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8/22) 교갱협 제6차 영성수련회 폐회예배

고린도전서 11장 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오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해서 저는 제 자신의 내면에 감추고 있는 영적인 고민, 그리고 한국교회의 우리 사역자들을 내다보면서, 또 신학교에서 훈련받고 있는 많은 후배들을 바라보면서, 제 나름대로 마음 속에 갖고 있는 하나의 불안, 이것을 일단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국교회 리더십에 지금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변화는 좋은 방향의 변화라기 보다는 좋지 못한 방향의 변화입니다. 질적으로 좋아지는 변화가 아니고, 질적으로 나빠지는 변화입니다.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리더십의 신뢰가 떨어졌다는 말입니다. 실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리더십의 실추, 또 리더십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면 인격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목사라는 인격에 대해 존경심이 놀랄 정도로 쇠퇴해 버렸습니다. 누군가 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까, 공항에서 신부라는 사실을 알면 모든 젊은이들이 허리를 굽히고 경의를 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가 목사라는 것을 알면 일부로 고개를 돌리고 피해버린다고 합니다. 이만큼 우리의 처지가 마음이 아프다 못해서 슬픔을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을 만큼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 목사의 인격이 그만큼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자주 느끼겠지만, 우리는 너무 너무 거룩한 말씀을 날마다 가르쳐야 되고 전해야 되는, 참 어떻게 보면 불행한 위치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질그릇에다가 이 보배를 담았다고 그랬는데, 좀 금그릇에다가 담았으면 이 금그릇도 행복할 거 아니요. 그런데 이 질그릇에다가 이 보배를 담았으니 이 질그릇은 죽을 지경인 거예요. 이것을 못 느끼는 목회자라면 그 사람이 약간 좀 이상해진 사람이요. 아니면은 너무 은혜를 받아서 천사가 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예요. 참 어떻게 보면은 우리 모두가 다 기를 펴고 살 수 없는 처지에서 우리가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요. 그렇다면은 우리가 그만큼 거룩한 말씀을 가르치고, 입에 담고 날마다 이야기를 해야 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우리를 그만큼 믿어주고 존중해주고 또 모든 면에서 따라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실상 그렇지 않아요. 많은 오늘날의 평신도의 마음 속에 있는 설교자에 대한, 또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게 각인이 되어 있느냐? 열심히 가르치면서 자기는 잘 안 지키는 사람, 남은 거룩하게 훈계할 줄 알면서 자기는 훈계를 잘 못하는 사람, 이런 식으로 각인이 되니까 이제는 기도하는, 기도 많이 하는 목사라는 그것을 가지고 그 인격이 신뢰를 못 받습니다. 성경 들고 다닌다고 누가 신뢰해주나요? 설교 잘한다고 누가 신뢰해주나요? 이제는 모두가 한 수 깎아 내려서 사역자들을 평가하고 봅니다. 여러분, 이 말이 거짓말인지 여러분들에게 가까이 와서 “존경합니다” 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조금 더 깊이 보세요. 그들의 내면에 뭐가 있는가? 교회 안에는 불행하게도 은혜 받은 아첨꾼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그 아첨하는 말에 너무 많이 흔들리고 이리 갖다 저리 갖다 합니다. 좀더 직시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의 인격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못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우리 사역자에게 있어서 인격이 이만큼 위기를 만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능력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능력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능력 있는 목회자, 능력 있는 설교자, 이런 면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 가지고 능력을 입을 수 있는 어떤 무엇이 있다면은 눈이 번쩍 번쩍 해집니다. 그러나 인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은 별로 관심이 없어요. 교회 부흥에 대한 어떤 방법론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모입니다. 그러나 인격에 관한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하면 다 눈감고 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병이에요. 큰 병이에요.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합시다. 강단에 세워 놓으면 사람들을 가장 감동을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울렸다 웃겼다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대부분의 부흥사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분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은 정말 가슴을 칠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니란 말이에요. 무슨 말인 줄 알겠어요? 능력은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은혜를 끼치는 줄은 모르겠어요. 모든 사람 앞에 천사처럼 잠깐 보일 수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왜 나중에 그들의 인격에서 냄새가 나는 일들이 많으냐? 모두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대부분이 그래요.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의 상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일면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지역교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들이야 별 볼 일이 없잖아요. 매일 자기 교회를 붙들고 앉아서 한 영혼, 하나를 위해서 씨름하고 눈물 흘리고 하다가 보면은 언제 남 앞에 가서 이야기 할 틈이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좀 나아요. 보호받을, 어떤 면에는 언덕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많은 대중을 상대하고,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말씀을 많이 전하는 분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너무 좋지 못한 영향을 많이 끼치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인격이에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설교를 못해서가 아니에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그들의 인격문제는 바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의 인격을 세상 앞에 보여주는 거울이에요. 