. 역동적인 인생관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했는데 듣는 것에만 익숙했습니다.

두 번째는 일대일 제자훈련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 익숙했습니다. 도구는 훈련된 제자들이고 특수커리큘럼이었습니다. 한국의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많이 했지요. 저는 일대일 양육할 때에 저희 리더한테 Principle 영적 원리, 비전, 순결, 헌신, 구원의 확신, 승리의 확신 등등의 영적원리가 있었는데, Definition Statement, Illustration, How, Why, Application까지 하나의 과정 중 이거 하나 받으려고 어쩔 때는 수업도 내팽개치고 가서 리더가 Principle 하나 전수해 준다고 하면 눈이 빨개져서 사모하고, 오매불망 언제 한번 저거 받을 수 있나 했지요. 미국에 와서 알고 보니 64주 양육과정 안에 다 들어가 있더라고요. 제가 얼마나 억울했던 지요.

일대일 양육의 강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강조점은 원리 확인입니다. 암송하고, 큐티하고, 전도하고, 도덕적인 순결도 강조합니다. 약점은 젊은이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삶 전반에 걸친 적용성과 점진성의 결여입니다. 교회론과 성령론이 약합니다. 젊은이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성인 교회의 문턱을 못 넘었습니다. 심오한 기독교의 세계관이라든지 영성 훈련이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영적 성장에 대한 안목은 넓혀주었습니다만, 훈련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이중적 구조까지도 있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소그룹입니다. 도구는 훈련된 리더와 네트워크입니다. 영적 성장과 공동체 구축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인적 성장 과정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소그룹에 대해서는 말이 많으니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 형성입니다. 이것이 미국에서는 네 번째 물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닉 테일러 목사가 쓴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들을 말씀드리고 제가 느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M.div를 한 신학교에서는 Spiritual Formation의 석사과정이 생겼습니다. 또 Spiritual Formation을 위한 Ph.D 과정을 개설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자훈련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나의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7년 동안 영적 형성, Spiritual Formation의 거대한 물결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영적 형성은 회심 후의 정비작업이 아니다. 형성은 지식과 습득된 행동을 넘어서 역동적인 관계로 우리를 이끈다. 이것은 우리를 독특하게 설계하고 부르시는 하나님과 연결시킨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속으로 우리를 통합시킨다. 이것은 우리를 성경과 지식적인 것을 넘어선 관계로 이끌어준다. 이것은 생명을 주며 문화적으로 상관성이 있고 분명히 실용적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다른 모델들, 성인 주일학교, 일대일 양육, 소그룹들을 포용하면서 보다 더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균형 잡힌 기독교인들의 삶의 순례에 보다 더 넓고 온전한 그림에 초점을 맞춘다. 철학으로서 Spiritual Formation은 존재에 관심을 둔다. 이것은 외부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변화와 한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로 중요한 발전에 관심을 가진다."

제자훈련식으로 말하면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지키게 하는 것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한다는 것입니다. "전략으로써 영적 형성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일상생활 가운데 믿음을 발견하고, 일깨우고, 이해시키고, 깊이가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고려해 보아라. 단기든 장기든 소그룹은 신자들의 훈련에 있어서 매우 소중하다. 그리고 주중에 티칭이라던지 클래스룸과 같은 형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지역사회 구성원들에게 보다 덜 위협적인 접촉점을 제시할 수 있다. 예배를 포함해서 다른 요소들도 영적 형성의 기술에 추가될 수 있다. 균형 잡힌 영성 생활은 침묵과 고독의 영적 생활에서 보다 익숙한 단체 찬양과 노래까지 다양한 예배 형식을 탐구할 것이다."

특별히 앞으로 훈련과 영성의 자원 중에 하나가 예술에 대한 것입니다. 심지어 닉 켈러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예술 박물관은 적은 양의 조사만으로도 생명력이 주어지는 깊은 종교적 의미와 배경을 가진 작품들로 넘쳐 있다. 영감을 주는 음악과 도전을 주는 연극, 마음을 사로잡는 춤, 심금을 울리는 영화, 이런 것들은 사용되어지기를 기다리는 영적 형성을 위한 훌륭한 도구들이다."

저는 개혁주의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 예술과 영성 형성을 위한 안목입니다. 여러분 3, 4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쉬리'나 '친구'가 500만, 700만 명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변화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그 영화를 못 봤어요. '신라의 달밤'도 못 봤습니다. '엽기적인 그녀'도 못 봤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왜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시대 앞에 강력한 파도와 같은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요? 우리가 Spiritual Formation의 입장에서 나름대로의 그릇을 가지고 이들을 퍼 담아야 되는 거예요.

"나는 예술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 다음 세대의 사람들을 위해서요. 목사의 나이가 들어가도 교회는 젊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한국교회를 보세요. 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 중등부 100명 모이잖아요. 비극도 그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미국교회 같은 곳에는 Spiritual Formation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 내에서 제자 만들기를 넓히고, 풍성하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옳고 그르다를 떠나서 이런 흐름들을 보면서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의 약점은 자칫 잘못하면 행사화 될 확률이 높습니다.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보십시오. 그래도 젊은 세대에 어필하는 사람을 보세요. 현대 예술 감각에 나름의 안목을 가진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나 제자훈련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행사화될 가능성이 높아요.

