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차] 내적 치유와 영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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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내적 치유와 영적 회복
  • 주서택 목사
  • 승인 2002.08.2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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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20) 교갱협 제7차 영성수련회 선택특강

1. 제자화 사역과 내적치유 사역

저는 CCC라는 학생 선교단체에서 24년 동안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눈 팔지 않고 한 길만 계속해서 달려오고 있습니다.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의 이 학생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내일의 한국 교회의 장래와 이 한국 민족의 장래를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는가 하는 부담 속에서 선교단체에서 일을 해왔었습니다.

제가 CCC에서 사역을 계속해서 해오면서 제 사역의 한 분기점이 있었습니다. ‘민족교회의 복음화’라고 하는 한국교회의 큰 영적인 물결 속에 휩싸이면서 때로는 몇 천 명 때로는 몇 만 명의 집회들을 준비하고 그러한 집회들을 진행해 가면서 학생들을 전도하고 그들을 캠퍼스에서 양육하고 사역하는 제자화 사역에 저의 전체를 쏟아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조직 속에 있었기 때문에 또 그 조직이 추구하는 그 어떤 목표에 같이 합류하는 과정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제자화시키고 내면에 변화를 일으키는 그 사역보다도, 어느 사이 나 자신이 눈에 보이는 숫자와 외형적인 영역 속에 치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늘 마음속에 '이것은 아닐 텐데...' 라는 생각을 가지고 고민하는 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제 사역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있었는데 그간 제가 캠퍼스 속에서 양육하고 키웠던 제자들이 이제 이 정도 신앙의 훈련을 시켰으면 어느 곳에 내던져 두더라도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건강한 크리스천으로 능력 있게 살아줄 것만 같던 제자들의 삶 속에서 너무나도 많은 연약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주례를 해서 결혼까지 시켜 놓았던 제자들이 이혼 문제를 들고 나오기도 하고, 또 어려운 과정에서 직장을 선택해서 다녔지만 그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된 맛을 상실해 버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시켰고 아무리 제자화 훈련을 많이 시켰지만 그들 내면에서 변화되지 않고 있는 어떤 영역들, 그리고 훈련과 교육이 갖고 있는 한계점에 제 자신이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제자화 사역 속에 새롭게 적용시켜 나가기 시작한 것이 내적 치유의 사역이었습니다. 마음 속에 있었던 상처와 아픔들이 치유되지 않고 있을 때 아무리 훈련하고 성경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도 그 내면에 진정한 인격적인 성숙과 마음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 한사람 그 내면에 가지고 있었던 상처와 아픔들을 건드려 주고, 그런 상처들을 말씀을 기초로 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가 되고 회복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이 급격하게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는 한시간 집회에 참석해서 은혜 받고 그냥 고개만을 끄덕이다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생활 속에 일어난 성품의 변화였습니다. 인격 속에 새로운 성숙의 모습으로 달라져 가는 현상들을 많이 목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991년도부터 한국 CCC에서 내적 치유 세미나를 공개적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51차에 걸쳐서 이 세미나를 갖게 되었는데 저희 세미나는 2박 3일간 숙박을 하면서 진행을 하는 세미나입니다. 지금까지 만육천사백 명 정도가 참여해서 그들 속의 변화와 치유의 모습들을 일으키시는 성령의 현장을 수 없이 목격하면서 제 마음 속에 강한 확신과 또 개인의 영성의 변화와 영성의 회복, 또 한국교회의 내적 치유적인 사역이 모든 목회 영역 속에 활발하게 적용되고, 또한 한국교회의 성숙에 있어서 한 영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2. 내면의 개혁

