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차] 교회 안에서 여교역자의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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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교회 안에서 여교역자의 사역
  • 강명옥 전도사
  • 승인 2000.08.2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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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8/22) 교갱협 제5차 영성수련회 여성사역자특강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천사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사역을 맡겨주셨습니다. 자다가 깨어서 생각해 보아도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냥 덧없이 살다가 끝낼 수 있는 인생에 하나님께서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사역지를 주시고 여교역자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헌신할 수 있게 하심이 참 감사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라고 봅니다. 과거와는 달리 여성의 위치가 많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를 “핑크칼라”라고 말을 하는데 이 뜻은 여성의 시대가 우리 가까이 다가왔다는 말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것들이 기계화되어 있고 그 기계들이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딱딱한 기계 속에서 따스함을 찾기를 원하고 무엇이든지 원터치로 다 이루어지는 세상 속에서 인간적인 정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요즘은 가면 갈수록 여성들이 활발하게 일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절감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 들어가 보면 여교역자와 남성 사역자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사랑의교회 안에서 보면 그런 팽팽한 긴장감 없이 사역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 간절한 열망은 모든 한국교회가 이렇게 바뀌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교역자로서의 고유한 특징을 잘 살리면서 교회 안에서 남성 사역자들과 함께 동등하게 사역하면서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고 좋은 하모니를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제가 많은 여교역자를 만나면서 느낀 점은 피해의식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해의식은 우리의 사역을 더욱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능력있게 해나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 피해의식이 치유되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비교의식 속에서 힘들어하고 그 힘든 문제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해의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의식으로 살아야 하고, 또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의 부족한 부분 때문에 힘들어하기보다는 비교한 그 가운데서 나의 부족을 부단히 주님 앞에서 채워나가려고 하는 열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간 옆의 사람들과 이렇게 인사합시다. “전도사님(혹은 목사님)은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두 사람 이상에게 꼭 그 말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하는 이 의식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볼 때 작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고 저 또한 저 자신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시편 139편 14절을 읽는 중에 하나님이 저를 신묘 막측하게 지으셨다는 말씀 앞에서 많은 눈물을 쏟게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편40편에서는 하나님이 저를 생각하시는 그 생각이 너무나 많다는 그 표현 앞에 내가 그 수를 세려고 해도 셀 수 없을만큼 하나님은 저를 생각하는 것으로 가득 차 계신다는 그 말씀 앞에 눈물을 많이 쏟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계시고 나를 생각해주시고 나에게 집중하고 계시구나. 그런가 하면 나를 신묘 막측하게 지으셨구나. 60억 인류 중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걸작품으로 지으셨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볼품없이 지음 받았어도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은사와 달란트를 따라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그리고 나에게 있는 좋은 점들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면서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고 나눠줘야겠다는 생각을 해가기 시작했습니다.

 

