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08/27) 교갱협 제1차 영성수련회 주제강연

세우신 종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귀한 음성을 들려주심에 대해 저 자신이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우리는 얼마나 갈급합니까? 우리는 얼마나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답답해 합니까? 하늘의 구름을 가르고 소나기라도 하염없이 쏟아졌으면 하는 생각들을 얼마나 자주합니까? 그러면서도 우리 개개인은 힘이 없고 항상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의욕이 꺾이는 사람들입니다. ‘나 같은 것이...’ 하면서 그저 주저앉는 것이 더 수월하고, 입을 다무는 것이 더 쉽고, 어떤 면에서는 '내 일이나 잘 하자' 하고 자위하는 쪽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걸맞는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사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자리에 모이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힘이 생기지 않습니까? 소망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 저 자신이 참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자신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제가 마음으로 늘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이 절대로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 된 것을 저는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가 처음에 탄생하게 된 동기는 너무 단순합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동기입니다. 다른 동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주님 앞에 설 때 우리가 부끄럼당하지 않고 책망 듣지 않으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들이 이 사람 저 사람 마음속에 공유되면서 이심전심으로 서로 연결되어서 자연스럽게 이 모임이 발족하게 된 것입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많은 뜻있는 동역자들을 연락해서 처음부터 "우리 한자리에 같이 좀 모여 봅시다. 함께 눈물 흘리며 기도하면서 씨름해 봅시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의 명령을 한번 기다려 봅시다" 하고 함께 시작을 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아무래도 시작이 있어야 되고 한계가 있고 여러 가지 생각하는 문제들이 따르게 되니 자연히 소수의 사람들이 부득불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수의 사람들은 우리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마음껏 들어와서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장을 일단 열어주는데 시녀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일을 하셔야 되고 한국교회 뜻있는 모든 종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오늘의 시대적인 하나님의 요구를 듣고 만족시켜 주어야 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좁게 말하면 우리 교단, 넓게 말하면 한국교회,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고 안정되고 어떤 면으로는 부흥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양파껍질처럼 얇은 껍질을 한 겹만 벗겨보면 그 속에는 내분이 있고 혼란이 숨어있는 것을 봅니다. 정통과 개혁이 은근히 대립하고 있고,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긴장이 도사리고 있고, 안정추구파와 변화추구파의 알력이 서서히 머리를 들고 있는 것을 숨길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읽으셨는지 모르지만 ‘빌 헐’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이 두 권 번역되었는데 주로 제자훈련과 관계된 책들입니다. 그러나 상당히 읽어볼 만한 가치를 가진 책으로 저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꼭 주목해서 한 말이 아니고 자기가 속해있는 미국교회를 안중에 두고 한 말로 봅니다. “오늘의 교회는 팔, 다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심장병을 앓고 있다.” 팔,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그건 수술하면 되고, 약 바르면 되고, 기브스 하면 되지만 심장병을 앓는다는 것은 생명과 직결되는 병이기 때문에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오늘의 교회, 손가락이 아픈 것도 아니요, 팔이 부러진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병은 가장 중요한 심장에 질환이 생긴 것입니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다 알지요? 털어놓기 싫고 말하기 싫어서 그렇지 다 알잖아요. 심장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갱신협의회는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교회 체질개선을 통해서 이 병을 고쳐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죽을 수는 없잖아요. 가만히 앉아서 있을 수는 없잖아요. 설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을 때까지는 몸부림을 쳐야 되지 않습니까? 체질개선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체질개선을 상당히 의미있게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가르친다는 말이 아닙니다. 조직을 한꺼번에 뒤집어 엎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운영을 새롭게 해보자는 그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체질개선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의식을 좀 바꾸면서, 지도자들의 의식이 바뀌므로 현 세대를 보는 패러다임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체질개선입니다.