이런 면에서 너무너무 심각한데, 오늘 이 심각성을 우리가 오히려 느끼지 못하고 목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Today's Pastor in Tomorrow's World> 라고 하는 이름이 약간 이상한 미국 잡지가 있습니다. 내일을 위한 오늘의 목회자라는 뜻이겠죠? 거기에서 2,000명을 대상으로 해서 평신도들이 어떤 목회자를 원하는가 하는 설문조사를 한 내용을 제가 잠깐 본 일이 있습니다. 제일 앞에 나오는 세 가지가 이것입니다. 첫째는 개인적 야망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아니하는 헌신적인 봉사, 자기 목회를 자기의 어떤 개인적인 야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오해받을 소지를 갖고 있는 목회자도 없지 않아 있어요. 평신도는 정확하게 읽고 있는 거예요. 정확하게 읽고 있어요. 벌써 설교하는 말을 들으면, ‘아, 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key word는 야망이구나. 아니구나.’ 소명이냐? 야망이냐 하는 것을 금방 알아차려요. 참 기가 막혀요. 배우지도 않았는데, 목회자보다도 영성이 뛰어난 것 같지도 않은데, 눈치 보는 데에는 도사들이에요. 정확하게 알아요. 자식들이 배우지 않아도 엄마의 눈치를 보면 다 읽어 내듯이 양떼들은 다 읽어내요. 저 목사는 야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다. 소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다. 금방 알아요. 평신도가 원하는 목회자는 인격적으로 자기 야망을 앞세우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뭔지 아세요? 두 번째가 인격적인 신실성을 원했어요. 좀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요. 말은 굉장한데 좀 믿어지지 않는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가 뭔지 압니까? 모범적인 표준이 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좀 따르고 싶은 표준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세 가지예요. 세 가지를 다 묶어 놓고 보면은 한마디로 인격이라는 말에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신도가 원하는 지도자예요. 지도자 상이에요. 그런데 이 사실을 오늘날 우리가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자유주의 신학에 너무 많이 물들어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주목을 안 하는 신학교입니다. 예일 신학교. 예일 대학교에 있는 유명한 신학교이지요? 그 신학교는 지난 150년 전부터 매년마다 그 유명한 설교학 특강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150년 역사를 가진 설교학 특강 시리즈입니다. 굉장한 것입니다. 제가 몇 권을 읽어 봤습니다마는 그 깊이가 대단해요. 그 당대에서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가장 설교자로서 탁월한 분들만 초청을 해 가지고 몇 일씩 특강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책으로 내는 거예요. 그래서 예일 대학교 설교학 특강 시리즈 자료라 하면은 누구든지 고전으로 생각할 정도입니다. 대단한 것인데요. 1876년, 지금부터 한 130년 전에 우리가 잘 아는 필립스 브룩스라고 하는 목사님이 특강을 했습니다. 2년을 연속으로 특강을 했는데요. 이 필립스 브룩스는 최근에 보니까 지난 1,000년 사이에 세계가 배출한 10명의 설교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사람입니다. 이분이 특강을 할 때, 이런 내용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역을 위한 준비는 단순히 어떤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풍부한 지식만을 갖추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사역을 위한 준비는 유능한 말씀 증거자로서 영향과 자질을 갖출 때까지,’ 이것이 중요한 거요. ‘자질을 갖출 때까지 전 인격을 연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일 대학교 설교학 특강 시리즈의 기본적인 주제는 인격이라고 합니다. 100년 동안 이어진 주제가 인격이에요. 그만큼 사역자에게 중요한 것은 인격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부름을 받은 것을 항상 감격하는 사람입니다. 참 생각할 때마다, 빌리 그래함이 자주 독백을 했다고 말하듯이, ‘하나님, 하필이면 왜 접니까? 저보다도 훌륭한 평신도들이 우리 교회 안에도 수백 명, 수천 명이 되는데, 저런 사람을 왜 목회자로 세우지 않고 왜 나 같은 것을 불렀습니까?’ 하는 감격이 있어요. 몇 일 전에도 우리 교회 장로님들 가운데, 지금 시무장로 가운데 한 분, 그리고 사역 장로 가운데서 두 분이 이제 선교사로 떠납니다. 연세가 다 50대 중반이 다 넘었는데, 후반기 인생을 이제 선교지에 가서 일하고 싶다고 해 가지고 지난 1년 동안 선교전문기관에 가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분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학 한국어 교수로, 또 한 사람은 연변 과기대 정보통신 교수로, 또 한 분은 미국 풀러 신학교에 가서 3년 공부를 하고 멕시코로 떠나려고 합니다. 다 한국에서 1급 두뇌들입니다. 그분들이 금주에 떠났겠네요. 떠나기 때문에 제가 저녁 식사를 특별히 함께 했습니다. 부부동반으로 해서 저녁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제가 그들과 함께 적어도 15년 이상을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제 밑에서 제자훈련을 받고, 사역훈련을 받고, 다 나중에는 장로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신 분들입니다. 학적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탁월한 분들입니다. 지금 직장에서 나와 은퇴한 돈만을 가지고도 편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어려운 곳을 찾아갑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그 장로님은 그래요. 학교에서 방을 하나 주는데, 거기에 주방도 없습니다. 옛날 소련 치하에서 지은 것이니까 그저 자고 일어나고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은 벌통 같은 기숙사예요. 그 방 하나 딱 준대요. “목사님, 거기 가서 연단 좀 받아야죠.”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 나는 한가지 사랑의 교회를 사역하면서 의문(question)이 하나 있어요. 왜 당신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목사로 부르지 않고, 왜 나 같은 사람을 목사로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당신들이야말로 인격적으로나, 헌신하는 면에서 목사의 기죽이기 딱 좋은 사람들인데, 왜 당신 같은 사람들을 부르지 않고, 나 같은 사람을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목사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하더라고요. 그러나 나는 진실한 말이에요. 진실한 말이에요. 저는 목사 되기에 훨씬 타당한, 훨씬 적합한 평신도가 너무 많은데, 하나님이 그들은 부르지 않고. 정말로 이 허물투성인 나 같은 것을 불러서 하나님의 종으로 세웠다는 데 대해서 항상 불가사의에요. 수수께끼에요. 그래서 감사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불안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기뻐하다가도 어떤 때는 또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하는 이런 감정적인 기복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제가 봅니다.