1. 성경적인 여성의 위치

(1) 예수님과 여성의 위치

예수님은 여자들 주위에 계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여성들과 계속되었고, 또 예수님의 마지막 장래를 준비했던 사람이 여성인 것을 보면 예수님과 여성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당시 랍비들은 회당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교육받는 것을 남녀 모두에게 허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여행에는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기록을 보면서 예수님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8장1절에서 3절에 보면 여성들을 전도여행에 동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할 때 12제자가 함께 있었고 또한 악귀를 좇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야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한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여성을 전도여행에 동반한 이 사실을 보면서 우리의 사역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에서 끝에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에서 ‘섬기더라’를 헬라어 원어로 보니까 ‘디아코네인’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말로 ‘섬기다’, 또는 ‘봉사자’, ‘집사’라고 불리는 ‘디아코노스’와 같은 어근을 가진 동사입니다. 근데 이 ‘섬기다’라는 말이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됨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가는 제자됨의 특징을 마가복음 15장 14절에서 ‘따르다’, ‘섬기다’를 병행해서 사용하면서 제자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8절 이하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여기서 ‘발아래 앉아’ 라고 하는 이 단어가 사도행전 22장 3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가말리엘 문하에서’라고 하는 그 말과 동등한 단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누구누구의 제자로서’ 라고 하는 의미의 헬라어 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아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된 그런 위치에서 예수님의 문하생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반적인 사회풍습은 여성에게는 손님접대하는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그 일을 게을리하고 여자가 랍비의 제자로서 행동하는 일은 당시 랍비문헌에는 거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적으로는 마리아에 대한 마르다의 비난이 옳지만 예수님은 마르다의 비난을 깨뜨리시고 마리아를 칭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은 당시 일반적인 남녀의 역할을 전환시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랍비의 제자로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마리아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8장1절에서 11절에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도 당시의 사회 풍습을 깨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남성중심의 사회제도 속에서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율법을 가지고 그 여인을 처형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으로는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신 독특한 법으로 처리하셨는데, 마태복음 5장 28절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먼저 치라고 하신 그 말씀이 음욕을 품고 여인을 본 일이 없는 자가 돌을 들어 여인을 치라고 한 의미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여성이기 때문에 부당하게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자의 편에 서서 당시 사회 풍습을 깨뜨리시고 여성을 다루셨다는 것을 볼 때에 우리의 사역이 얼마나 귀중하고 중요한가를 느끼게 됩니다.

 

(2) 초대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마가의 다락방에 사도들과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마가의 다락방에 사도들과 제자들이 모였을 때 여성들이 없다고는 아무도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여성들이 모였다고 하기도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여성들이 그 자리에 모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하기 위해서였고, 오순절 성령이 임한 후에 보면 사도행전 5장 14절에 남녀의 큰 무리가 주께로 믿고 나아왔다고 되어있습니다. ‘남녀의 큰 무리’라는 말은 초대교회에서도 여성의 위치가 무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가 자기 집을 공개했던 사실을 볼 수 있고, 또 루디아가 사도행전 17장 4절, 12절에 귀부인들과 함께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고, 바울의 사역에 동역자라고 표현되어 있는 브리스길라가 언급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또 초대교회 당시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성의 탁월함을 나타내는 놀랄만한 말씀이 로마서 마지막장에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26명의 명단이 나옵니다. 그 중에 8명이 여성인데 이것을 보면 여성의 초대교회에서의 사역은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런가 하면 16장 3절에 브리스길라를 자신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이 동역자라는 표현은 가르침과 선교사업에 함께 동참한 사람이라는 표현이라고 성경해석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브리스길라는 정말 바울을 위해서 아굴라와 함께 목숨까지도 줄 수 있을 정도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울 중심으로, 그것은 바로 주님 중심으로 자기의 삶의 목표가 세워져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에서도 여성의 위치는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배와 여성의 위치는 어떠한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5절, 14장 34~35절, 디모데전서 2장 12절 등을 통해서 보면 여성의 문제 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의 여성의 문제, 그리고 예배에서 여성의 위치는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때 당시에 여성들은 틀림없이 예언의 은사를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은 아들에게는 물론 딸들에게도, 자유인이나 노예나 이방인이나 누구에게도 임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사도행전 2장 17~18절을 통해서 봅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행전 21장 9절에 보니까 빌립에게 예언하는 딸 넷이 있다는 표현이 나와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영적 은사를 가진 여인들이 공중예배에서 은사를 발휘했으리라고 상상해 봅니다. 이 가운데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으면 바울이 두 가지 여성에게 제재를 하는데, 첫 번째는 복종이라는 문제와 두 번째는 잠잠하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복종의 이 문제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 보니까 수건을 씀으로써 복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잠잠함의 문제에 대해서도 복종의 원리와 남녀의 차이에 대한 연결을 말씀하시면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와 타락의 사건에 근거를 두고있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뵈뵈의 사역을 보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뵈뵈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했습니까? 그는 재물이 있는 사람으로서 지역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예배와 여성의 위치, 복종과 잠잠함의 문제를 가지고 생각을 해봅시다. 왜 복종을 해야합니까? 지금 다른 교단에서는 여성에게도 목사안수를 주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한 생을 살다가는 인생이고 하나님 앞에 가서 섰을 때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왔느냐?’라는 질문보다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날 동안 얼마만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역을 하다가 왔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안수를 받아서 목사가 되든지 안되든지 그건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여성으로 지으셨을 때는 여성사역자로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사역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자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나님이 창세기에 말씀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돕는 자’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을 저는 여성사역자들에게 이렇게 적용해보고 싶습니다. ‘돕는 사역’이다. 그러면 돕는 자가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왜 돕는 자가 필요할까? 남자목사님들이 할 수 없는 그 일들을 여교역자들이 메워주고 여사역자들이 도와줄 때에 교회는 아름답게 지음을 받을 수 있고 주님의 몸된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지위나 대우, 나의 인격이 무시당하지 않는 그런 위치에서 일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생각이 많다는 것을 시편 40편에서 느낄 수 있지요. 그리고 우리를 신묘 막측하게 지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부분을 채우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굶기고, 괴롭고 고통 가운데서 짓밟힘을 당하면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아름다운 계획들을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앞장서서 나의 권익에 더 발이 빠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직분에 대해서 많은 부분에서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직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헌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통합측 목사님 한 분이 통합측으로 교단을 옮겨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면 당장 목사 안수를 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이 그걸로 저를 유혹하신다면 조금 잘못 짚으셨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교회에 여자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여자 목사님이 전도사로 있을 때하고 목사안수를 받아서 목사님으로 있을 때하고 성도들이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목사라는 단어가 주는 권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함과 동시에 또 교회 안에서도 대우가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시는 동안 누가 주님에게 어떤 대우를 해주는 가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한 생을 사는데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직분이나 나의 위치,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를 이 자리에 세우셔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그것을 바로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생은 결코 헛되지 않은 생이 될 것입니다.