그러나 이 체질개선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체질개선이 서서히 되면 드디어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되리라고 봅니다. 제가 60을 내다보는 사람입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50대 중반 이후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잘못된 체제 속에서 굳어왔습니다. 적극적으로 동참했든지, 아니면 슬금슬금 나처럼 도망했든지 간에 벌써 우리는 나도 모르게 체질이 굳어졌어요. 너무 산성화되어 버렸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 우리를 알칼리성으로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약간 방향을 틀수는 있겠죠.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21세기에 자기 몫을 감당하려면, 좀 고약한 말을 써서 생존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새로운 의식과 패러다임을 가진 세대가 나이에 관계없이, 선후배를 떠나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새로운 세대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를 책임질 수 있는 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갱신협의회가 문을 연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들이 진행이 되면 21세기는 세계화시대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도 세계속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부득불 우리끼리만 똘똘 뭉쳐 살 수 없습니다. 개방해야 됩니다. 세계를 가슴에 품고 함께 씨름해야 되는 때가 옵니다. 그 때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갱신협의회를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종의 새로운 정치세력의 대두로 해석을 하는 시각에 우리 스스로가 말려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교단이나 한국교회는 새로운 리더십이 매우 시급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리더십이 뭡니까? 이것은 어떤 영웅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문제의식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의 '팀 리더십'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같은 고민과 고통과 또 그러면서 같은 꿈을 안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이 한마음이 되어 하나같이 뭉쳐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책임져 보자고 하는 '팀 리더십'을 지금 이 시대가 요청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리더십'은 소위 '지도력'인데 지도력이라는 것은 흔히 '영향력'이라는 말로도 바꿉니다.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든, 아니면 50명 모이는 교회에 영향을 끼치든지, 우리가 크고 작고 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때에 그 영향력을 리더십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을 일컬어서 '지도자'라고 말합니다. 해리 투르먼 대통령이 멋진 말을 한 마디 했습니다. 이 말을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바꾸어서 자기 입장에 맞게 활용하는 유명한 말 중에 하나입니다.

“지도자란 어떤 사람이냐?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고, 나중에는 그 일로 인해서 좋아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굉장히 멋진 말입니다. 리더십이란 것은 일반 회중들이 하기 싫어하고 기피하는 일을 먼 안목을 보고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지도자의 지도를 따라서 자기 자신이 하고 싶지 않던 일을 하게 되면, 비로소 그 속에서 행복과 기쁨을 맛보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앞서가는 것이 지도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교단만 봐도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보다도 변화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체질개선이든, 의식전환이든, 무슨 용어를 쓰든 간에 변화를 좀 해보겠다고 하면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지도력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싫어하는 변화를 그들로 하여금 하게하고 그 변화로 인해서 나타나는 결과를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영향력, 이것이 지도력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지도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갱협이 만들어진 근본적인 이유가 이와 같은 교회갱신의 소명, 다시 말하면 새로운 리더십을 가지는 지도자들을 우리가 한 마음이 되도록 묶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알다시피 건강하고 또 능력있는 리더십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리더십에 대한 요구가 크면 클수록, 상황이 위급하면 할수록, 거기에 상응하는 댓가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변화를 시켜야 하고, 그리고 변화를 시도할 때에 결국 우리가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고통을 치를 각오를 하는 사람들이 모일때 거기에 영향력이라는 것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링컨을 두고 이런 말을 한 자서전 작가가 있습니다. "링컨이 어떤 사람이냐? 온 세상과 맞서있는 사람이요, 산과 바다를 상대는 사람이 바로 링컨이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링컨의 생애를 통해서 그가 일반대중보다도 한 발 앞서 가고, 한 발 앞서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그리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려는 것 때문에 얼마나 비싼 대가를 그가 지불했는가를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인물 가운데서 리더십을 연구할 때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를 일컬어서 '행동의 사람'이라고 흔히 말을 하고, 또 어떤 성경학자는 그는 리더십에 기념비적인 유산을 남긴 사람이라고 극찬을 하는 정도로 리더십 하면 느헤미야를 많이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리더십은 바로 느헤미야가 보여준 리더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느헤미야로부터 배우기만 한다면 ‘교회갱신협의회’에서 우리 모두가 행사해야 될 리더십의 방향과 목적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으리고 봅니다.