영성의 위기에 대한 균형 감각, 영성의 마음밭, 하루아침에 위기를 맞는 사람은 없다. 참된 용서가 없는 곳에 위기가 온다. 그 정도 생각하시고 위기에 대한 대안, 사역의 기본은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모든 영권은 희생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능력의 원천은 저는 희생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마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5년 안에 거대한 세대교체의 폭풍이 일 것입니다.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언제든지 세 가지 형식을 통해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지금까지 믿고 신뢰해왔던 가치관에 변화를 통한 의식구조의 개혁입니다. 동서독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시작되었던 동유럽의 이데올로기 변화가 바로 그러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변화의 형태는 조직구조로 개혁을 통한 변화입니다.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조직의 구조개혁를 통한 변화입니다. 한국 경제가 IMF 자금을 받아쓰기 시작하면서 수동적으로 시작된 구조조정이 이런 변화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으로 리더의 변화를 통한 체제의 변화입니다. 미국 같은 경우는 클린턴에서 부시로 대통령이 바뀌면서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백악관은 대통령과 그 주변사람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도덕적 가치관과 경제적 사안에 따라 미국인들의 구석구석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클린턴은 올빼미 형입니다. 밤 11-12시까지 부엌도 문 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시는 early-bird형입니다. 밤 10시에 무조건 잡니다. 그리고 부시는 휴가를 한 달씩 갑니다. 대신 자기의 책임소재를 분담시킵니다. 그래서 부시 주변사람들은 무진장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다 맡기죠. 그런데 클린턴은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가 워낙 똑똑하니까 자기가 다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너무 많이 쌓여서 인간 같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대통령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리더를 통한 체제의 변화였습니다.

5년 내로 한국교회에 큰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텐데, 한국교회의 문제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손위의 세대가 세대교체를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이것을 한 번도 경험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거에요. 저희 이민교회만 봐도 언제 1세대가 물러가나 보는 2세대들이 많아요. 그러나 사역이라는 것은 변화를 추구할 때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한계를 느끼니까 그것만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 스스로 한계를 느낀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이에요. 자기를 돌아보는 거니까요.

그러나 변화를 추구할 때는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설정되어 있어야 해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세대교체를 할 때 모세가 늙어 힘이 없었기 때문에 교체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모세의 건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34장에 보면 모세가 죽을 때에 기력이 쇠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변화에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서 이제부터 가나안 정착으로 전개되는 분명한 목적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광야세대로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광야에서 보낸 여호수아에 대한 처음 언급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기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갈 때에 그 종 여호수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와 운행하심을 직접 체험한 신앙을 소유한 다음 세대가 모세 밑에서 충실히 배우고 준비한 겸한 인격을 소유한 다음 세대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난관을 직시한 다음세대가, 가나안 앞에서 출애굽을 뒤돌아보며 내일을 설계할 수 있는 준비된 세대가 바통터치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면에서 사역자에게 은퇴라는 말은 부적절한 말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사역 은퇴를 하지 않았습니다. 순교로서 막을 내렸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은퇴에 대한 적용적인 해석은 목회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지자적 양심과 순교적인 열정과 각오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도적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요? 그게 숙제에요. 1세대가 가진 고귀한 점이 있습니다. 강점을 살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1세대의 강점을 살리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디지털 시대에 광야 시대가 지나갔으면 가나안 땅에서의 사역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요. 과거는 정보를 목사 혼자 독점했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역사의 길목에서 한국교회가 감당할 일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가 한국사회를 향해 무엇을 Claim 할 것인가. 사회로부터 요구만 받지 말고요. 여러분, 저의 고민과 눈물은 전 세계 만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가 우리 민족을 향해서는 공식적으로는 한 명의 선교사도 파송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통일을 진보에게 맡기지 말고, 보수적인 신학을 가진 복음주의 교회가 민족 앞에서 무엇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를 최근에 읽으면서 어떤 면에서 복음주의 신학으로 정리해볼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매니지먼트만 하지 말고 창조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역사의 길목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말뚝을 박아야 합니다. 복음주의 교회가 너무 좀팽이처럼 되지 말고 하나님 나라 역사에 굵은 정체성을 가지고, 영성의 흐름과 말씀 앞에서, 세계 복음주의 흐름사에서, 역사 앞에서, 교회 앞에서 무슨 사역을 해야할 것인가? 건강한 제자의 도를 가지고 복음주의 이 시대의 윤동주를 만들고, 백범을 만들고, 그래서 우리 교갱협이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맥박을 뛰게 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사랑하는 목사님들에게 평생 균형감각을 가지고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통하여 제자의 도를 우리에게 모두 주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성인 주일학교, 일대일 양육, 소그룹, 전인적 영적 형성의 세계교회의 흐름 앞에서 뒤처지지 말고 특별히 감성적인 디지털 시대를 안아서 가나안 땅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을 더하여 우리 한국교회 지금 겉으로 볼 때 한국 사회가 망할 것 같지만 망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가 교회를 위하여 시대를 위하여 구국제단을 쌓고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교회와 북한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과거의 함석헌 씨가 씨알사상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할 수 있도록, 균형 잡힌 사람들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역사적인 소명을 가진 명품들을 만들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겠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