 

2. 여성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1) 예수님은 여성의 영적 능력을 인정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은 여성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셨을까요? 여성은 정말 남성보다 지적으로, 영적으로, 봉사하는데도 열등하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성경을 보면서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의 영적 능력을 예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그 여인들을 칭찬하셨고 그 여인들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39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여자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쓰임받았습니다. 이것이 영적 능력입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함으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이 여자가 여자들에게만 전도했겠습니까? 많은 사마리아인 중에 여자만 있을까요? 사마리아인이 여자에게만 가서 전해서 여자들만 예수를 믿게 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 남편 다섯을 바꾸면서도 그 허전하고 허탈함을 메우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는 이 여인, 그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나타날 수 없었던 이 여인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인 속에 감추어져있는 영적 능력을 보셨습니다.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나자마자 달려가서 했던 일은 ‘와 보라.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그분을 나는 만났다.’ 복음을 전하는 영적 능력을 가진 전도자로서 주님 앞에 헌신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여인 속에 숨겨져있는 영적 능력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11장 14절에서 17절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주님을 말씀하실 때에 마르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비슷한 용어를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베드로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같은 본문 안에서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책망하는 모습도 있고 그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 여인의 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를 영적 능력면에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50절, 마가복음 3장 35절, 누가복음 8장 21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했습니다. 형제요, 자매라고 하는 이 표현 속에 우리 여성들의 영적 능력을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53절에서도 영적 전쟁이 일어날 때 여자의 부분을 빼어놓지 않으셨습니다.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영적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남자 여자 구별없이 똑같은 전쟁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을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동등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 능력의 믿음에 관한 부분에서도 예수님은 여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스로보니게 여인에게도 그의 믿음을 칭찬해주십니다.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보시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여성들의 영적 능력을 인정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여성의 지적 능력을 인정하셨다.