몇 가지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먼저, 느헤미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느냐?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책임을 통감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리더십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가를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느헤미야는 포로로 바빌론에 잡혀간 사람이요, 아닥사스다왕의 술관원이었습니다. 술관원 하면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두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황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은 황후이고, 그 다음에는 술관원입니다. 엄청나고 대단한 권력을 가진 실세였습니다. 왕의 음식을 전부 자기가 먼저 먹어보고, 그리고 왕이 독살될 수 있는 위험을 사전에 막아야 되는 책임을 진 사람이니까 자연히 그 일을 하다가 보면 왕과 가장 절친한 사이가 되고, 또 왕은 그 일을 맡길 때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다가 보니까 왕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대단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최고의 부귀를 누리고 있는 그로서는 사실 그 생활로 만족할 수 있었고, 또 자기 자신이 그 생활에서 어떤 면에서는 자기의 꿈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에서 온 어떤 여행자로부터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백성들과 예루살렘 형편을 전해듣고 나서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왕궁에 있는 사람, 느헤미야 1장 1절에서 ‘자기는 왕궁에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수상궁에 있습니다. 수상궁, 얼마나 화려한 곳입니까?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지금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2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을 구태여 마음에 끌여들여서 고민하고 씨름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남의 일처럼 얼마든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었든지, 성벽이 무너졌든지, 이미 다 끝난 일을 가지고 뭘 그렇게 고통하고 괴로워합니까? 포로로 잡혀올 때는 이제는 신세가 끝장났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수상궁에서 황제와 함께 지내는 팔자가 되었는데, 이것으로만 해도 내가 복을 받은 것이고 이것만 해도 내가 이미 인생의 꿈을 이룬 것이 아닌가? 얼마든지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자마자 괴로워서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금식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 1장 4절에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고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하며 주야로 기도하고 죄를 자복하고 그리고는 마음에 비장한 결심을 하기에까지 이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안일과 자신의 영화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을 행사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대가는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도 지불하겠다고 하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면서 왕의 마음을 돌려서 은총을 입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느헤미야를 발견합니다.

저를 위해서 하는 말이 되겠지만 여러분에게도 해당이 될 것입니다. 값을 치르기가 싫어서 문제를 직시하기를 두려워하거나 기피하는 사람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요즈음은 지도자가 없는 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영웅이 없는 시대'라고 말하는데 영웅이 없는 시대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 그러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값을 지불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니까 피하는 겁니다. 자기 보신에 급급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도자가 안 나오는 겁니다. 요즘 X세대에 지도자가 안 나올 확률은 거의 99%입니다. 전부 이기주의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데 거기에 무슨 지도자가 나오겠어요?

미국에서 지금 베스트셀러로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는 'The roadless traveled'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을 해야될지 모르겠는데 '길이 보이지 않는 여행로‘라고 할까, 그런 제목인데 저자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어보면 참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을 점점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자기의 삶을 점점 뒤틀리게 만드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 이유는 간단하답니다.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문제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직시해야 하는데, 문제를 직시하면 고통이 따르거든요. 그러니까 그 고통을 가급적이면 외면하려고 하니까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죠. 그러니까 모든 삶이 뒤틀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를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그 해결책이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대가가 지불되지 아니하고 눈물과 고통이 따르지 않고 무슨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데, 그것이 너무너무 두려워서 도망가는 겁니다. 도망가니까 문제도 문제로 보지 못하고, 설혹 문제를 보았다 할지라도 그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가 문제로 계속 꼬이고, 나중에는 절망에 빠집니다. 이것이 현대인이래요.

저는 이것을 100% 공감합니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훈련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것은 무조건 피하고 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뒤따르는 고통을 두려워한 나머지 문제 자체를 아예 외면해 버립니다. 그것이 결국은 극단적으로 가면 신경질환증에 걸린다고 합니다. '칼 융'이라고 하면 심리학계에서 프로이드 다음으로 거인인데, 칼 융이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신경증 질환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 이것이 어떻게 정신질환에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오늘날 우리 교단의 문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참으로 중요한 진리 중에 하나는 모든 문제는 고통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들은 고통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주셨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굉장히 중요한 교훈입니다. 그러니까 벤자민 플랭클린이라고 하는 신자도 아닙니다마는, 그 사람도 참 꿰뚫어보는 진리를 한 가지 말했습니다. "고통을 주는 것은 곧 교훈을 주는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문제를 직시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른 고통을 감수할 각오를 합니다. 느헤미야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합시다. 지금 여기에 360명이 모였습니다. 360명의 빨갱이들이 모였다면, 360명의 주사파들이 모였다면 무슨 큰 일 저지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는 삼백 명이 아니라 삼천 명이 모여도 할 일을 못합니다. 이유는 왕궁에만 있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찮고, 욕먹기 싫고, 싸우기 싫어서 가급적이면 교단의 문제든, 한국교회의 문제든, 슬슬 피하고 싶은 것이 저의 입장이었어요. 귀찮아요. '내가 내 교회 하기에도 힘에 부쳐서 씩씩거리고 있는 판국인데 무슨 교단 생각하고, 한국교회 걱정하고, 너무 사치스럽게 그럴 필요가 없고, 그 일은 그 일 할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그런 소명을 주신 사람은 그 소명대로 일하고, 나는 작은 그릇이니까 내 교회 하나라도 제대로 해보자. 이것도 다 못하는 판국이다.' 이러면서 피했어요. 이론은 좋습니다만 문제를 직시하기를 겁을 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와 문제를 다룰 때에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크다는 것을 알 때 가급적이면 거기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이죠.