진정한 개혁이 무엇일까? 진정한 영성의 회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술 담배 안하고, 교회 잘 다니고, 십일조 잘하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많이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면의 개혁,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크리스천의 삶이 종교적인 성향으로 얼마든지 흘러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네 가지 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잘 아시는 대로 길가밭과 자갈밭과 가시덤풀과 옥토밭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그 옥토밭을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옥토밭으로 형성된 사람들만 찾아다니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돌밭과 가시밭과 같은 사람들의 마음들을 옥토밭으로 만드는 작업을 오늘 우리 사역자들에게 위임했다는 사실을 저는 마음 깊은 곳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마음밭을 옥토밭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많은 문장력을 동원하고,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들도 동원하고, 설교학적인 입장에서 핏대를 올려가며 설교를 아무리 한다고 해도, 그 성도들의 내면의 마음이 옥토밭이 되어있지 않을 때 그 말씀은 튀게 되고, 한시간씩 외쳐지는 그 메시지는 허공을 치고야 마는 그런 현실들을 목격하면서, 이 마음밭을 옥토밭으로 만드는 작업이 우리 안에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밭이 옥토밭으로 변화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 이해력이 오늘 우리 목회자들에게 있어야겠습니다. 집에 전화기가 고장나서 그 전화기를 고치려고 해도 전화기 내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그 전화기를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식물 하나가 병들어 있을 때 그 식물에 꽃을 피우게 하기까지는 식물이 갖고 있는 특성을 이해하게 될 때, 하나의 식물을 건강하게 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사람의 내면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이해력이 없을 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가 도와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 예수를 많이 외친다고 해서 복음주의가 되는 것도 아니며 십자가를 많이 외친다고 해서 개혁주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깨어져 있고 상처받은 그 사람의 마음 어디에 십자가의 복음이 적용되어야 하는가? 부서져 버리고 묶여있고 억압되어 있는 그 사람들의 마음의 어느 부분에 이 십자가의 보혈을 가져다 놓아야만 그 부분이 변화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성령의 능력과 십자가의 능력을 적용해 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들이 전부 심리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돕기 원한다면 성령은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넉넉하게 주실 수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를 찾아오는 초신자들의 특성들을 들여다 보면, 전도를 못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이 기도를 못해서 교회 가서 기도를 배우겠다고 나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바로 마음이 아파서 교회를 옵니다. '이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풀 수가 있을까?' '이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받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가슴에 안고 교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신사 숙녀처럼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마음이 깨져 버리고 부서져 버린 마음을 위로받고, 고통받고 있는 문제로부터 자유함과 회복받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아픈 마음들이 회복이 되고, 치유가 되고, 새롭게 건강함을 찾아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일부는 마음의 문제는 교회가 터치할 부분이 아니니 마음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나 심리학자를 찾아보라고 합니다. 교회는 죽은 후 구원받는 영적인 문제만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구조 속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진정한 치유와 마음의 변화를 교회 안에서 이루어갈 수 없게끔 만드는 벽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또는 많은 현장에서 목격해 오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마음의 치유를 받지 못하고 마음이 이해받지 못하고 회복되지 못하면 갈 곳은 뻔합니다. 심리학자나 정신과나 아니면 기를 충전시켜서 마음을 회복시켜 준다는 동양철학을 찾아간다거나 하는 이런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아픔 마음들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세미나를 할 때 사전등록제를 실시합니다. 그래서 집회현장에서는 등록을 받지 않고 사전에 집회숫자에 맞추어서 등록을 받습니다. 세미나를 하게 되면 거의 한달 전에 등록이 마감되곤 합니다. 지난 8월 5일부터 7일까지 3일 동안 이 자리에서 830명 정도를 모시고 내적 치유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분들이 내적 치유 세미나에 찾아오는 겁이니까? 저는 교회 밖에서의 이런 세미나가 원래는 교회 안에서 진행되어 성도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끌어안고 같이 나누는 사역이 활발히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 밖에서까지의 이런 치유 세미나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3.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인간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해야 되겠는데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역자들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때 양극단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미숙함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분들의 눈으로는 모든 성도를 두 종류로만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자, 한사람은 귀신에 붙잡혀 있는 자의 두 갈래로 극단적으로 나누어 대처를 한다고 하면, 그런 목회자 밑에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많은 상처와 아픔이 가중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때 강단과 성도들의 사이에 큰 간격이 생기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살아있는 나 자신의 문제가 오늘 이 교회 안에서 해결되지 못할 때 교인들은 일상적인 개인의 많은 문제들을 숨기게 되고, 또한 목회자들은 강단에서는 존경을 받습니다만, 그러나 그 목회자와 일생을 같이 살고 싶지 않는 존경받는 왕따가 바로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목회자가 교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교인들의 상처와 아픔들을 어루만져가면서 그들을 치유하는 그런 영역에서 대해줄 수가 있다면, 성도들은 저 목사님과 평생을 같이 걸어가야 되겠다고, 저 목사님과 내 인생을 같이 동행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동반자적인 의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강단과 십자가의 큰 간격이 생기게 되고, 성도들의 마음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존경은 받지만 마음은 멀어져만 가는 관계가 형성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4.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람들은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 보면 너무도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한번도 자기의 아버지에게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따뜻한 눈길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살아온 사람도 있으며, 부모에게 거부당한 상처와 아픔들, 그리고 지나간 인생의 과정 속에서 누군가에게 모함을 당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자존심과 인격이 짓밟히는 어떤 인격적인 살인과 자존심의 살인을 당해버린 상처와 아픔을 가슴에 담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분들의 상처와 아프이 회복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교회를 20년, 30년을 다니고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들의 삶이 성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런 고백을 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장로님은 장로님이시지만 어떤 때에는 전혀 장로님의 모습이 아닌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신다는 겁니다.

지난 7월에 충청북도 영동에서 목회자가 가족들과 더불어 동반자살을 했습니다. 조금 알려지기도 했습니다만, 그 내면에 어떤 이유들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목회를 했던 목회자의 가족이 동반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결과, 저를 찾아왔던 목회자들이 살고 싶지 않다고 했던 고백들을 저는 많은 목사님들에게 들어왔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목회가 도저히 감당이 안될 뿐만이 아니라 내가 도저히 살고 싶지 않다는 고백, 내가 내 생명을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죽음 속에 빠져 있는 목사님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구하는 많은 시간을 구해본 적도 있었습니다.

 

1) 인간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경험되어진 모든 사건들과 기억들을 몸과 영혼 전체에 저장시키는 존재이다.