예수님은 무리 가운데서 여인들과 아이들을 제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하실 때에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온 사람들 가운데 여성들과 아이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르침의 현장 속에 여자가 포함되었습니다. 만약 지적능력이 없다면 가르침의 현장 속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 이하를 보면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얼마만큼 이 여인의 지적능력을 인정하고 영적인 통찰력을 인정하셨을까?

저는 이번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을 맞으면서 예수님의 수난 일주일을 점검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수요일에 일어난 이 옥합을 깨트리는 사건에 대해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예수님으로부터 들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마지막 발을 씻기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이 일은 영적으로 깨어있고 통찰력이 있는 자, 그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면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민감하게 영적으로 열려있기만 한다면 언제나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함께 따라다닌다고 해서 지적 능력과 영적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먼발치에서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었던 이 여인, 그리고 엄청난 빚진 자라고 하는 그 의식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자기의 인생에 다가오셔서 조명해 볼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그 분 앞에 내가 해야될 일이 무엇인가를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때 이런 부분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일에 대해서 이 세상 끝까지 함께 간다고 엄청난 표현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지적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3) 예수님은 여성의 봉사 능력도 인정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9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헌신과 봉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명의 제자 중에 여자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 중에도 여성이 없었습니다. 70명을 선택해서 복음을 전하러 보내는 그 현장에도 여성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봉사의 능력을 충분히 인정하시면서도 왜 여성들을 제외시키셨을까? 그런가 하면 부활의 현장과 기적사건과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 현장 속에는 여성들이 빠지지 않습니다. 또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 일을 여성에게 맡기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하는 명령을 여자가 먼저 받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면서 기도를 한 적이 있는데 여자는 자기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잘 삐치고 또 시기하고 질투하고 시샘하고, 한 달에 한번씩 감정의 up, down이 일어나고, 또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마음을 상해하고 그래서 큰 일을 그르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우린 스스로 감정을 조절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고 세워주기보다는 자신에게 더 많이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지적하면 못 견디어 합니다. 그 지적을 받는 순간 고칠 점을 찾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서 부단히 노력을 해야하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3. 여교역자의 사역을 위한 제안

(1)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문명

뒤르카임은 말하기를 서구문화는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성적인 속성이 획일적으로 개발됨으로 여성의 잠재력이 억압되어 버리고 발휘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남성의 가치관으로 모든 권력과 이성, 과학, 기술들이 개발되어 왔기 때문에 여성들이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문명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점점 남성중심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세는 여성들의 위치가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중세는 여성의 정치 권력까지 인정하고 부여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여왕의 경우를 보면 여왕이 등극을 할 때 라임제의 대주교로부터 면류관을 받았고 왕과 다름없이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엘레너라는 여왕은 다스릴 힘과 통치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10명이나 낳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의회와 지방의회에서도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자기의 위치에서 당당하게 지위를 찾고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르네상스 이후에 오면서부터 점점 여성의 위치가 숨겨지게 되고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사회적인 편견을 깨고 여성의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여성해방운동이 여성의 사역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성경적으로 여성의 위치에 대해서 말씀해주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헌신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찾아야할 사역인 것입니다.

 

 

4. 여교역자의 자기 훈련

그렇다면 이제 여성만의 고유한 특징을 어떻게 개발시켜줄 수 있는가? 저는 남자를 닮으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성이 남성을 닮으려고 하면 우스워질 뿐 절대 닮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독특하게 지으셨음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나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캔 가이거가 말한 것과 같이 민감성 훈련을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감성 훈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남성에게 주시지 않은 아주 예민하고 예리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의 깊은 감정의 부분들을 느낄 수 있지요.

