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8/21) 교갱협 제7차 영성수련회 새벽기도회

마가복음 5장 1~8절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나 심하게 귀신에 들려있어 아주 많이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귀신이 한번 발작을 일으키면 쇠사슬로도 묶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을에서 이웃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동네 밖 공동묘지에 나가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무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습니다. 돌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귀에 대해서는 억눌리고 사람들로부터는 소외되어 졌으며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는 격리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 결과로 그의 삶에는 평안이 찾아왔고 귀신 때문에 잃어야 했던 모든 축복과 관계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그와 같은 피상적인 상황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훨씬 그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 내용을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내용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과 연결되는 그 앞뒤 상황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자주 그 구절 자체에서보다 문맥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사건은 어떤 상황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고 있습니까? 모든 공관복음서가 오늘 본문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순서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의 사건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오는 사건입니다.

사실 그 풍랑은 보통의 풍랑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만 뼈가 굵어온 제자들로서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엄청난 풍랑이었습니다. 많은 그 풍랑의 상황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 큰 파도가 일어나면서 뱃전에 부딪혀오는데 아무리 막아도 자꾸 물이 들어와서 물이 배에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배를 구하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어떤 제자는 넘쳐오는 물을 온 몸으로 막아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제자는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바가지로 부지런히 배 안의 물을 퍼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제자는 돛대가 부러지지 않도록 돛대를 붙잡고 몸부림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제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부지런히 노를 저어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계속 잠만 주무시고 계십니다. 결국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게 되지요. “주님! 이제 그만 좀 주무시고 일어나 보세요.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잠에서 깨어난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먼저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너에게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와 같은 사건을 보고 제자들이 많이 놀라게 됩니다. 저가 도대체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잔잔하냐? 바로 그것이 본문의 사건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사건 뒤에는 어떤 사건이 나옵니까? 마가복음 5장 2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공관복음서가 똑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거라사 지방으로 건너오십니다. 아주 큰 풍랑 가운데서 건너오십니다. 정말 큰 풍랑이었지만 그 건너오심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결국 건너오시고야 맙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는 다시 바다를 건너가십니다. 그 바다를 건너오시고 다시 건너가시는 그 중간에는 단 하나의 사건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본문의 사건입니다. 군대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가운데서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바다를 건너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예수는 단지 제자들에게 내게 풍랑을 잔잔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역에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에 뱃전에서 눈을 붙이고 쉬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오신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배를 타야만 했던 그리고 그 엄청난 풍랑 가운데서라도 반드시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셔야만 했던 주님만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 때문에 어떤 상황,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라도 바다 건너가는 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그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군대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예수님은 풍랑과 바람이 배를 위협하고 주님가시는 길을 막는다 할지라도 결국은 바다를 건너오시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일이 끝났습니다. 군대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모두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거라사 지방에는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십니다. 예수님에게는 귀신들린 그 한 사람, 그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다를 건너오시는 수고를 감당하셨고 그 한 영혼을 구원하신 후에는 다시 바다를 건너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제목을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목회의 일에 부름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동참하고 있는 이 모임의 이름은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목회자로서의 우리의 일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져야 하는 걸까요? 그리고 진정한 한국교회의 갱신은 무엇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어야 하는 걸까요?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는 본질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가 목회의 본질을 떠나게 될 때 타락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의 타락은 목회자의 타락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목회의 타락이 무엇입니까? 영혼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영혼에 대한 관심에서 떠나 엉뚱한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영혼에 관한 일은 뒷전으로 미루어 두고 교권다툼과 이권개입과 인기에 영합하는 그런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교단 총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인데 아주 오랫동안 우리 총회의 고질병으로 지적되었던 총회장 선출 시의 타락선거, 참으로 큰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갱협이 일어나 작년 총회부터 모든 선거제도를 제비뽑기의 방식으로 개선을 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그 배후에서 역사해 주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어떤 문제가 생겼는가 하면 우리는 좋은데 아주 오랫동안 그 흐름에 젖어있던,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고 즐기던 소위 말하는 정치꾼들이 설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분들이 다 총회세계선교회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자리가 첨예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분들이 무엇을 쫓아서 거기로 갔겠습니까?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죽어가는 영혼을 한 영혼이라도 더 살려보자, 내가 가서 임원이 되고 뭐가 되어야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릴 수 있겠다 그래서 거기로 몰려갔겠습니까? 여러분, 이번 총회에 세계선교회 이사장 선거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정말 한 영혼과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진 분이 이사장이 되고 임원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관심 때문에 거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단 한사람도 임원이 되지 못하도록 여러분 꼭 기도해주셔야 됩니다.