이런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사람들은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의 성숙과 인격의 성숙에 있어서 발목이 붙잡힌 것처럼 그 사람들의 변화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이 부분만 변화가 되고 이 영역만 달라진다면 내 인생은 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내 사역이 달라질 것 같은데요” 라고 고백하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하나의 간증문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작년 8월에 45차 내적 치유 세미나를 했을 때 지방에서 오신 목사님의 간증문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사용해도 된다고 하셨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분은 50대가 지나신 나이로 상당히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또한 신학교도 운영하시는 분이시기에 이름을 내놓으면 많은 분들이 알 수 있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 담담하게 간증문의 말문을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가정의 소중함을 알고 치유에 관심이 있어 10여 년 동안 세미나를 순회하면서도 해결치 못한 불안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적인 성결에서의 실패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예쁜 여자아이에 대한 짝사랑이 나이가 50이 넘도록 계속되는 것입니다. 예쁜 여자만 보면 마음이 흔들려서 7일 이상만 되는 금식도 여러 차례 해볼 정도로 내 자신을 닥달해 보았지만, 교회가 어렵고 재정적인 문제가 있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그런 문제만 해결되면 여지없이 튀어나와 나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삶이 열 두 살에 어머님을 여의고 계모 밑에서 고학을 하며 동생들을 거두느라 가져야 했던 짐과 고독 등이 원인이 되었을 거라 생각되었기에, 이제는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성결과 거룩함이 주어지므로 갈등이 덮어지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과정 속에 이번 CCC 내적 치유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의 과정 중에 그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다가 자주 오줌을 싼 것 같습니다. 그 날도 오줌을 싸서 아버지가 키를 머리에 쓰고 바가지를 들고 옆집 가서 소금을 얻어오라고 시키셨습니다. 기억조차 희미한 그 장면이 떠오르면서 수치심 속에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성적인 탐닉 시기인 청소년 시절에 시작했던 자위행위, 결혼 이후에 성적인 방황과 음란영화 탐닉 등의 뿌리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아무도 없다면 있는대로 소리질러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때 주님은 무엇을 하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선명한 생각 속에 주님이 보였습니다. 주님이 형님 같은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시더니 나의 오줌이 축축한 바지를 벗기시고 갈아입혀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형님 같은 느낌의 주님은 나를 등 뒤에 숨으라고 하시고 나 대신 소금을 얻으러 가주시는 생각이 내 마음 속에 너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저는 그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울고 있는 내 마음으로 조용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잘못된 사랑으로 수치심을 너에게 주었지만, 나는 너를 잠잠히 사랑으로 안아주고 싶다. 나는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네가 성적으로 방황할 때도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뒤를 이어서 또 하나의 장면이 보여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벌거벗은 수치심으로 떨고 있는 나에게 주님이 겉옷을 벗어주시고, 내 앞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피 흘리신 두 손으로 주님의 아랫도리를 가리우시면서 수많은 자들의 돌팔매질과 비웃음을 당하면서 나를 가려주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 주님의 뒤에 숨어서 그 수치의 십자가의 뒤를 따르며 가는 영상이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만은 50여 년 평생 나를 괴롭혀온 성적인 욕망과 괴롭힘의 수치심으로 두려워 떨었던 나의 모든 죄에서 벗어났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성적인 욕망 속에 내가 붙잡힐 때마다 나 대신 벌거벗기시고, 나 대신 수치를 당하며 내 앞에 가신 주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제야 스바냐 3장 17절의 고백이 나의 마음에 깊숙이 스며듦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그 목사님은 앞에 나오셔서 간증도 하시고 간증문도 기록으로 직접 남겨주셨습니다. 정직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과 주님의 치유 역사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시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오늘 이 순간 생생하게 어떻게 나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인가를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고백했던 작년 8월의 그 시간을 매우 잊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만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묶여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이 부분만 변화가 된다면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갈급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되어진 사건이나 기억들을 몸과 영혼 전체에 저장시키고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은 온전한 신부로서의 영적인 성숙과 함께 마음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따라와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속사람은 변화가 되지 않았는데 겉사람은 자꾸 이 옷 저 옷을 걸쳐 입기 시작하면, 교회 안에서는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보여지기 시작하고, 세상에서는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이중적인 삶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인적인 구원의 역사를 이야기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영적인 구원과 함께 내면의 변화 마음의 변화가 자연히 수반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영적인 구원의 역사와 함께 마음의 진정한 변화를 일으켜줄 수밖에 없는 곳은 교회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몸처럼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이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되지 않을 때 이것들로 인한 상처들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2) 마음은 몸처럼 상처를 입을 수 있으며 상처입은 마음이 치유되지 않을 때 반드시 삶 속에 그로 인한 결과가 나타난다.

아래에 있는 그림을 보시면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시커먼 부문은 우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고, 그 위에 있는 나무 뒤에 서있는 것은 우리의 삶의 태도와 생활의 현장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내 성향과 인격성 속에서 태도 속에서 나도 온전치 않고 또 다른 사람들도 온전치 않는 가시 엉겅퀴와 같은 많은 성향들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회개도 하고 작심도 하고, 때로는 금식도 하면서 자꾸 그것을 끊으려 노력해 보기도 합니다. 또 윤리와 도덕적인 자태를 가지고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나 자신을 향해서 책망하며 가시엉겅퀴와 같은 것들을 잘라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라내었지만 또다시 시간이 흐르면 그 가시 엉겅퀴는 내 성향 속에 나타나 나를 괴롭힐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문제는 뿌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 뿌리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계속적으로 내 삶을 괴롭히는 그런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부정적인 성향이나 죄성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겉으로 드러난 부분을 도덕적으로 또는 윤리적인 잣대로 제거했다고는 하지만 그 영향력 속에 계속해서 묶여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뿌리를 쓴 뿌리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시면 "그 쓴 뿌리를 마음에서 제거해야 한다. 그 쓴 뿌리는 나를 괴롭힐 뿐만 아니라 나를 만나는 다른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마음 속에 이 쓴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 그 교회에 몸담고 있는 성도들이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쓴 뿌리가 뽑혀져 나가고 그 마음에서 해방된 풀려난 기쁨과 감격 속에서 그 목사님뿐만이 아니라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도 그 마음 속에서 자유함을 갖게 되고, 많은 상처와 아픔들이 치유되고, 그들 속에서도 그 쓴 뿌리가 뽑혀져 나가는 현장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쓴 뿌리는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 속에서, 때로는 어머니 태 중 안에서부터 경험했던 것들로부터 우리가 경험했던 사건과 일들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는 아주 부정적인 씨앗이 심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마음 속에 떨어진 부정적인 씨앗 때문에 그것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내 마음 안에서 자꾸만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변화가 되지 않고, 내 신앙 성장에 결정적인 걸림돌의 역할을 하는 요소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쓴 뿌리를 뽑아내고 이 쓴 마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우리는 내적 치유의 한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러한 것을 용서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바르게 처리되지 않는 과거는 현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실 아무리 도둑을 많이 맞아도 사람이 도둑맞고 자살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은 없으시죠? 그러나 누군가에게 오해되는 말 한마디, 나를 멸시하는 말 한마디, 내 인격을 짓밟는 말 한마디, 그런 말 한마디를 듣고 사람들은 마음이 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1년에도 사람들은 생각없이 던진 말과 내 속사람이 받은 상처와 아픔 때문에 삶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몸처럼 이 마음이 깊은 상처를 입게 되고 이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되지 않고 있을 때 그의 삶과 신앙과 개인 감정 속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처리되지 않은 과거는 현재의 삶 속에서 부정적인 삶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4) 한 사람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준 사건은 그 속에 그의 자아의 일부분을 가둔다. 자아는 그 사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생각하고 해석하고 자신의 인생관을 만든다.