 

그런데 솔직한 심정으로요. 저는 제 자신을 미워할 때가 더 많습니다. 더욱이 저는 제자훈련을 해야 된다고 항상 깃발 들고 외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마 이런 감정이 더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제 개인에 대한 혐오증이 자주 저를 괴롭게 만듭니다. 왜? 예수의 제자가 되자고 외치는 것만큼 제가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제 양심이 항상 증명을 하거든요. 그리고 남을 가르치는 것만큼 내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는 데 대해서 이제는 어떤 때는 양심에 가책조차도 없는 아주 직업꾼 같은 그런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가르치지 아니하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때는 혐오감이 생겨요. 더욱이 여러분, 제자훈련이 무엇입니까? 작은 예수가 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온전한 자가 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평신도를 온전한 자로 세우자. 예수 닮아 가는 작은 예수를 만들다. 이런 포커스가 항상 제자훈련에는 강조가 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내가 어느 정도 돼야 하지 않아요? 내가 어느 정도 인격적으로 주님을 닮았다. 내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인정하고, 가족이 인정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인정할 수 있는 어느 수준을 가면서 이런 소리를 하면 좋겠는데, 지금까지 나이가 벌써 60이 넘어가도록 저 나름대로 노력은 했습니다마는 여전히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저의 모습이 어떤 때는 혐오감을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저의 솔직한 고백이에요. 제자훈련에 대해서 제가 좀 마음을 뜨겁게 가졌던 이유는 따로 있어요. 예수님이 제자를 만들라고 했으니까 그 명령에 복종해서 목회 해야 된다 하는 이 소명감에서 시작했어요. 그리고 평신도를 깨우면은 하나님의 교회가 놀라운 능력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이 일에 열을 올렸어요. 그런데 이런 제자훈련을 20년, 30년이 넘도록 하다가 보니까 이제는 점점 점점 관심이 어디로 쏠리느냐 하면은 제 자신에게 쏠리는 것이에요. ‘도대체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수준의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냐? 그러면 그 인격을 너는 몇 퍼센트 정도나 네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 줄 수 있느냐?’ 계속 제 자신에게로 포커스가 집중되는 것을 제가 지금 계속 느껴요. 그러니까 겁도 나고, 불안하고, 답답하고, 그래서 내가 어쩌다가 이 팔자가 됐나? 하는 생각도 하게 돼요. 할 수 있으면 제자훈련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은혜로운 설교, 은혜로운 교육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아요? 그런데 가장 힘든 주제를 가지고 제가 설교를 할 때가 많고, 강의를 해야 될 때가 많다는 이 사실 때문에 저는 항상 부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게 저의 솔직한 고민이에요.

 

그러나 이런 고민이 저는 모두가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제가 낙천적이 아니어서 그렇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또 제 기질이 어떤 면에는 부정적인 면이 있어서 그렇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완벽주의자가 되어서 그렇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볼 때는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에요. 질그릇은 고민하게 되어 있어요. 까불지 말라고요. 고민하게 되어 있다고요. 고민 없는 질그릇이라면 이것은 질그릇이 아니에요.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인격 문제를 항상 신중하게 다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관심은 이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했을까? 바울이라고 뭐 완전했나요? 바울이라고 그 인격에 흠이 없었나요? 절대 그렇지를 않아요. 우리는 서신서를 읽으면서 바울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스며 나오고 냄새가 풍기는 그의 약점들을 우리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인격을 놓고 어떻게 해결을 했을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 영혼이 찌들어지지 아니하며 그 영성이 위축되지 아니하며 그 마음에 기쁨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길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이것이 저에게 관심사예요.