어떻게 그런 타락된 목회의 현장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교회갱신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가장 먼저 본질로 돌아가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영혼에 대한 재발견 운동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영혼의 가치를 아주 우스운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 영혼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와 이 시대의 목회자들은 한 영혼의 가치를 주님만큼은 귀하게 여기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 중요한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물량주의 현상입니다. 상당수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한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체 사이즈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하도 큰 교회들이 많이 생겨지다 보니까 작은 교회는 교회 축에도 못드는 것 같습니다. 인정을 받지 못한단 말씀입니다. 그래서 큰 교회 목회자는 아주 위대하게 대접해 드리고 농어촌교회의 한 두 영혼을 섬기는 목회자들은 능력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것처럼, 아주 하찮게 취급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들이 서로 그렇게 합니다. 교인들이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 저는 그것이 분명히 타락된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타락된 가치관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만일 우리들이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한다면 결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주님과 우리의 관심이 서로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한 영혼을 보고 계시는데 우리는 숫자를 보고 있습니다. 그만큼 본질에서 떠나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목회현장에서 여러분의 생각은 무엇이고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무섭게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사실 주님은 한 영혼에 대한 주님의 관심을 아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도 바로 그와 관계된 비유입니다. 양 백 마리를 가지고 그것을 키우는 목자가 있었는데 해가 져서 양을 세어보니까 한 마리가 부족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합니까?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놓아두고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다시 길을 나섰다고 분명히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그 한 마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 양을 품에 안고 돌아와 기뻐하며 온 동네에 잔치를 베풀고 모든 사람들을 초청해놓고 그 찾은 양 한 마리로 인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절대로 논리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래도 하나보다 아흔 아홉이 귀하지 않은가? 잃은 한 마리 찾아 헤매다가 아흔아홉 마리를 잃어버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산에다 그대로 놓아두고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 것입니다. 그 한 마리 찾아나섰다가 이 아흔아홉 마리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비유에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주님의 관심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어떤 일에 열정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지금 주님의 눈에는 그 잃어버린 한 영혼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관심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이런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이런 주님의 열정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목회자로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주님의 관심, 한 드라크마를 찾고나서 벌이는 잔치의 비용이 그 한 드라크마의 가치보다 더 많이 들지 않았겠는가? 그건 주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들어가는 비용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이 관심이라는 말입니다. 이 주님의 관심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본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회라고 하는 일에 헌신하면서 어디에서부터 우리의 목회를 시작해야 합니까? 우리가 보고있는 것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바로 한 영혼입니다.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은 한 영혼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목회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목회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주님의 손과 발로써 목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가지 얘기를 더 해보지요. 여러분은 20세기의 성자라고 불리는 테레사 수녀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극빈자, 고아, 병자,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 그리고 노인을 불러 모아놓고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전엔 그가 한 일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는데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부터 마더 테레사가 했던 일들이 온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미 세계 126개국에 600여 곳 이상 되는 사랑의 집을 만들어놓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테레사 수녀의 고백이 잠들었던 한 영혼에 대한 우리에게 올바른 의식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입니다. 나는 한번에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번에 단지 단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단지 한사람, 한사람, 한사람씩만, 당신도 내가 하듯 그렇게 한번 시작해보십시오. 나는 한번에 단 한 사람만을 붙잡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4만 2천명이 넘는 사람을 붙잡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일은 바다에 물 한 방울을 보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물 한 방울을 거기 보태지 않았다면 지금 바다는 물 한 방울이 모자랄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또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번에 한 사람씩 작은 일들에 충실하십시오. 당신을 키우는 힘은 바로 거기에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다지 거창한 일을 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작은 일들을 큰 사랑으로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얼마만큼 사랑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거창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사소한 일들을 즐겨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참으로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많은 영혼이 아닙니다. 한 영혼입니다. 그 한 영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일깨우는 일이고 우리의 가치관을 새로 세우는 일입니다. 물론 스스로 크다 하고 생각하는 어떤 분에게는 한 영혼을 돌보는 일이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귀신에 사로잡힌 그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서 풍랑 이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오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것은 구원하셔야 할 사람이 그렇게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고 그 한 영혼이 그렇게 우리 주님에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이 구원하셔야 할 영혼이 단 하나만 세상에 있었어도 얼마든지 세상에 오셨을 것이고 그 한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 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단 한번도 한 무리로 우리를 사랑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직 나 하나를 개인적으로 아셨습니다. 나 하나를 개인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 하나를 개인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주님을 위해 일하면서 많은 영혼을 한꺼번에 한 묶음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단 한 영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많은 영혼을 위해서 세움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그리고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한 영혼을 위해서 세움 받은 사람입니다.

광주에서 목회하다보니까 가끔은 농어촌에서 목회하는 동역자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목회하는 동역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묻습니다. 혹시 그곳을 떠나 큰 도시에 나가서 목회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어떤 분은 대답합니다. “기회가 없어서요. 앞으로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한번 해봐야지요.” 그런데 어떤 분은 “목사님, 여기에도 교회는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도 목사는 있어야 합니다.” 둘 중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 목회자입니까? 누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고 있는 목회자입니까? 시골에서 목회하시는 분들,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도시에서 목회한 사람으로 당신은 거기 있어야 하고 나는 여기 있어야 합니다는 말이 아닙니다. 목회에 대한 우리의 기본 자세의 문제입니다. 어디에서 목회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자세로 목회하고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목회는 영혼에 대한 사역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영혼을 바라보고 목회해야 합니다.