치유된 상처와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굉장한 차이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도 뼈가 한번 부러져서 붙은 뼈는 뼈가 굉장히 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몸에 어떠한 상처가 나서 곪아 있을 때, 이 곪아 있지 않은 건강한 피부는 어떤 것에 부딪혀도 별로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곪아있는 상처를 가진 피부는 어디에 조금만 스쳐도 아픔이 배가 되어 그 고통이 우리의 전체 삶에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상처가 치유되어져 있는가? 아니면 치유되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곪아가고 있는 상처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사람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준 사건은 그 속에 그 자아의 일부분을 가두게 됩니다. 자아는 그 사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생각하고 해석하고 자신의 인생관을 만들어 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저희 세미나에 교도관 한 분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자기의 부인과 함께 참석하셨습니다. 세미나가 끝나고 그 분이 간증을 하시는데 이런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내적 세미나에 오게 된 동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자기 안에 무언지 모르는 불안함과 긴장감이 자기의 평생을 따라다니고 있는데, 그 부분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가지고 있는 증상은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오고 친구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부인 곁에서 이 남편이 떠나지 못하고, 아들들도 밖에 나가지 않고 계속 한 여자의 치마만 붙잡고 집 안의 남자 셋이 있기 때문에 이 부인이 너무도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지도 모를 불안함과 긴장감에 싸여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떠나 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희 내적 치유 세미나는 15개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2박 3일 동안 아침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살인적인 스케줄을 진행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들은 내가 좀 쉬러 왔는데 세미나 시간표를 보니 질려버린다고도 하십니다. 사실은 4박 5일 정도의 과정을 집약을 해서 2박 3일의 시간을 맞추다 보니 빡빡한 스케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쉬기 위한 세미나 참석이었지만 나중에 돌아가실 때는 정말 나에게 쉼이 되었다는 많은 목사님들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런 시간 속에서 교도관 부부는 하나님께 자신도 알 수 없는 불안함과 긴장, 그리고 초조함 속에서 자신이 살아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묻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물어보는 기도는 굉장히 중요한, 신앙 성숙과 영성 회복에서 중요한 기도한 기도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천주교에서는 30분 정도의 기도시간 속에서 주님께 물어보는 기도시간이 대략 20분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개신교에서는 주님께 물어보는 기도생활이 훈련되지 않아서 저희의 세미나 시간 속에서는 주님께 물어보는 것, 내 안의 성령님께서 나에게 떠오르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물어봐야 한다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도 하나님께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불안함과 초조 속에 살아야 하는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내게는 안정된 직장이 있고, 자식도 잘 크고 있고,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 속에 자신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 그러니까 기억 속에도 전혀 살아있지도 않았던 기억 하나가 이 분 속에 강하게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린 시절에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늘 싸우는 장면을 많이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싸우게 된 원인이 아버지가 화투를 치고 밤이 늦도록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많이 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한번만 더 화투를 치느라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는다면 집을 나가겠다고 엄마가 이런 소리를 하면서까지 굉장히 큰 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이가 자면서 부스스 하고 깨어나는데 위에서 부시럭거리며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이불 속에 있는 상태에서 보니까 엄마가 옷장에서 옷을 하나하나 꺼내서 옷 보따리를 싸게 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집을 나가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이 어린 아이가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일어나서 엄마를 막아야 하는데 그럴 힘은 없고, 이불 속에 누워서 잠자는 척 하고 있으면서 ‘엄마가 가면 안 되는데... 엄마가 가면 내가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엄마가 옷 보따리를 싸고 이 아이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엄마가 집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이불 속에 차마 일어나지는 못하고 엄마 가지 말라고, 가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루터가 생각났습니다. 이 집은 육지로 나가려면 나루터를 타고 건너야만 육지로 나갈 수 있는 고립된 조그마한 섬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룻터에 배를 묶고 있는 밧줄이 생각났습니다. 엄마가 배의 밧줄을 풀어서 배를 타고 노를 저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을 하고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룻터로 가보았지만, 엄마는 벌써 밧줄을 다 풀어 배를 타고 노를 젓고 계셨습니다. 그 아이가 떠나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가지 않기를 소리쳤습니다. 그러면서 그 배의 밧줄을 붙잡게 되었는데 엄마가 “빨리 밧줄을 놔라. 엄마는 갈 테니 아빠와 같이 살아라.” 아이는 안된다고 엄마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 울며불며 매달리면서 붙잡은 밧줄에 의해 물 속으로 점점 따라 들어가면서도 밧줄을 놓지 못했습니다. 물이 허리춤 정도 차올라갈 때 엄마가 더 이상 노를 젓지 못하고, 다시 뱃머리를 돌려 물가로 나와 아이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잊혀졌던 기억 너머의 희미한 생각이 이 분 속에 생각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이 사건이 오늘의 나의 이 삶에 무슨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물어봤다고 합니다. '주님! 그때 엄마가 배를 타고 떠나려고 했을 때, 밧줄을 잡고 엄마가 떠나지 않기를 외쳤을 때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성경에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성경은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 때에도 주님이 나와 같이 있었습니까?' 하고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의 마음 속에 하나의 장면이 너무도 뚜렷하게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엄마가 떠나려는 밧줄을 붙들고 끌려가 물 속에 빠져 가고 있는데, 자신의 손 위에 어떤 큰 손 하나가 덥석 잡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되돌아 보니 자기의 뒤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감싸며 자기와 함께 그 배의 밧줄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이 분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분 속의 감정들이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통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보니 나룻가에서 자신이 엄마와 끌어안고 울고 있을 때, 예수님이 자기와 자신의 엄마를 함께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분의 마음 속에 '그 때도, 엄마도 나를 떠나려 했던 순간에도 예수님은 나와 함께 계셨구나! 예수님은 내 아버지가 되셨구나!'라는 그 사실이 마음속에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마음 속의 불안함과 긴장감들이 풀려나는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주님의 치유의 간증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의 '엄마 가지마!'라는 제목을 따서, 제가 “내적 치유 엄마 가지마”라는 제목을 그 분의 간증에서 따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지나간 우리의 삶의 어떤 영역 속에서 우리에게 충격적인 아픔과 또 상처와 고통을 준 사건들은 우리의 자아의 일부분을 가두어 버리게 되고, 그 갇혀진 자아가 오늘 우리가 성인이 되었지만 그런 아픔과 상처가 바르게 처리되지 못했을 때 오늘 우리의 삶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고, 잘못된 인생관을 만들어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그 안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자라기 어려우며 감정은 왜곡된 사고를 따라 계속 고통 속에 있게 된다. 그로 인한 부작용은 여러 영역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성장하기가 어렵고, 감정은 왜곡된 사고를 따라서 계속 고통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부작용은 여러 영역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아이들은 오로지 자기의 어머니, 아버지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가 자신의 신과도 같고 탯줄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머니를 의지하고 있는데 그 어머니가 자기에게 아주 치명적인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태어나지 말아야 될 것이 태어나서 귀찮다.” 이렇게 어린 아이를 향한 말 한마디가 그 아이는 큰 당황함 속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내 엄마에게 아무런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닌가, 나는 이 땅에 태어나지 말아야 될 존재가 아닌가!’ 그러면서 그 어린 아이의 자아 일부분이 갇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6) 구덩이에 갇힌 사고가 만들어 내는 삶의 결과들