 

(1) 기도 훈련

저는 성경에 나온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도하는 여인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전도사로서 사역자로서 기도하는 모습은 성도들에게도, 담임목사님에게도, 동역자에게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고 가정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훈련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여교역자의 생명은 끝이 아닐까요?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입이 빠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발걸음이 빠르다면 우리의 교회는 우리의 기도로 말미암아 잠잠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전도사님 한 분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을 인도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어머님이 전도사님이시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늘 기도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사역자의 길을 가게 되면서 밤에 철야기도하는 것이 몸에 배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시작하면 희한하게도 시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방해를 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집에서도 할 수 있고, 산에서 할 수도 있고, 교회에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개인의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철야기도가 몸에 배어있는 그 분이 자기의 사역으로 교회 안에서 잘 정착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역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사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매일 밤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는 기도하는 훈련들이 사역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운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여교역자가 해야할 일은 기도하는 사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훈련은 어떻게 합니까? 혼자 기도가 잘 안되면 기도하는 팀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기 시작하면 내 주위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돌고있는 것을 사람들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유의 사역들을 다 빼앗겨버린 상태에서 나의 지위와 권익에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적 능력을 상실한다고 생각합니다.

 

(2) 말씀 훈련

또 하나는 말씀훈련입니다. 교역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이며 이것을 놓치면 교역자의 생명은 끝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17년 전 유학을 포기하면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기도하는 이 부분에 있어서만은 제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최고가 되게 해주세요. 제가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을 지라도 성경을 펴면 그 말씀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깨닫는 것만큼은 하나님, 꼭 저에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래야만 제가 사역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때문인지 하나님께서 늘 깨달음의 은혜를 주십니다. 말씀 앞에서 많이 울게 하시고, 위로하시고 저를 세우시는 주님을 만나면서 감격스럽게 그동안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 훈련을 놓친다면 우리에게서 어떤 상식이나 경험을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식이나 경험이 나에게는 적용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든지 적용될 수 있고 치유하는 능력이 있어서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본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훈련하셨습니까? 적어도 교역자라면 성경을 1년에 1독은 해야겠지요. 그런데 평신도들이 성경을 1년에 한번 읽는다면 교역자는 조금 더 읽어야 되지 않을까요? 제가 이번 여름휴가를 맞으면서 성경을 1독하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막 읽어나갔습니다. 거의 끝까지 읽어가는데 그렇게 많은 양을 집중적으로 읽을 때에 주시는 은혜가 또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말씀 훈련은 다양하게 해야된다고 생각하는데 새벽예배에 참석해서 예배드리는 것 말고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말씀을 펴는 시간을 반드시 따로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그런 고집스런 자세로 말씀을 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말씀 훈련이 함께 할 수도 있지만 따로 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연구도 혼자서 하기가 힘들다면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한 1년 정도만 꾸준히 한 곳에서 훈련을 받게 되면 그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개인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나의 것으로 소화해서 그 말씀으로 새로워지기 위한 훈련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3) 은사 훈련

세 번째는 은사훈련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이 주셔야 됩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은사를 나의 게으름으로 인해서 사장시킬 때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내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가 찾고 계속해서 개발하기 위해서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은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 보면 기도하는 은사가 임하는 것을 봅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지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것은 질병을 통해서였습니다. 제 병이 치유되면서 기적 같은 일들을 보여주셨는데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은사를 잘 활용을 못했습니다. 제 병이 나으면서 다른 병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치유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20대 초반에 그런 은사를 받고 나니까 주위 사람들이 저를 분별력있게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죽을 위기를 한번 더 맞으면서 ‘하나님, 이런 것 다 거두어 가시고 정말 제가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대로 그런 신유은사를 거두어 가시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훈련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사역을 하면 할수록 성도 중에 환자들이 많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무능력한 제 자신을 보면서 가슴을 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쟌 인버 목사님은 말씀하시기를 “정말 환자를 치유하기를 원한다면 삼백명의 환자를 기도해줘라. 그러면 너의 은사가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삼백명 중에 몇 명이라도 치유되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치유기도를 하려면 그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이 은사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마음이 가도록 하고, 생각이 가도록 하고, 열정이 가도록 하는 그 부분으로 가져야 합니다. 저는 요즘 환자를 만나거나 어려운 사람을 만날 때에 기도를 하면서 그건 순간순간이고 저에게 가장 집중되는 부분은 가르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앞에 은사훈련을 하면서 ‘하나님, 정말 가르치는 이 사역에서 저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더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합니다. 제가 처음에 강의했던 테이프를 들어봤는데 인민군 아나운서 같아요. 얼마나 딱딱딱딱 떨어지고 말을 이상하게 하는지, 부끄럽고 창피해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후에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여성으로서 감화력을 줄 수 있는 부드러운 언어, 부드러운 말씨, 상냥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잘 쓰다듬어 주고 감싸안을 수 있는 따스함으로 저를 개발시켜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은사를 정확하게 보고 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4) 생활 훈련