 

그런데, 오늘 읽은 이 본문이 정말로 저에게 주는 굉장한 해답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 서신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말씀이에요. 다른 데서는 이런 말씀을 안 했어요. 나는 그리스도를 본 받으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기 내면에 있는 인간적인 고민, 질그릇으로서의 약점, 인격적으로서의 불완전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에게 자기 눈을 평생 고정시켜놓고 오직 그분을 닮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본 받는다는 게 쉬운 거예요?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떤 중은 절간에 앉아서, 절간 앞에 있는 큰 바위만을 쳐다보며 40년을 살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바위만을 응시하면서 40년을 살다보니 나중에는 그 중의 얼굴이 바위처럼 변하더라 그러더라고요. 여러분, 닮는다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참으로 내가 예수님을 닮는다. 예수님을 본받는다. 그렇다면은 그 사람은 사시장철, 24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영의 눈이 따로 있었어요. 마치 태양계의 행성이 태양을 항상 바라보면서 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그의 마음의, 내면의 눈이 있었어요. 그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아요. 항상 그분만을 바라보아요. 그리고 그분을 닮으려고 전력투구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바울이 이런 말까지 했잖아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내가 아니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상한 말을 할 정도로 그는 주님을 완전히 자기의 눈에 가득 차도록 놓고 한평생을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인격의 불안정을 극복하는 비결이었어요. 자기 내면에 들어오는 모든 모순과 번민과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었어요. 주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이 없이는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안되기 때문에 그만큼 예수님을 본받는 자 되었다고 소리칠 정도가 되었으면 철저하게 자기 부인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본받겠다고 하는 자기의 그 중심의 목표가 많이 달성이 된 것 같아요. 만족스러울 만큼 자기는 예수님을 닮는 수준으로 그는 나아간 것 같아요. 뭘 보고 아느냐? 그 다음 말씀 때문입니다. ‘너희는’ 뭡니까? ‘나를 본받으라.’ 이 말씀을 자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주님을 닮아 가는 데 있어서 발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점점 닮아 가는 자기를 성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샘플로 내놓은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봐라. 나처럼 깊은 영안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지 못하는 약점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라. 내가 보이지 않는 예수를 보여주마. 너희들은 나를 보아라. 나를 보고, 내가 하는 데로 따라하라. 그는 자신 있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어요. 그의 글들을 좀 보면,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는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배경이 뭐냐 하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바울은 낮은 자리, 정말로 낮은 자리,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가 되는 자리까지 떨어지면서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한 생명을 구원하는 데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성도들에게 보여주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세상의 만물의 찌끼와 같은 자리까지 떨어지면서 그 모든 수모와 수치를 감수하면서 한 영혼을 구원하려고 전심전력하는 그 자기의 모습, 어디서 배운 것입니까? 누구한테 배운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거예요. 날마다 응시하고, 날마다 바라보는 그 분을 닮으려고 하다가 보니까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하죠. 얼마나 부러운 사람인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의 배경도 뭡니까?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유익을 포기하는 자기의 인격, 자기의 모습을 교인들에게 내놓은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을 기쁘게 하고 나 자신의 유익을 취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겠다. 이런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바울의 모습을 그는 어디서 배웠을까요? 어디서 터득했을까요? 바로 날마다 본받기를 사모하고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예수님한테서 배운 거예요. 바로 예수님이 그런 분이었지 않아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자기를 희생해서 썩는 밀알이 되는 주님의 그 삶과 인격을 통해 자기가 그것을 전수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교인들을 보고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을 보면, 우리와 주를 본받으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 중에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인격을 가지고 너희를 대했는지 너희가 잘 알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들은 우리들을 본 받으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이 샘플로 내놓은 그 인격, 자신의 인격은 바로 예수님한테서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3장 17절을 보면, 또 한번 그는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그 배경은 뭡니까? 온전히 이룬 것처럼 자만하기 쉬운 자들을 경고하면서 하시는 말씀이었어요. 온전히 이루었다는 소리를 하지 마라. 나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지금도 달려간다. 마지막 상을 얻기까지 아직도 얻지 못한 자처럼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향해서 달려간다. 나를 보고 너희는 본받으라 이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는 완전한 자리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어떤 면에서는 극치에 이른 그런 위대한 지도자도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는 아직도 이르지 못한 사람이요, 아직도 미완성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요. 아직도 노상에서 달려가고 있는 자신임을 그는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영적 세계의 건강은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아직도 나는 부족하다는 심정을 가지고 달려가는 데 있다. 완전하다고 스스로 자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만큼 되었다 하고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준에까지 그의 표준에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필생을 다해서 달려가는 데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바울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매우 값진 귀감이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역자로서 일을 하면서 누구 하나보고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말을 입 밖에 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내 자식들을 보고도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말을 한마디도 못했어요. 내 아내를 보고도 감히 아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겠어요? 도무지 그 말을 못했어요. 제자훈련을 수백 명을 시켰는지 수천 명을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제자훈련을 하면서 소그룹에 앉아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어떨 때는 너무 좋아 가지고 배꼽이 나올 정도로 웃고 어떤 때는 너무 슬퍼 가지고 같이 눈물을 펑펑 쏟고 서로 손잡고 서로 위로하고 그래가지고 은혜의 도가니에 흠뻑 흠뻑 젖을 때가 많이 있었지만, 제가 “여러분, 저를 보고 따르세요. 저를 본 받으세요.” 감히 그 말 못 했어요. 그러나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정도까지는 나아가야 하는데, 참 이것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어찌 고민을 하지 않겠어요?