그런데 그런 크고 작은 구덩이가 우리 인생을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많이 형성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어머니 모태 안에서 받았던 영향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내적 치유를 진행하고 이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많은 분들을 접하게 되고 상담하는 과정 속에서, 그 어머니의 모태 안에서 받았던 상처가 사람의 오늘의 삶에 많은 부정적인 삶을 계속해서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엄마에게서 태어나면서 이 탯줄을 끊게 되는데, 이 정신적인 탯줄을 내 목에 감고 부모로부터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계속 내 인생 속에 전가시키고 있는 그런 삶의 현장들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어떤 당황스런 사건과 또 구덩이에 갇혀진 사고가 우리에게 어떤 삶의 결과들을 만들어내겠는가? 어떤 개인 관계에 대한 어려움, 일반적인 관계는 잘하는데 어떤 개인적인 깊은 관계를 전혀 형성하기가 어려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앞에서는 설교는 잘하겠는데 교인들과 개인적인 상담을 한다거나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고 호소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개인적인 관계가 어려운 결과, 너무 낮은 자존감에 묶여있는 어떤 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가 아주 부정적으로 형성되었을 때 이 사람의 삶의 영역 속에서 너무 많은 쓴 뿌리의 부작용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열등의식이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 정도가 아주 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열등의식은 비교의식 속에서 나오게 됩니다. 누군가와 자꾸만 비교하게 되면 열등의식이 생기게 되고, 열등의식은 피해의식 속에 그 사람을 가두게 됩니다. 피해의식 속에 묶여 있으면 좌절하게 되고 이 증상이 심해지면 우울증에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우울증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될 것인가? 저는 많은 목회자들의 우울증을 대면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이 결과적으로 어디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낮은 자존감에서부터 우울증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감각한 감정상태,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기뻐도 웃음도 없고, 행복도 없이 감정이 완전히 굳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국화꽃 한 송이를 보아도 '가을이 되어서 꽃이 피었구나' 생각하고 국화꽃 한송이를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고 간밤에 무서리가 내리고 등등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봄이 되면 진달래가 피었구나 생각하지, 추운 겨울을 뚫고 그 딱딱한 나무 속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숨겨있어 감격해 하는 감정 상태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역을 하면서 메시지를 전할 때 받는 사람의 마음 속에 메시지가 느껴지지 않을 때, 그 메세지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마음 속에 말씀이 느껴질 때 사람은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보를 유창한 언변을 동원해서 전파한다 할지라도, 그 메시지가 내 마음 속에 느껴지지 않으면 그 내면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성도들의 마음에 메시지가 느껴질 수가 있을까? 이 메시지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눈물을 담고, 피와 땀을 담을 수가 있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이 메시지로 통하여 성도들의 가슴 속에 정말 느껴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성을 말할 때 지, 정, 의를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저희 CCC에서 갖는 신앙의 개념 속에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기를, 감정에 붙잡히지 않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감정에 상관없이 믿음으로 나가기를 훈련시키고 적응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무시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감정이 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영역입니다. 길을 지나치던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음 속에 필링이 느껴졌다는 것만으로도 평생의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기도 합니다. 한순간의 그 느낌 하나가 평생 그 남자나 여자에게 묶이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느껴질 수 있는 감정의 상태가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말씀 사역은 굉장한 영역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 묶여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감정이 굳어져 버린 길가밭이다 보니 아무리 많은 말씀들이 선포되어도 말씀을 느낄 수 없는 무감각한 상태, 냉소적인 태도, 우울증과 강박적인 사고, 집착과 중독증 성향, 부정적인 말과 태도, 영적 삶의 심한 굴곡 현상, 지속적인 분노나 지속적인 근심 등과 같은 많은 현상을 나타낼 수가 있겠습니다.

한번은 저희 세미나에 사모님 한 분이 집회가 끝나고 꼭 저를 만나고 가신다고 하셔서 그 분의 딸과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교인이 한 80명 정도 되는 시골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저를 만나 얘기하려고 하는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제가 목사님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 남편 목사님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는데 목사님께서 최고급 그랜저를 타고 다니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재정을 목사님이 관리하시면서 콩나물 천원 어치를 사려 해도 일일이 목사님께 받아서 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전혀 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골이다 보니 성도들이 평일 내내 농사만 짓고 오다 보니 몸은 지치고 교회 안에서 졸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그 졸던 사람을 앞에다 일으켜 세워놓고 설교를 하신다고 합니다. 예배 끝날 때까지 세워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교회가 하나뿐이라 교인들이 다른 교회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교인이 우리 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사모님께서 눈물로 하소연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목사님의 차를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컹거린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차 치장은 또 얼마나 하시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차 먼저 닦고 차 내부에다가는 최고급 악세사리를 달고 다니는데, 어떻게 해야만 목사님을 변화시킬 수가 있는지, 세미나나 집회를 여러 차례 권해도 보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내가 직접 받고 말씀을 전해야지 내가 무슨 세미나를 다니느냐?"며 다른 아무런 말씀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남편 목사님에 대한 아픔과 고통들을 얘기하시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 대학 다니는 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 딸 아이 때문에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남편이 가지고 있는 어두움의 굴레, 그 분 속에도 어떤 큰 열등의식에 묶여 있거나 어두움의 마귀의 짐과 같은 영역 속에 묶여 있다거나, 그가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과정 속에서 충격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보호하고 감쌀 수밖에 없는 상처와 아픔을 너무 깊게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 증상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으며 그런 부분들을 풀어가기 위해서 제가 쓴 책을 권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저의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 라는 책을 목사님 모르게 책상 위에 올려 두었지만 전혀 읽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사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신학교에서 목사안수를 주고 가르칠 때 변화시키지 않은 채로 배출하느냐? 변화되지 않은 목사님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너무도 불쌍하다"고 하십니다. 이 사모님의 눈물 섞인 고백이었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볼 때 구덩이에 갇힌 깊은 사고가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봅니다. 바르지 못한 몇 가지의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5. 바르지 못한 사고방식들

