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6/21) 한목협 제7회 전국수련회 파송예배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8~19절

지난 4월 8일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하고 장례식이 진행되었습니다. 400만 명의 조문객들이 세계 각처에서 벌떼와 같이 몰려들고 100여 명이 넘는 국가 정상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개신교인 우리는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가톨릭은 나름대로 교회 조직이나 도덕성, 신학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한 번씩 불거지는 신부들의 스캔들을 보면 신교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부패성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서거하자 왜 세상이 저처럼 존경을 표하는 것일까? 물론 요한 바오로 2세의 개인적인 리더십과 영향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결국 가톨릭이 주는 전통과 하나됨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이 개신교처럼 사분오열되어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속은 어떻든 간데 수천년 동안 하나의 모습을 이어오면서 나름대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세상은 힘을 좋아합니다. 힘이 있어야 세상도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입니다. 그 힘은 바로 하나됨에서 옵니다. 주님이 교회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고 말씀하실 때 각개전투하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라고 봅니다. 빛이 되려면 집중되어야죠. 그래서 강하게 어둠을 밝히는 능력이 있어야죠. 그러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말씀 속에 담고 있다고 봅니다.

개신교가 사회적으로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깊이 반성하고 통찰해야 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카톨릭이 하나된 모습으로 영향력을 점점 팽창해 나가는 마당에 개신교가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번 한목협 모임 주제가 ‘사회복지’인데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사회복지를 안했습니까? 어제 교수님들의 발표를 보면 정부가 거액을 들여서 하는 것 빼고 70~80%를 교회에서 하고 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에서 소리없이 이웃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저희 교회만 보아도 일 년 예산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렇게 이웃을 섬겼는데도 세상은 우리를 아무것도 안하는 집단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에 영향력이 감소된 것입니다.

빛을 비추라고 했으니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은밀한 일만 해가지고는 안되지요. 개인이 할 때는 자랑이 되지 않게 해야 되지만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의 빛이고 소금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 가를 세상이 보도록 만들어야 되는데 교회가 분열이 되어서 힘을 쓰지 못하니까 일은 죽어라고 하고 영향력은 형편없는 이런 지경에 놓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세기를 맞아서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분열과 대립은 사탄의 기본 전략입니다.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에 감동된 하나님의 사람은 교회를 나누거나 분열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런 일을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내가 옳아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찢어 놓는 일은 안해야 되는 것이 우리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교회를 나누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자주 자주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나누는 일을 지금까지 해왔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했는가를 금방 찾아볼 수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도 교황이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위증과 간음으로 이미지가 엉망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더러워서 입에 담기 어려운 일들을 공공연히 하는 사람들이 교황과 주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탐욕과 방탕에 젖어있었어요. 면죄부니 성직의 매관매직이니 하면서 평신도를 영적인 노예로 만들고 자기들의 호위호식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던 아주 나쁜 인간들이었습니다. 교리적, 도덕적, 인격적으로 문제가 그렇게 많고 교회가 썩고 부패하고 이단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을 때 그는 교회분열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카톨릭에서 떨어져 나와서 개신교를 만든다는 아이디어가 루터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루터가 바라고 기대했던 것은 가톨릭교회 내부에서 신앙과 교리를 개혁하기 원했습니다. 카톨릭의 체제 안에서 그릇된 것을 바로잡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종교개혁을 터트리고 나니까 정치적으로 상황적으로 인쇄술을 위시해서 계몽주의 운동도 작용하면서 점점 카톨릭으로부터 멀어지는 자리까지 쓸려내려갔고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사학자는 이런 말까지 합니다. “루터가 가톨릭의 분열을 미리 예견했다면 그는 너무 두려워서 개혁하려는 의지를 포기했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나누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는 루터를 정죄하기 위해서 토론하던 자리였습니다. 그 이후 교회가 분열된 상처를 치유하려고 수십년 동안 가톨릭의 지도자들과 개신교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씨름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1521년으로부터 20년이 지난 1541년에 양쪽 지도자들이 다시 모여서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씨름하는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7년이 지나고 나서 1557년에 또 모여서 교회가 나누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안이 뭔가를 며칠 동안 씨름하는 회의를 했습니다. 결국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갈라지게 되었습니다마는 이런 역사적인 흔적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교회를 나누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탄생하던 그 당시에도 가톨릭과 개신교라고 갈라놓던 것을 너무나 두려워했습니다. 한쪽이 모든 면에서 잘못된 교회임에 틀림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갈라놓지 않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너무나 쉽게 교회를 갈랐습니다. 그 값을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불하고 있습니다. 칼빈과 멜랑톤을 보아도 그 두 사람은 예정교리에 있어서 견해가 틀리지만 끝까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이게 연합정신입니다. 교리는 달라도 서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신학이 다르다고 해서 신앙과 조화를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히 멜랑톤은 마지막까지 교회 분열을 가슴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교회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멜라히톤이 사는 동네에 강이 있었는데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교회분열을 놓고 그는 엘베강의 강물만큼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교회를 나누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한국교회 100년사 분열의 아픔이 이곳저곳에 어려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무력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국가적으로 1,000만이 넘는 기독교인이 있지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오합지졸이 되도록 한 원인이 바로 분열입니다.