 

여러분, 그런데요. 우리는 사역자로서 우리 자신의 고민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정말 기가 죽어버릴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실이 하나 있어요. ‘예수처럼 되라. 작은 예수가 되라.’ 하는 것을 교역자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에요. 믿는 사람에게 다 요구하는 하나님의 표준이에요. 이게 제자훈련의 key가 아닙니까? 감사하게도 요즘에는 이런 사실을 강조하는 훌륭한 분들의 책들이 많이 소개되어서 제 자신도 많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변하는 것은 영화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종말론적으로 해석해야 된다. 그래서 저 세상에 갔을 때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되는 것이니까 세상에서 너무 그런 면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하면은 율법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밑바닥이 있어요. 그래서 장로교, 특히 우리 교단의 배경을 보면 이런 예수를 닮는다 하는 점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못했어요. 성화의 그 점진성은 신학적으로 이야기를 하지만은 그 점진이라는 것을 하나의 이론적으로만 생각을 했지, 우리의 인격과 삶이 점점 주님을 닮아 가는 경지로 들어가야 된다고 하는 실제적인 면을 강조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보니까 “우리는 모두 인간인데...” 하는 변명을 가지고 적당한 것을 다 눈감아주는 현실주의에 우리는 모두가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어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교역자들의 세계에 냄새가 진동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다 요구하는 표준이에요. 예수처럼 되라. 교역자에게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도 다 책을 읽어 보셨잖아요. 맥스 루카도 같은 사람의 책을 여러분이 읽어 보셨잖아요.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처럼 되기를 원하신다.” 분명히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것이 성격적이니까...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헨리 나우웬 같은 사람은 더 가슴이 콱 막히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우리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도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같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닮았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는 살아 있는 예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 우리의 도전이 있다고 그랬어요. “나는 살아 있는 작은 예수다. 너희들은 나를 봐라.” 할 정도로 우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진정한 구원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종말론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현실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가장 부담스러워하고, 참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죠? 원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그냥 두고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가족도 사랑하지 못해서 고민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면서 주님이 주신 유명한 말씀이 있잖아요. “너희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주님의 요구예요. 이게 표준이에요. 온전이라는 것은 제자라는 말입니다. 온전함이라는 것은 작은 예수란 말입니다. 그 수준을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거예요.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요구하는 표준이 이 수준이라고 한다면, 그들보다도 한 걸음 더 앞서야 되는 사역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인격의 수준, 삶의 수준이 어느 정도이겠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정말 고민스럽게,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나름대로의 몸부림이 없이 우리가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메마른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메시지를 들으면 굉장히 부담스럽지요? 그러나 이제 우리 교회를 갱신하자고 하는 타이틀을 걸고 우리가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요. 이제 마지막 시간이에요. 표준을 다시 한번 정확하게 확인하실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 있고, 우리가 응시하는 정점이 어디라는 것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돌아가셔야 돼요. 그것이 안되면, 갱신? 무슨 갱신이요?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을 여러분이 잘 아시죠? Born Again(거듭나기1,2)라는 유명한 책을 쓰시고, 교도선교회의 frontier가 되어서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 그의 책들은 엄청난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모든 면에서 갖추어진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입니다. 그 찰스 콜슨이 교도선교회의 사역자, 자기와 함께 일하는 교도소 사역자들을 앞에 놓고 이런 질문을 했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사명을 좀더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고 질문을 했다가 금방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내가 질문을 잘못했어요. 질문을 수정하겠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들이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을까요?’ 하는 그것이 정확한 질문이 아니고, 진짜 해야 될 질문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이 남의 질문이어서는 안되죠. 우리 모두의 질문이어야 합니다.