1) 첫째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지나간 모든 것들은 현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묶여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변화되어져서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이제 변할 수 있는 길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병과 같아서 건강한 자들만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회복한 자와 또 건강해지기 위해서 교회 안에 성도들이 모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루 아침에 성자가 되어 아무 문제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적인 아픔과 상처들이 치료가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꼭 내적 치유 세미나에 가야만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한시간 예배를 통해서도 많은 부분이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찬송 한 곡조가 가슴 속을 울릴 때에도 묶여 있는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회복되기도 합니다. 한국에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내적 치유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내적 치유 세미나가 필요하고, 내적 치유 집회가 필요한가? 내적 치유 적인 메시지가 필요한가? 그것은 그렇게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변화되지 못했던 부분들, 여전히 강하게 내 속 사람을 묶고 있는 굴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집중적으로 전문적인 영역에서 내면적인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특별한 내적 치유 집회라든가 내적 치유적인 메시지가 우리에게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는 정서적인 장벽과 성격의 장애들이 신앙 생활과 성경 지식이 쌓아지면 자연히 없어지지 않겠는가, 내면적인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할 필요가 있는가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인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를 전혀 무시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마음의 문제가 이해가 됩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전개되는 곳에는 마음의 아픔과 고통들이 풀어지고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지식과 정보가 계속 쌓여지면 그 사람의 정서적인 문제와 감정의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성령의 역사가 바르게 전개될 때 인간의 마음은 무시되지 않고 이해받게 되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 또한 성격은 타고난 것이기에 변화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성격은 바뀌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꽉 묶여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목사님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성격은 타고 난 것이기에 바뀌어지지 않는다며 구타하시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계시지 않겠지만, 한번은 어떤 사모님 한 분이 제게 개인적인 상담을 요청하셨습니다. 남편의 구타에 사모님이 견딜 수가 없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병적인지 이 사모님을 구타하지 않으면 설교를 못할 만큼이랍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사모님께 나를 좀 묶어달라고 고백을 할만큼 정도가 심하다고 합니다. 사모님을 마음껏 때려야만 마음이 풀어져서 정상적으로 설교 할 수 있을 만큼 병적인 상태에 묶여 있는 분이 계십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자기 속에 있는 분노, 억누를 수 없이 불끈불끈 끓어오르는 분노를 승화시키지 못한 상태 속에서 그것이 메시지 속에 묻어나고, 가족들 속에 묻어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성격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성격이라는 것과 기질을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실 기질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면적인 성향들, 우리가 꽃을 보아도 진달래꽃이라든가 능수화라든가, 또 여러가지 꽃들이 있는데 꽃들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개체적인 특징은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이 땅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을 기질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뀌어지지 않으며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격,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인간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성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가 어머니 태중에서 받았던 후천적인 어떠한 영향적인 것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우리의 인간성이 바꾸어집니다. 우리의 성품이 바뀌어집니다.

아무개 성질 대단하고 못났다고 하는 이야기 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사역하면서 많은 목사님들을 대하게 되는데, 저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오랜 동안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을 대하면 정말 형님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기대고 싶은 그런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어떤 목사님들은 생각만 해도 무서워지는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럼 나도 저 목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무서운 생각이 드는데 교인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목회자의 성품이라면 아버지 같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난주 주일 오후에 서울 할렐루야교회의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을 만나서 같이 얘기하다 보니, 이분의 성품이 아버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기대고 싶고 내 마음 속의 문제들도 고백해 보고도 싶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목사님들은 칼날 같이 사늘한 겨울바람처럼 생생 불어오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성격은 타고난 것이라 바뀌어질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품으로 우리의 성품이 변화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예수를 믿고 나서 너무도 많이 변했습니다. 내 성품이 너무 많이 달라지고 새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면적인 상처와 아픔들이 치유가 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은혜를 입고 성령의 능력 속에서 우리의 성품인 인간성이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36장을 보시면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게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우리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 또 한 가지, 내적 치유란 말을 들으면 혹시 나를 건강하지 못한 병자로 취급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다 치유되었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보기도 합니다. 무식이라는 것은 얼마나 용감한지 우기는 데는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선교단체에 오랜 동안 있으면서 para church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이해하게 되고, local church에 있는 목사님들께도 부탁하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선교단체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 목사님들이 조금 이해해주고, 받아주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해주셨으면 하고 생각해볼 때가 많습니다. 선교단체라면 무조건 부정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요즘은 그런 분들을 찾기가 어렵습니다만, 청주에는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무조건 선교단체는 반대합니다. 선교단체라면 무조건 거부하고 아예 이단에서 일하는 것처럼 생각해 버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선교단체는 교회를 마지막까지 섬겨야 합니다. 선교단체가 존재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 선교단체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단체는 한국교회를 위해서, 한국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저는 제가 키워낸 수많은 제자들에게 의식화시켰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선교단체들을 후원하면서 서로 감당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한국교회의 민족복음화는 좀더 앞당겨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때로는 외로운 투쟁을 해야하는 많은 선교단체를 안아주시고 수용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내적 치유라는 말만 들어도 아주 불쾌해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수 믿고 변화되어 나는 치유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정말 자신의 마음 중심에 진실로 물어 보십시오. 정말 당신에게는 변화될 것이 없습니까? 당신의 신앙의 성장과 인격의 성숙에 있어서 당신은 변화될 것이 없는 성자와 같은 사람입니까? 저는 한때 성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포기했지만 성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성자가 될 수 있을까의 첫 번째는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차단하는 것 이것이 저에게는 제일 큰 관건이었습니다. 왜 그렇게도 저의 생각 속에는 세상적이고, 더럽고, 추악한 정욕적인 것이 많은지, 나와는 상관도 없이 내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 세상적이고 더럽지 않은 생각이 아니,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채널이 나에게 맞추어져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성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장기간의 금식기도도 해보았습니다. 한 20일 정도의 금식기도를 하다 보니 생각이 다 차단되기 시작했습니다. 금식기도 오래 해보신 목사님들은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한 20일 정도가 지나면 생각이 차단됩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생각은 멈추어지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 채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저는 그때 성자가 된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금식기도를 더해서 한 달이 되어 성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기도원을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금식기도를 마치고 3일 되니 금식기도 전과 똑같아졌습니다. 또다시 내 안에 세상의 생각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과거에 몇 십일 금식하고 은사 받았던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늘 하나님과 내가 개인적인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내가 오늘을 어떻게 인도받고 있느냐가 신앙의 중요한 현 주소이고, 나는 끝까지 이 부분을 내가 싸워야 할 것이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을 때까지 성화가 되어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6. 우리의 내면적인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하는 사역을 예수님은 중요한 사역으로 여기셨다