이와같은 태도를 가지고 사실 제가 오늘까지 목사로서 생활을 해왔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교회갱신협의회’가 싫습니다. 저는 다 그만두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투사의 기질이 없어요. 생긴 꼴을 보세요. 투사로 일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괜히 분수에 지나친 짓 하지 말고 내 일이나 하고 끝내자는 심정이 99%입니다. 교갱협의회를 시작할 때 저는 꼭 필요하다고 하니까 시작을 합니다마는, 산파 역할을 해주고 모든 실무는 전부 맡기려고 마음에 작심하고 있는데 깡패같이 공갈치는 사람이 몇이 있어서 제가 회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총무하고 있는 김경원 목사님, 제가 회장을 안 하겠다고 하니까 뒤집어 엎어버리겠데요. 판을 깨버리겠답니다. 그러니까 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회장을 맡았느데 제 마음속에는 이런 마음이 있어요. 뭐, 수양회를 하든지 뭘 하든지 해보고 모든 목사님들이 공감하지 않고 해봐야 싹이 노란 일을 한다 싶으면 언제든지 손 땔 마음이 99%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소극적인 사람입니까?

그런데 제가 느헤미야를 염두에 두고 읽고 교재를 준비하면서 제 자신이 참 못난 인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 교회도 제대로 목회할 자격이 없고, 한 교회도 감당할 그릇이 못되는 존재라는 것을 저 자신이 스스로 발견했습니다. 슬프게도 저 같은 사람이 우리 교단 안에 너무 많아요. 전부 왕궁에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제가 얘기하는 '팀 리더십'이라는 것이 창출이 안 되는 것입니다. 될 수가 없죠. 건전한 팀 리더십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니까 절대로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고, 절대로 그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교단 밖에 있다고 하면 누가 저보고 욕하겠습니까? 그러나 교단 안에 있고 교단에서 제일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면서, 내가 왕궁에 앉아서 나 혼자만 잘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그저 남은 인생을 보내다가 주님 앞에 서면 잘했다고 칭찬받을까? 하는 그 문제가 저에게 걸렸어요.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차제에 광주에서 모인 총회에 총대도 아니면서 내려가서 이사회를 하면서 보았습니다. 신학생들이 내려와서 농성을 하고 있고, 총회장에 나오신 분은 몇 억을 썼다고 야단이고, 총회 일정의 거의 2분의 1일이 선거열풍에 들떠가지고 정신들이 없고, 나중에 중요한 안건은 토의하나 못해보고 총대들은 다 지치니까 도망가버리고, 전략적으로 남아있는 몇 사람들이 다 통과시켜 버리고, 대구에 모였을 때 보니까 또 돈을 쓰고 아우성을 쳐서 우리그때는 할 수 없어서 저는 총대도 아니면서, 사실은 총대가 되었는데 남에게 양보를 해버렸어요. 이사회만 참석하고 나왔습니다. 도무지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길자연 목사님하고 몇 분 협의를 해서 "돈 쓰는 후보 절대로 찍어주지 말자. 돈 봉투 받지 말자. 돈을 받으면 받은 사람은 다시 돌려줘라. 만약에 돈을 쓴 후보가 당선되면 당선무효투쟁을 하자." 하고 종이로 인쇄를 해가지고 한 30여 교회가 이름을 싣고 막 뿌렸습니다. 그런 현실을 보면서 왕궁에 혼자 앉아있다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저 나름대로 은근히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단이 인물을 키우지 아니하는 교단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0-40대 목사 중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동일한 것 같아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우수하기는 우수한데 대부분이 문제를 인식하고 느헤미야처럼 책임을 지려는 태도보다도 회피하려는 태도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한심한 현실을 양산하게 된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느헤미야로부터 책망을 들어야 되고 느헤미야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고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솔직히 교단은 교회가 아니라고 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지역교회이고, 하나는 마지막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교회라고 말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교파의 교회도 없고, 교단의 교회도 없습니다. 어떤 나라의 교회도 없습니다. 성경 안에는 그런 교회의 개념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지역교회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지역교회 하나 충실하고, 이 지역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쳤으면 이건 주님의 일을 위해서 헌신한 것입니다. 이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연합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연합이 뭡니까? 이 연합이 결국은 교파로 발전하고 교단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연합 그 자체가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이 모이고, 그 다음에 지역교회 전체의 연합을 도모하는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이 공동체를 남의 일 생각하듯이 하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관심은 성벽을 다시 쌓는 것이었습니다. 첫 포로 귀환이 에스라와 함께 이루어진 이후에 10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성전은 재건이 되었지만, 성벽은 무너진 채 100여 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성벽을 쌓으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성벽이 없으니까 다시 재건된 성전은 완전히 노출된 상태, 무방비 상태로 되어 있었고 유대인들은 이 마을 저 마을에 이방인들과 섞여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그런 꼴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비하면 성벽을 쌓는 일은 별 볼일 없는 사소한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한때는 느헤미야를 읽으면서 성전만 재건하면 되지 성벽 쌓는게 뭐가 대단해서 느헤미야서가 꼭 성경에 끼어야 되는가를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지도자로서 탁월하다는 것이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하면, 남이 놓치고 넘어가기 쉬운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있습니다. '성벽이 왜 중요한가? 성전만 있으면 되지. 왜 성벽을 다시 쌓아야 하느냐?' 성벽을 다시 쌓는 것이 성전을 재건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꽤뚫어 본 것이 느헤미야의 탁월성입니다. 성전이 없었다면 성벽 쌓는 일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재건된 마당에는 성벽을 쌓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느헤미야의 시각이었습니다.