네 번째는 생활훈련입니다. 한 해가 바뀔 12월이 되면 제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있는데 네 가지를 분류해놓고 점검합니다. 다음 한 해를 살기 위해서 네가지 부분에서만은 정확하게 분리와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영적인 면, 둘째는 지적인 면, 세째는 물질적인 면, 네째는 건강과 인격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을 12월에 하나하나씩 점검합니다.

영적인 부분에서 올해는 하나님의 말씀도 66권을 통독함과 동시에 그 중에 한 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겠다. 또 기도생활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기도하는 시간을 정하고 중보기도 사역에 어떻게 헌신하겠다. 그리고 영적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그 곳을 체크하고 거기서 훈련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점검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 지적훈련 부분에서는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부분을 정합니다. 예를 들면 상담을 공부한다든지, 리더십을 공부한다든지, 소그룹에 대한 공부를 한다든지, 귀납적 성경연구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든지, 그러면 거기에 시간과 열정 등을 투자를 해야하는데 그런 값을 체크하면서 정리해 나갑니다. 그 다음 물질적인 면에서도 사례비에서 십일조, 구제비, 선교비 등을 분류를 해서 은행에서 자동이체가 되도록 해놓습니다. 그 다음에 건강관리와 인격적인 관리를 위해서도 선을 그어놓고 기도를 하게 되는데 생활훈련에서 생활의 리듬이 깨어지면 영적으로 엄청난 타격이 오는 것을 저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서있지 않으면 생활이 흐트러질 수 있지만 자의든 타의든 어떤 모습으로든 내 생활의 리듬의 균형이 깨어져 버렸을 때 영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훈련도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또 여교역자 중에 독신들이 있는데 굉장한 자기훈련이 필요합니다. 죽을 것 같은 훈련을 해야 합니다. 밤새도록 잠을 안 자도 누가 컨트롤 해주지 않습니다. 졸리지 않으면 밤을 꼴딱 새울 수도 있고 낮에는 몽롱한 상태에서 헤매고 돌아다닐 수도 있고,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밥도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도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고, 성경도 볼 수도 있고 안볼 수도 있고, 굉장히 위험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독신 여교역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를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립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이 내가 살아남는 비결입니다. 사단은 조금씩 조금씩 틈타고 다가옵니다. 사단은 달콤하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포로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훈련을 잘해야 합니다.

또 한가지, 여교역자에게 있어서 건강을 다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제가 건강을 다치면서 느꼈습니다. 그래서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면서 헌신했는데 몸을 다치면 몸도 드릴 것 없어 누워서 기도합니다. 그럴 수는 없지 얺습나까? 여러분, 건강관리 잘해야 합니다. 건강을 다치면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어요. 특히 여교역자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가족이 잘 돌보아 줄 수 있을 것 같지만 얼마만큼 우리를 돌보아 주겠습니까? 그들도 그들만의 삶이 있기에 우리를 무거운 짐으로 느끼게 됩니다. 병들어 누워있는 모습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활훈련을 잘해야 됩니다. 식사생활이나 운동도 나에게 맡게 개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감정 훈련