또 한가지 사실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거라사 지방에 그 귀신 들린 자가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리로 들어가셨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그 거라사 지방에 군대귀신 들린 자가 있다는 것을 아셨을까요? 물론 주님이니까 아셨죠.

그러나 오늘 본문은 또 다른 한 가지의 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귀신 들린 자의 고통의 부르짖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귀신들린 사람이 너무도 큰 고통가운데 사로잡혀 밤낮으로 무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고함을 질렀다고 합니다. 저는 분명히 믿기로 이 고통의 부르짖음이 바다를 건너가서 우리 주님의 귀에 들려졌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라도 그 귀신에 사로잡힌 고통 당한 영혼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그의 고통을 아셨으며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일부러 바로 그 일만을 위해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두 가지 사실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목회를 하다보면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사람에게 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내 어려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무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그런 일에 부딪히게 되면 하나님도 찾지만 사람도 찾아서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실망 뿐이지요. 사람에게서는 실망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오직 하나님께만 말씀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만 아시는 크고 비밀한 일, 크고 비밀한 방법으로 우리의 안타까움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계속하세요. 하나님과의 대화가 중단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도 체험할 수 없고 하나님이 하시는 크고 비밀한 일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갓 결혼한 부부였는데 모든 것이 맞지 않아서 싸움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의 특징은 서로 싸우고 나면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꼭 해야할 말이 있으면 종이에 적어서 쓱 내밀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신랑이 회사에 새벽 일찍 나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아주 중요한 회의가 새벽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쪽지에 써서 아내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일 새벽 5시에 꼭 좀 깨워달라고 보여주니까 아내가 고개를 끄덕끄덕합니다. 맘놓고 잤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아침 8시가 되었어요. 얼마나 화가 납니다. 말을 안하기로 작정한 것도 다 잊어버리고 아내를 향해서 고함을 질러댑니다. 아무리 싸워도 그렇지 내가 니 신랑 아니냐? 이 중요한 회의를 놓쳐버리면 내가 어떻게 되겠느냐? 새벽 다섯시에 깨워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부인이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손가락으로 이불을 툭툭 가르킵니다. 보니까 쪽지 하나가 놓여져 있어요. 여보 다섯시예요. 일어나세요. 여러분, 절대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만 손해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고통 당하는 영혼에 귀를 기울이셨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 주변에 고통 당하는 영혼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선 내 목회의 현장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영혼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은 교회 성도의 사정을 일일이 다 알고 계십니까? 사실 저부터서가 그리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 교인들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합니다. 참 고민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가만 보면 왜 내가 교인들의 사정을 일일이 다 알지 못하는가 하면 쓸데없는 일에 바빠요. 엉뚱한 일에 시간을 다 뺏기고 교인 돌아볼 시간은 조금밖에 갖지 못해요. 장작 내가 들어주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그 영혼들의 부르짖음인데 그걸 못 듣고 있어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회개 많이 했습니다.

주님의 양을 맡아 관리하는 목회가 다른 무엇보다 내게 맡기신 양무리의 울음소리를 들어 주어야 하는데 그걸 못했어요. 우리는 다른 일에 바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그 양무리의 울음소리를 듣는데 바빠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 우리는 내 우리 밖에 있는 영혼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대 가운데 고통 당하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당장 전국 각처에서 수재로 인해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가정이 파괴되어 울부짖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들의 문제 때문에 울부짖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외됨의 아픔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들, 직장을 잃어버리고 울부짖는 영혼들, 사회의 폭력, 불현듯 찾아온 불치의 질병, 실패해버린 인생, 그래서 큰 고통가운데 던져져 억눌린 상황 속에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울부짖음도 들어야 합니다. 또한 북한에 있는 영혼들의 울부짖음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간 여러 선교사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들을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건너가야 합니다. 바다 밖의 일본의 영혼들, 중국의 영혼들, 동남아에 있는 영혼들, 남미에 있는 영혼들, 아프리카에 있는 영혼들, 그들도 울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주님께서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자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셨던 것처럼 그 분의 제자된 우리가 이 시대 모든 영혼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며 그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 점잖게 폼을 잡고 있다가 영혼들이 찾아오면 형식적으로 만나주고 그렇게 모든 것을 끝내는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사탄의 공격 속에서 고통받고 몸부림하는 영혼들을 직접 찾아나서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을 만나주어야 하고 위로해주어야 하고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교회가 이번 영성수련회의 큰 주제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주님의 발은 누구를 향하고 있었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손은 누구를 향하고 있었습니까? 우리의 손과 발도 주님처럼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하고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