 

척 스윈돌 목사님을 잘 아시죠? 달라스 신학교 지금 총장으로 있는 스윈돌 목사님은 자기와 함께 일하는 부교역자들, 또 사역자들과 함께 늘 확인하는 가이드라인을 하나 갖고 있다고 합니다. 지침이지요. 그 지침을 놓고 자주자주 자기 자신을 점검하도록 한답니다. 공적으로 앉아서 이 지침을 놓고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이렇게 해서 항상 자기 자신을 점검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아주 미국 사람다운 태도예요. 그들은 매우 구체적이니까요. 실제적이고요. ‘지난주에 어디서든지 사람들의 의심을 살 만한 여성과 같이 있었던 일이 있는가?’ 이게 첫 번째 질문이에요. 지난주간 동안 사람들이 봤을 때, “어?” 하고 의심을 한다든지 좀 이상하게 볼만큼 좀 의혹 적인 이성과 함께 단둘이 앉아 있었던 적이 있는지, 이것을 체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금전거래를 정직하지 못하게 한 적이 있는가?’ 금전거래가 희미하다든지 정직하지 못하다든지, 그런 일이 있는가? 또 하나 ‘노골적인 성적인 자료를, 포르노 같은 자료를 탐닉한 적이 있는가?’ 그 다음에 ‘성경공부와 기도에 적절한 시간을 보냈는가?’ 제 생각에는 이게 제일 앞에 나와야 될 것 같은데, 제일 뒤로 미뤄놨어요. 그 이유가 있겠죠? 그 다음에 또 하나 ‘가정에 우선적으로 시간을 할애하는가?’ 가정을 등한히 하지 않고 가정을 위해서도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하는 말이에요. 그 다음에 또 하나 ‘소명에 따른 요구에 잘 응하고 있는가?’ 소명에 따라서 필요하다고 하는 사역에 잘 헌신하고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제일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거짓으로 대답을 하지는 않았는가?’ 지금 한가지 질문 하나 하나에 대한 대답이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볼 때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저는 참 대단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우리 부교역자가 100명이 넘습니다마는 이 100명 넘는 부교역자들을 앉혀놓고 한번씩 가다가 이런 데이터를 가지고 점검한 일이 한번도 없어요. 그런데 왜? 척 스윈돌이 사람이 모자라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여러 가지 허물이 너무 많아 가지고 양심에 가책이 돼서 이런 짓을 합니까? 아니에요. 우리 사역자들이 추구해야 될 인격의 표준이 워낙 높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망치든지, 아니면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든지 거룩한 교회를 비난에 대상으로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점검 작업을 하는 것이지요. 만약에 우리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날마다 X냐, O냐 하고 표하라고 한다면, 여러분 우리가 어느 정도로 대답을 할 수가 있을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교인들이 교역자들에게 요구하는 인격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늘 염두에 두세요. 교인들 자신이 주님을 닮아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마당인데, 교역자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있을 것이 아니요? 자기와 똑같으면 만족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아니죠. 이것이 저로 하여금 번민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목사를 그만두고 싶어하는 생각이 자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완벽주의에서 오는 어떤 병적인 사고가 아니에요. 성경 적인 뿌리를 가지고 자신을 검증할 때, 피할 수 없는 질문이요. 피할 수 없는 고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합니다. 유익한 것입니다.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적어도 자기보다 나아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을 합니다.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돼요.

 