얼마 전 ‘한국복음주의 협의회’에서 개인마다 나와서 죄를 회개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거기에 어느 원로목사님이 나오셔서 자기만 옳다고 하고 한국교회를 분열시킨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은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한국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감옥에 가서 믿음의 정절을 지켜낸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교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분열되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것 때문에 한국교회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오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주저앉아서는 안됩니다. 지금이라도 서로 받아들이고 아픈 상처를 치유해보자하는 성령의 뜨거운 음성을 들으면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하나 됨의 키는 회개와 용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회개와 용서가 키이고 사람과 사람사이, 교회와 교회사이에도 하나됨의 키는 회개와 용서입니다. 이게 구원론의 핵심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시고 화목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는데 이 화목은 바로 하나가 되게 합니다. 화목은 원수된 자들을 서로 하나되게 하는 놀라운 영적 치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제시한 대안이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덮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교리입니다. 예수님이 화목하게 하는 일을 위해서 앞장서셨습니다. 회개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이고 화목의 방법은 회개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기본적인 틀입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되기 원하면 이 원리를 따라서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서로 회개하고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보수나 진보나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하는 기관을 보면 회개하는 마음이 없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없고 은근히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고집하려고 합니다. 이러니까 안되지요. 진보든 보수든 정말로 회개할 것이 없습니까? 그게 아니쟎아요. 역사적으로 봐도 양쪽 다 회개해야 할 것들이 있쟎아요. 서로 용서하고 포용해야 할 것들이 충분하잖아요.

우리 한목협이 한국교회가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두 기관이 한자리에서 만나고 한국교회가 어떤 모습으로든지 하나됨의 모습을 보여서 1,000만이라는 맨파워를 가지고 한국사회를 치유하고 소망적인 방향으로 끌어가는데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기 위해서 끌어왔는데 우리가 원하는 만큼 진전이 안되는 이유가 뭐냐면 양쪽 다 자기의 의를 계속 내세우고 있는 겁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면 상대방을 정죄할 수 밖에 없고 포용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한기총을 봅시다. 보수진영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교회가 핍박 당할 때 신앙의 정절을 지킨 사람들이 보수측 사람들입니다. 그건 인정해야지요. 정말로 한국교회의 등불이 꺼질 수 있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생명걸고 싸운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한국교회의 정절을 지켰고 체면을 세웠고 그들의 순교가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한국교회의 대 부흥, 전 세계가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본 그 대 부흥, 엄청난 양적인 부흥의 주도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복음만을 전하려는 몸부림으로 세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거 자랑할 만합니다. 놀랍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북이 나뉘어진 상황에 북한의 독재에 대해 한마디라도 할 수 있는 용기, 양심, 핵문제에 대해서 뭔가 결집된 힘을 모았다면 보수측입니다. 반면 보수측의 잘못도 엄청납니다.