특히 여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가 감정훈련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말씀은 갈라디아 2장 20절인데 저에게 감정훈련을 잘 시켜준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날 때 제가 하는 행동은 눈을 감으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얼굴에 흐르는 피와 함께 저를 측은히 내려다보시면서 ‘명옥아, 너 그렇게 힘드니? 그렇게 못견디겠어? 그렇게 억울해? 그렇게 폭발할 것 같단 말이지? 그런데 나는 너의 그런 모든 것을 참아줬단다. 기다려줬단다. 그리고 너를 사랑해!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십자가를 지지 않았니?’ 하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동시에 떠오르는 두 번째 그림은 주님의 십자가와 오버랩 되는 것을 느낍니다. 갈라디아 2장 20절의 말씀처럼 제가 주님의 십자가에 같이 달리는 그림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게 눈을 뜨고 나면 머리끝에 있던 화가 발끝으로 내려가 땅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눈감는 일이 느릴 때는 감정이 폭발해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만의 고유한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6) 인간관계 훈련

또 하나는 인간관계 훈련입니다. 참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나와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됩니다. 각 사람의 다양성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인간관계의 한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남이 나에게 못해주고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이 나에게 잘해주고 따뜻한 말해주고 따뜻한 손길을 보내주면 그건 기적이다. 이렇게 세워놓고 보니까 상처를 입을 일이 없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가 하면 훈련 가운데 김집사님이 저한테 와서 이집사님 흉을 보고 또 이집사님은 와서 김집사님 흉을 보고 그럽니다. 그래서 저는 교인들이 저한테 와서 말을 하면 반응을 안보여요. 반응을 보이면 가서 자기 말을 저를 빙자해서 말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반응을 보이면 안되고 기도하고 보내드립니다.

이제는 그런 분들이 오시면 몇 가지 묻습니다. 첫째, 집사님을 낳아준 부모님이 집사님을 100% 기쁘게 해주십니까? 둘째, 형제분들이 집사님을 100% 기쁘게 해줍니까? 세 번째, 집사님 남편이 집사님을 완벽하게 기쁘게 해줍니까? 네 번째, 집사님이 낳은 자녀들이 집사님을 100% 존경하고 따릅니까? 내 가족도 나를 기쁘게 못해주는데 남이 나를 어떻게 기쁘게 합니까? 그런 시각으로 보기 시작하니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이 우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동역자가 우리에게 잘해주면 기적입니다.

 

5.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여교역자가 할 수 있는 사역을 여섯가지로 분류해 보았습니다.

 

(1) 양육 사역

먼저 양육하는 사역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양육하든지, 소그룹으로나 대그룹으로 강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양육하는 우리의 사역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에서 12절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사역의 원칙을 세워서 나간다면 아름다운 양육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려고 하면 양육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되고 사람에게서 어떤 것을 기대하지 않고 마치 유모와 같이 젖먹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러면서 나의 목숨을 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양육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주님의 복음으로 무장된 가운데 또 아버지의 분명한 권계가 있는 그런 양육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2) 가르치는 사역

두 번째는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가? 우리가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르치는 사역이나 양육하는 사역이 담임목사님을 돕는 사역과 부교역자간의 협력사역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교역자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담임목사님과 의논없이 자기가 먼저 일을 만들면 문제가 됩니다.

 