미국 국민들이 대통령한테 요구하는 도덕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 높은가, 인격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 높은가를 가끔 보면 놀랄 때가 있잖아요? 클린턴이 그렇게 개망나니 짓을 했는데도 그저 적당하게 용납을 하고 넘어가는 것을 보아도 참 굉장하다고 느끼는데, 또 그 반면에 그들이 대통령이 될 사람에게 엄청난 수준을 요구하는 것도 우리는 보게 되고 또 놀라게 됩니다. 좋은 예가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있었지 않습니까?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선거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고어와 부시가 박빙의 표차를 가지고 승부를 가르는 혈투였어요. 처음에는 인기투표에서 고어가 얼마간 앞섰어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앞섰는데, 막판에 접어들면서 부시가 점점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엎칠락 뒷치락 하는 일이 한동안 계속 되었어요. 이제 선거 막판에 두 사람이 TV 토론을 했습니다. 토론을 했을 때, 그 평가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고어가 훨씬 잘한다. 고어가 훨씬 잘한다. 똑똑하다.”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어 쪽으로 인기가 넘어갔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지지도를 조사해보니까 부시가 앞서는 거예요. 기자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TV 토론에서 고어가 훨씬 잘했다고 평가를 하면서 지지를 할 때는 부시 쪽으로 가느냐 말이에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그 기자가 분석해서 써 놓은 글이 있어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고어보다도 부시가 인격적으로 더 신뢰가 간다는 것입니다. 부시가 고어에 비해서 훨씬 더 정직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신뢰가 간다는 것입니다. 67%의 사람이 그렇게 대답을 했어요. 두 사람을 보면 똑똑하기는 고어가 더 똑똑해. 그러나 신뢰는 부시 쪽이 훨씬 낫다. “왜 그러면 고어를 그렇게 보느냐?” 하는데 대해서 국민들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고어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라면은 무슨 말이라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 이렇게 딱 이미지가 박힌 거예요. 대통령이 될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이라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들은 본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사람이 10 명중의 6명이나 됐어요. 고어의 말이 굉장히 화려합니다. 그리고 고어는 평생에 자기도 모르게 좀 과장하는 습관이 자기 몸에 배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당히 표현이 화려해요. 그래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는 있어요. 그러나 “정말로 저 말을 믿어야 될 것이냐, 안 믿어야 될 것이냐?” 하고 물을 때는 그것은 또 하나의 다른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 ‘약간 말주변이 없어 보이는, 또 좀 약간 배운 데가 부족한 것같이 보이는 부시 쪽이 대통령이 되면 훨씬 더 진실한 지도자가 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국민들이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 많습니다. 세상에서 더럽고 냄새나는 데가 정치판인데, 정치판의 대통령이 되는 데에도 국민들이 그 정도의 어떤 표준을 요구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날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르치고 외치는 자리에 있는 사역자들에게 교인들이 요구하는 표준이 어느 정도일까요? 또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표준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문제를 놓고 한 시도 쉬지 말고 자기 점검을 해야 되고, 고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수련회에 참석해서 참 행복합니다. 시간 시간마다 귀한 종들을 세우시고, 참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폭포수와 같이 쏟아주시고, 여러분들도 말씀을 듣는 시간이나 기도하는 시간에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한국교회가 아직도 소망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앞으로 하실 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을 제 자신이 갖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새벽기도 설교를 들으니까 ‘한 영혼을 그렇게도 사랑하는구나’ 하는 찐한 감동이 전해지고, ‘아, 저런 자세를 가지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닮는 자세다’ 하는 것을 제가 느꼈어요. 또 오늘 아침에 새벽에 들은 말씀을 잘 기억하시죠? 어떤 장로님을 표준으로 놓고 ‘나도 저 장로님처럼 이웃을 사랑하자’. 그것을 따지고 보면 누구를 본 받는 것입니까? 누구를 본 받는 거예요? 예수님을 본 받는 거예요. 조금이라도 주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그 몸부림이, 그 교역자의 말에서 배어 나오지 않아요.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고, ‘아, 나도 저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각오를 또 한번 하게 됩니다. 또 저녁 집회를 맡은 정 목사님 설교를 여러분이 들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을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참 행복한 목회자 한 분을 보는 것처럼 우리가 느꼈어요.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렇게 행복할 수가 있다면 그 내면에는 몸부림이 있는 것입니다. 좀더 가까이 주님 앞에, 좀더 주님을 닮아, 좀더 주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계속 채찍질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고민과 몸부림이 그 배후에 서려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낄 수 있잖아요.

 