해방 후 수년간 계속된 교회 분열의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서로 정죄하다가 분열되었습니다. 특히 군소교단 200여 개가 장로교에서 분열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면서 남을 정죄하는데 앞장선 이 교만을 어떻게 숨깁니까? 유신 독재에도 마땅히 신앙 양심을 갖고 소리를 내야하는데 불의에 동조한 사람이 보수입니다. 저도 나이가 어렸지만 우리 교단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유신헌법에 동의한다는 것을 신문에 냈습니다. 그것을 보고 국민들은 목사와 교회를 욕했습니다. 대통령조찬기도회를 열어서 권력을 가진 자에게 아부하는 것, 그리고 나라가 살만해지자 교회가 급속도로 세속화되는 것을 누가 책임질 겁니까? 한국교회 70%가 보수측이니 보수측이 책임 져야지요. 왜 교회가 갑자기 짚신신고 다니다 자가용 타니까 그렇게 좋아보이던 믿음은 어디로 가고 금방 세상 사람들 닮아갑니까?

목사도 돈 앞에서는 맥을 못춥니다. 불의한 재물이라도 하나님 앞에 헌금하면 조금도 문제가 안되는 이런 풍토, 누가 부채질 했습니까? 보수측 아닙니까? 회개를 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성장의 정체 원인도 보수측이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70~80%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잘못되었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한국교회가 하나되기를 원한다면 진솔하게 자신의 죄를 내어놓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서 거듭나는 진통을 겪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자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NCC로 대표되는 진보측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습니다. 진보성향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끌어보려고 하던 사람들, 숫자는 많지 않지만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유신독재하에서 특별히 인권을 위해, 민주화를 위해 그들이 싸우고 희생하고 피 흘린 것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포를 느끼는 분위기에서 양심의 소리를 낸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저도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진보는 신학의 장을 넓게 여는데도 기여를 했지요. 좁은 안경을 가지고 기독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넓은 시각으로 기독교를 보도록 했습니다. 더욱이 전 세계교회가 하나 되자고 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도 진보측이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을 끌어앉고 이 나라가 통일이 될 수 있는 기초를 닦아보고자 피눈물나는 노력을 한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다 자랑스러운 자기의 의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 진보성향을 가진 교회들이 잘못한 것도 많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하고 무릎을 꿇었던 것도 절대로 쉽게 덮을 수 없는 약점입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남을 정죄할 처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남한의 독재에 대해서는 피를 흘리며 싸우면서 북한의 독재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용적인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신앙양심으로 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남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항거하던 그들이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절대로 잘하는 일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남한의 교회가 하나되는 일에는 소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어용단체인 북한의 교회하고는 어떻게 하든지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토론을 하면 나름대로 할 말이 있겠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신앙 양심을 가지고 얘기해야 합니다. 남한의 독재가 그렇게 나쁜 것이라면 북한의 독재도 마찬가지로 나쁜 것입니다. 남한의 인권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북한의 인권유린에 눈감아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북한에 아부해서 돌아올 것이 무엇입니까? 할 말은 하면서 해야지 무조건 비위만 맞춰줍니까?

그러므로 제가 볼 때 진보성향의 교회들이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상당히 신앙양심에 모순이 있다고 봅니다. 이런것들을 회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말로 서로 용서하고 품어주면서 우리가 함께 나아가는 하나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누가 할 것입니까? 로마서 14장 10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결국 우리의 잘잘못을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저울질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양심을 가지고 행동하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가 양심을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바르게 행동한 것은 칭찬받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의 이념과 정치적 성향, 상처로 오는 울분, 원한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꾸중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목협에는 진보와 보수, 중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편에 있든지 간에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하는 자세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한 사람도 바리새인과 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잘 한 것이 있으면 서로가 포용하고 용납하고 서로의 약한면은 감싸주면서 한국교회를 치유하고자 하는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습니다.

21세기의 교회 지도자였던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임종시에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성공적인 한 생을 살면서 사역을 하셨는데 이제 죽음을 앞에 두고 목사님이 평소에 가장 마음에 두고 있었던 생각,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는지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조금도 주저없이 “내가 평생 목회하면서 늘 마음에 담고 자주 자주 생각한 것은 나는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나의 삶이 주님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이것이 항상 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고 성령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떨면서 목회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자세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 회개하고 용서하고 품어주면 한국교회가 하나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열릴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한목협이 내걸고 있는 하나됨의 길을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갱신의 길도 열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고상한 모습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신을 돌아보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넓은 품을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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