우리의 내면적인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것을 예수님은 성경의 여러 곳을 통하여 역설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만 의원이 필요하다“ ”나는 건강한 자를 찾아오지 않고 병든 자를 찾아 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내면 속에 변화되어져야 하고, 회복되고 치유되어야 할 영역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도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그가 찔림으로, 그가 상함으로,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모든 죄에서 용서받는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61장 1절에도 “주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또한 예언 말씀 중에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마음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마음이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 공동체로서의 영성 회복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사역 중에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변화, 내면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목회의 중요한 사역을 위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조직체가 아닙니다. 세상의 조직체와 하나님의 공동체는 분명 목적이 다릅니다.

이 조직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조직을 설립한 오너의 이익을 위해서 조직은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너는 조직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데리고 있지만, 현재보다도 더 조직을 위해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하면 전에 있는 사람은 밀어내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조직이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공동체는 공동체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공동체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감동있게 들었던 영국 나브리 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한 청년의 이야기였습니다. 이분은 태어날 때 선천성 기형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팔꿈치 밑으로는 팔이 자라지 않고, 또한 한 다리가 무릎 밑으로 더 이상 자라지 않은 선천성 기형아로 이 청년이 태어났습니다. 이 청년이 처음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엄마가 아이를 보기 전에 아빠가 아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우리 아이 어때요?” 그러자 남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요 녀석은 다른 녀석들보다도 우리 사랑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녀석이야.”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공동체는 바로 이것입니다. 연약한 존재가 더 귀하게 여김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동체인데, 오늘 우리가 사역하고 있는 사역의 현장을 조직체로 만들어 갈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로 회복시켜 갈 것인가? 여기에 중요한 관건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진정한 사역의 현장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사역의 현장의 목적을 사랑이라든가, 생명이라든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않고 능력을 선택하다 보니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조직체가 되어져 버리는, 조직으로 교회가 자꾸만 변모해 버리는 현실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3) 나는 누구인가?

저도 선교단체에 오랜 동안 있다 보니 선교단체들이 조직화되어 버리고, 조직 속에서 보는 영역들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사역의 현장을 마지막까지 공동체로 만든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가치를 주님의 관점에서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존재를 주님의 안목에서 보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한 사람 한 사람 내면의 개혁에 우리 사역의 초점을 맞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외형적인 영역,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관 속에서 우리의 사역을 바라보게 되고, 그렇게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교의식과 열등의식 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목회의 피해의식에 빠지게 될 것이며, 우리의 자존감은 낮아지게 되어 목회가 행복하지 않고 재미도 없이 그냥 목회에 끌려가는 것처럼 십자가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목회사역이 변질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8. 자존감의 회복과 영성 회복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낮은 자존감을 회복시켜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어져 있는 것인지,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이것이 내 안에서 먼저 온전하게 회복되지 않고서는 우리 교회의 영성을 회복하기도 어렵고, 공동체로서의 부흥도 어렵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존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거지같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지처럼 밥을 먹고 잠을 잡니다. 그러나 왕자 같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왕자처럼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자게 되는 색깔을 가지게 됩니다.