(3) 담임목사를 돕는 사역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점은 입을 관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도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잘못하고 나는 잘했다고 변명을 해도 결국 들어가 보면 내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문제가 야기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교역자는 양육이나 가르치는 사역이나 담임목사님의 통제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담임목사님과 충분히 의논이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부교역자들 간에 협력할 수 있도록 협력사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가 서야할 때와 내려와야 할 때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제가 경험했던 것을 한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여교역자로서 담임목사님을 돕는 사역은 기도하는 사역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철야를 몇 명 교역자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운영을 같이 하는 가운데 제가 철야팀 교역자들에게 중보기도를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담임목사님과 주일예배를 위한 중보기도 사역을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철야팀 가운데서 어렵고 안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 마음 속에 중보기도 사역을 해야하는 끊임없는 부담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께 한 번 여쭤보았더니 거절을 하시면서 한국교회는 기도를 안 해서 문제가 아니라 기도한대로 살지 못해서 문제라고 하시면서 그만큼 기도했으면 됐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도 제 마음 속에서는 끊임없이 그 생각이 없어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계속 얘기를 하는데 철야팀의 교역자들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혼자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못하고 같이 하자고 해서 부목사님 한 분, 여교역자 한 분과 1995년 10월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광고를 한 것은 아닌데 첫 번 모임에 14명이 왔고, 그 다음 모임에 28명이 왔고 계속 증가해서 1년이 지나니까 400명이 참석했고 600명이 모였을 때는 본당에서 모일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나중에는 다른 여전도사님과 제가 그 사역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같이 하던 목사님이 다른 중요한 사역을 맡게 되었거든요. 제 마음 속에 주보에 중보기도 안내와 이름이 나가면서 ‘이제는 내려와야 할 때다’ 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들 중에 누군가를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몇 백명 정도 되면 여교역자의 사역이 아니라 교회의 멋진 영성훈련 사역으로 될 수 있고 이 중보기도 사역이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강 전도사가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하라고 하시더군요, 한 3개월 정도 끊임없이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은 영성훈련 목사님께 넘겨드리고 나서 얼마나 멋지게 잘하시는지 저는 후회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상해 주십니다. 나의 실수가 아닌데 고난이 오면 저는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보너스가 따르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큰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훈련하시는 것으로 느끼고 벅차오르는 기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하거나 실수한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양육하는 사역과 가르치는 사역은 하나하나 독특하고 고유하기에 교회 안에서 담임목사님과 함께 의논하는 가운데 준비를 해야합니다. 담임목사님이 뭔가를 시키면 “예!” 하고 무조건 받아놓으세요. 저는 한번도 거절해 본적이 없습니다. 일단 받고 먼저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서점에 가서 그 분야의 책들을 50권이고 100권이고 있는대로 다 사서 무조건 읽습니다. 세 번째는 읽은 것을 정리를 해서 사역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작업을 합니다. 물론 이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나씩 하나씩 해나갈 때마다 기쁨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뭔가를 나에게 맡기셨을 때 못한다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나에게 시키신 사역이라고 생각하고 힘들고 어렵지만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다 보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4) 상담하는 사역

마지막 하나는 상담하는 사역인데 이것은 정말 독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교육해주는 강좌를 찾아가서 도움을 얻기도 하고 훈련을 받기도 하면 교회 안에서 좋은 상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상담도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상담에 대해서는 동역자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있고 또 의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의사에게 연결을 시켜줘야 합니다. 반드시 내가 맡았기 때문에 내가 해야한다고 하는 고집스런 자세는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시간 반 동안 여성사역자의 대한 포괄적인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기대와 다르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으나 우리의 모습들을 잘 추스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역들을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분별하여 버릴 것을 빨리 버리고 취할 것을 빨리 취해서 아름다운 사역자의 자세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상처받은 영혼으로 일하지 말고 치유된 사역자로 일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내가 상처받은 자로 사역을 하면 내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주게 됩니다. 그러나 치유된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진 랜드럼이 쓴 「성공하는 여성들의 심리학」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책에 보면 상처를 입은 여자들이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능력있게 일을 하는 모습들이 나옵니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독이 나오지만 치유가 되면 능력이 나옵니다. 우리의 이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잘 아물게 하고 잘 싸매서 주님의 보혈의 피로 다시 한번 새로워져서 오히려 고통당하는 자들과 힘들어하는 자들에게 위로자가 되고 상담자가 되고, 양육자가 되고 가르치는 자가 되고, 훈련하는 자가 되고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서 화평함을 이루는 아름다운 여성사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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