저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저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너, 제자훈련 목회를 늘 외치는 사람인데, 하나 내가 물어보겠다. 너는 나를 얼마만큼 아냐? 너는 나를 얼마만큼 알고 그러냐?” 이상하게 자꾸 그 음성이 떠나지를 않아요. 지금도 안 떠나요. “네가 자꾸 예수님을 닮으라고 그러는데, 너는 나를 얼마만큼 알고 있니? 도대체 얼마만큼 알고 있는 거야?” 그래서 저는 그 음성 앞에 마음에 작심을 했습니다. 이제 남은 생애, 좀더 예수님을 응시하자. 내가 오르지 못할 정상일지는 모르지만, 좀더 주님을, 눈을 크게 뜨고 응시하자. 밤이고 낮이고 주님을 응시하자.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목회 현실에서 일어나는 목회 문제 하나하나를 놓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그것을 계속 질문하자.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했다는 해답이 나오면 나도 그렇게 해보려고 몸부림을 좀 치자. 내 마음에 잘 들지 아니하는 교인을 놓고, 또 어떤 면에 내 마음에 고통을 주는 교인을 놓고 예수님이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3년 동안 끼고 다니면서 어떻게 하셨나?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아직도 덜 되먹은 그 제자들을 놓고 주님은 어떤 자세를 갖고 그들을 다루셨나? 좀더 내가 깊이 알자. 예수님은 한참 인기를 끌고, 승승장구 할 때에 그는 어떻게 처신을 하셨나? 주님을 좀더 내가 응시하고 내가 좀더 깊이 바라보면 주님이 하신 그 언동을 통해서 내가 닮아야 될 중요한 핵심이 있는 것을 압니다. 나는 좀더 주목해야 되겠다. 주님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잃어버리고 저 밑바닥까지 추락을 할 때 어떻게 하셨나? 주님은 그 순간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켰는가? 내가 좀더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면 내가 그런 처지에 빠졌을 때 분명히 주님은 대답을 하실 것이다. 세상에서 멸시받고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무언가를 실오라기라도 잡으려고 몸부림을 칠 때, 그 사람 하나에 대한 관심도 예수님은 어떠하셨나? 주님은 사람 대우받지 못한 여자 하나를 어떻게 다루셨나? 병으로 인해서 인생을 아예 포기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놓고 주님은 어떤 심령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셨는가? 나는 거기에서 배워야 되는 거예요. 좀더 배워야 돼요. 좀더 배우고 좀더 몸부림을 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갈 수가 있어요. 이거 포기하면 우리는 사역자로서 생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업꾼이요. 먹고살기 위해서 목사 일을 하는 사람이요.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붙들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아니할 줄 몰라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초점으로 맞추고 나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 “주여, 내가 안고 있는 이 문제를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항상 이렇게 물으면서 주님을 닮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나도 모르게 모든 성도들이 본받을 수 있는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이런 몸부림을 우리 모두가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표준을 낮추지 마세요. 우리의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완전한 자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그 표준이 너무 완전해서 우리 모두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럽지만, 그러나 표준을 낮추지 마세요. 대청봉을 오르려고 준비하는 사람하고, 에베레스트를 오르려고 준비하는 사람은 그 자세가 벌써 달라요. 생각이 달라요. 모든 것이 틀려요. 보는 눈이 달라요. 왜? 오르려고 하는 정상이 너무나 다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그분처럼 살겠다고 하는 정상을, 표준을 정해놓고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구별될 수밖에 없어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 표준을 낮추지 맙시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낮추지 맙시다. 절대 포기하지 맙시다. 절대 포기하지 맙시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칭찬하시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와 같이 집요하게, 고집스럽게 주님만을 응시하고 주님만을 본받으려고 하는 자세가 결국 우리 사역에 영광이 되고, 우리 사역에 능력이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능력을 우리가 갖고 있는 이상, 어떤 문제도 겁나는 것이 없어요.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도 겁날 것이 없어요. 세상이 종말을 향해서 달려가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구름 떼와 같이 일어난다고 해서 우리가 위축될 필요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앞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해결된 상황이에요. 천년 전에도 세상은 여전히 악했어요. 이천 년 전에도 세상은 여전히 음란했어요. 똑같아요. 우리는 금방 세상이 나빠지고 잘못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어요. 세상은 항상 똑같았어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상이 얼마나 악하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문제는 주님의 손에 쓰임을 받는 우리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냐가 문제예요. 우리 모두가 표준을 낮추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푯대로 삼고, 그분만을 향해서 달려가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목회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거룩함과 능력이 임할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 모두가 서로 쳐다볼 때마다 자랑스러운 동역자가 될 수 있을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부탁드립니다.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모였을 때는 뜨겁습니다. 기도할 때도 뜨겁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아멘’으로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만큼 그 분위기는 화려합니다. 그러나 일단 문을 열고 나가면 너무 처참합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 교역자들의 특징이에요. 교인들의 특징이에요. 문 열고 나가면 사람이 달라져요. 마치 싸우나 탕에 들어가 땀을 실컷 흘리고 나중에는 싸우나 탕 밖으로 나갈 때의 모습과 비슷해요.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돼요. 교회갱신협의회 수련회는 그래서는 안돼요. 오늘날 한국교회가 부흥회가 없어서 이 꼴이 되어 갑니까? 수련회가 없어서 이 꼴이 되어 갑니까? ‘아멘’ 소리가 낮아서 이 꼴이 되어 갑니까? ‘할렐루야’를 안 해서 이 꼴이 되어 갑니까? 더 솔직히 이야기 해 봅시다. 기도 안 해서 이 꼴이 되어 갑니까? 미국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어마어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기도를 적당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초라하게 보이는 이유가 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실추된 우리의 인격을 회복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그 표준을 다시 한번 정확하게 확인하고 힘이 들어도 십자가를 져도 자기 부인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그런 고달픈 삶을 살아도 그분을 닮아가려고 하는 몸부림, 이것만은 포기하지 맙시다. 이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마지막 시간이니까, 우리 한국교회를 가슴에 안고 <부흥>이라고 하는 고형원 씨의 찬양을 좀 함께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그 찬양 속에 우리의 탄식이 들어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찬양 속에 우리의 비전이 있습니다. 그 찬양 속에 하나님의 소원이 들어 있습니다. 이 찬양을 부르면서 아직도 예수님을 닮지 못하게 하는 우리 마음의 우상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이 우상을 불태우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을 우리가 다시 한번 회복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 찬양을 부르면서 다시 한번 성령의 바람이 불고, 진리의 말씀이 이 땅을 새롭게 하는 영광스럽고 거룩한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는 간절함이 우리 가슴에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부흥을 막는 어떤 악의 요소가 내 인격에 있습니까? 내 숨은 삶에 있습니까? 내 교회 안에 있습니까? 주여, 가르쳐 주옵소서.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면, 주님 앞에 회개하고 바로 서겠습니다.’ 하는 내면의 결단, 숨은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다같이 그 자리에 일어나셔서 <부흥> 함께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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