인간이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형성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여러분 모두에게 조용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떤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오늘날 우리 사역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우리의 영성은 회복되기 어려우며, 우리가 섬기는 사역의 현장이 공동체로서의 회복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식이 만들어낸 거짓된 두 가지 신분증이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첫째는, 나는 우연히 만들어진 별로 중요하지 않는 존재라는 신분증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묶이게 된 이유는 나 자신이 부모라든가 동료로부터 의미있는 존재가 되지 못할 때 이러한 인식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또 하나의 잘못된 신분증은 나는 잘못 만들어진 실패작이고, 다른 사람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신분증에 붙잡히게 됩니다. 이런 것들에 붙잡히게 되는 이유는 물질적인 가치관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획일적인 가치관 속에다가 자기 자신을 자꾸만 비추어 보다 보니 이런 인식에 붙잡히게 되고, 이런 신분이 나 자신인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내 속사람이 어떤 신분증을 목에 매달고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저도 한 때는 가치없는 존재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세상에 얼마 정도의 물질로 나 자신을 평가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묶여서 살기도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통사고로 죽어야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교통사고로 죽으려 했었는지, 그 결심의 배후에는 제 삶의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의 부모님들은 농사를 짓는 분들이셨습니다. 저희는 일곱형제로 아홉식구가 살아가는데 6.25 전쟁 후로 우리 한국에 보릿고개가 생생하게 있었을 때, 부모님의 농사만으로 아홉식구가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흉년이 들어 저희 가정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아버지께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자전거로 싣고 나가서 그것을 팔아 식량으로 바꿔오시면, 그것을 죽을 만들어 우리 자녀들을 먹이시는 매 끼니를 겨우겨우 이어나가는 그런 날들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저희 식구들이 아침도 점심도 먹지 못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온 식구가 큰 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일가족이 생활고를 비난해서 집단 자살을 했다는 것을 보면, 그러한 상황들이 조금은 이해될 때가 있습니다. 설움, 설움 중에도 배고픈 설움 이상 가는 것이 없다고 하는 옛날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한 설움 속에서 온 식구가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하고 천장을 올려다 보며 온 식구가 누워 있을 때, 어머님께서 오후쯤에 나가셔서 어딘가에서 식량을 조금 구해서 돌아오셨습니다. 가져오신 것으로 죽을 끓이셔서 우리 형제들에게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물을 마시려고 우물물을 길어서 마시다가 부엌 쪽의 어머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머리에 쓰고 계시던 수건을 다시 고쳐 쓰실 때 저는 너무도 충격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녀 적부터 한번도 자르지 않고 귀하게 간직하시던 머리카락이 싹둑 잘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시던 물을 집어던지고 부엌으로 달려가 엄마의 머리카락이 왜 잘려졌는지를 되물었을 때, 어머님은 저를 밀어내시며 너는 알 바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자꾸만 되물으니 어머님은 “엄마 머리카락 잘라주고 쌀 두 되랑 바꿔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일흔 아홉이 되신 저희 어머님을 제가 청주에서 모시고 있습니다. 전 초등학교 5학년밖에 되지 않았었지만 저도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었습니다. 며칠 동안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저희 동네 친구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아버지가 두 달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나에게 말하기를, 며칠 전에 버스 회사에서 자기 집에 많은 돈을 가져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통사고 나서 위자료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나이에 뭘 알겠습니까? 그냥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으면 그 가족이 돈을 받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생각에 나도 교통사고로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트럭들이 여러 대가 지나가는 뿌옇게 연기를 피는 신작로 길에 서서 뛰어들까 말까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끝내는 뛰어들지 못했습니다. 과연 내가 그때 뛰어 들었다고 한다면 내 부모님은 내 생명의 가치를 얼마 정도 인정받을 수 있었을지 백 만원일지, 이백 만원일지를 생각하며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생각하며 살아왔었습니다.

그러던 내가 예수를 믿고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는 과정 속에서 마가복음 5장을 읽었습니다. 그곳을 보시면 거라사인 지방의 청년 정신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돼지 이천 마리를 죽인 사건이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돼지 이천 마리가 숫자적으로 나에게 너무도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정신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어떻게 돼지 이천 마리를 죽일 수가 있을까? 돼지를 이천 마리나 허비해 버릴 수가 있을까?' 하면서 예수님께서 경제적인 가치를 모르고, 비인도주의적이고, 비현실주의적이기 때문에 돼지를 이천 마리나 허비해 버린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아니면 무엇인가 성경이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계속 읽으며 공부해 가는 과정 속에서 마태복음 16장 26절의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한 사람의 생명을 이 세상의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한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돼지 이천 마리, 일만 마리가 문제가 아니라 온 천하를 주고도 한 사람의 생명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늘과 땅에 매어 달리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와 땀을 다 쏟으신 사건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가슴 속에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흥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돼지 일만 마리를 죽여서, 아니면 돼지 십만 마리를 죽여서 나를 구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되었을까요? 그냥 말씀만으로도 돼지 일만 마리를 만들어 죽이고 구원하고, 만들어 죽이고 구원하시면 될 수 있었을 텐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을까요? 이런 것을 생각하다 보니 내 마음이 두근거리고 흥분되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거울 앞에 비추어진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나에게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개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너는 돼지 이천 마리가 문제가 아니라, 돼지 일만 마리가 문제가 아니라 온 천하를 주고도 너의 목숨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너의 영혼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너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값을 지불하고 죽어가신 것이다!” 내가 나를 향해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울에 비추어진 내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나를 꼭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나는 소중하다! 나는 가치가 있다! 나는 위대한 사람이다!” 그렇게 외칠 때 신음처럼 한마디가 터져 나왔는데 “나는 그럭저럭 살수가 없다! 나는 그럭저럭 살수가 없다! 이렇게 온 천하를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나라면, 그런 위대한 가치가 나 한 사람 속에 있는 나라면, 내가 어떻게 인생을 그럭저럭 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위대하게 살고 싶다! 그럭저럭 살 수 없다!”는 그 외침의 순간부터 세상이 달라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웃이 보이고 민족이 보이고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저는 미국 뉴욕의 맨하탄 거리를 걷고, 일본 동경의 거리를 걷고, 북경의 거리를 걷고, 로마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를 걸어다니며 많은 사람들 속에 섞이어 길을 걷다가 우뚝우뚝 서서 사람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지구상의 어느 곳을 다녀도 '주서택'이라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두 명, 세 명이라면 비교도 될 터인데 나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유일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독생자를 물물교환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물물교환은 똑같은 가치가 인정될 때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가치를 보실 때 예수님의 가치와 나의 가치를 동등하게 보셨기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139편은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내 어머니 모태 안에서 나를 조성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나를 남자로 나를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를 이 땅에 보낸 것입니까? 누가 나를 만드신 것입니까? 누가 나를 이 땅에 여자로 남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까? 누가 나에게 이 하나님의 종으로 세우신 것입니까? 조직입니까? 단체입니까? 교단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생의 유일한 나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삶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누구에게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비교할 수 없는 나는 유일하고 독특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참고도서]
1.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 (순출판사)
2. “내적치유의 현장 – 엄마 가지마” (순출판사)
3. “내적치유세미나” (순출판사)
4. “결혼 전에 치유받아야 할 마음의 상처와 아픔들” (순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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