여러분, 벽이 없으면 성전이 보호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밤낮없이 위험과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있지만 성전을 보호할 성벽이 없기 때문에 결국 이 마을 저 마을에 흩어져 가지고 가나안 부족들과 함께 동화되는 생활을 했고, 그들의 잡된 종교와 문화에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젖어드는 그와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자연히 이방문화를 밤낮없이 숨쉬다가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서로 통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언어가 혼합되었고, 신앙적인 면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이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정확하게 드러낼만큼 차별성을 내보일 수 없을 만큼 혼탁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민으로서의 주체성을 지키지 못할 어려움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벽이 꼭 있어야 했습니다. 성벽은 적으로부터 성전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영향을 차단하고 상징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보호막의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성벽의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세속화, 이방화, 이것을 내버려둔다면 성전을 백 번 재건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또 흩어질 위험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벽을 쌓아서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고, 성벽을 쌓으므로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고,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이 혼탁한 세상물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꿰둟어 본 것이 느헤미야입니다.

저는 '갱신'과 '개혁'이라는 말을 구별하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용어를 사용하면서 비슷하다고 해서 함부로 사용하는 것보다는 조금 구별할 수 있으면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좁은 의미로 볼 때 '개혁'은 교리와 신앙문제를 바로 잡는 것이 주된 관심사라고 봅니다. 이것이 개혁이며 중세기 개혁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입니다. 반면에 '갱신'은 교리적인 문제보다도 교회의 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갱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질적인 문제가 뭡니까? 교회의 질적인 문제는 세속화의 문제입니다. 도덕적 위기를 터치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무력해지는 무력증을 우리가 관심을 갖고 다루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 면에서 쇠퇴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바로 갱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전 재건은 개혁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성벽 재건은 갱신에 해당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성전 재건은 하나님 예배와 그의 말씀의 권위를 지키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유혹과 공격에서 성경과 또 하나님 백성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갱신'하면 교회의 질,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교회와 세상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교회의 영적인 생명과 능력을 잃지 않도록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갱신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우리 교단이나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볼 때 교리문제나 신학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교단은 아직도 건재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 폭이 좁아서 답답하지 건재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교회의 질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세상에 비해 얼마나 그 차별성이 분명한가를 우리는 문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Identity가 어느 정도 분명한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오늘 교회는 처절할 정도로 세상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일부 목사나 장로들은 양심적인 면에 있어서 안 믿는 사람보다 못하지 않나 하는 지탄을 자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단 내의 조직마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기는 이유는 뭔가? 세속화된 것입니다. 교회의 질이 떨어진 것입니다. 저질화 현상입니다. 누구를 비판하거나 정죄하기 위해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에 탄식하는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목사는 강단에서 하나님 나라를 외치는 사람이고, 천당의 화려함과 아름다움과 그 영광을 늘 성도들에게 가르치면서 세상에서의 고통과 아픔을 위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당에 제일 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루라도 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는게 목사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흔히 본능하고 신앙하고는 다르다고 하죠. 목사도 본능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가끔 빈죽거립니다. "우리 목사님, 천국이 그렇게 좋다는데 자기가 먼저 들어가지 왜 그렇게 안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이상한 모순을 안고 살고 있다는 겁니다. 설교할 때 자주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욕심을 버려라. 하나님의 종들은 물욕에서 초월한 사람이요, 명예라는 것은 저 굴러다니는 돌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오직 예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사람이다. 할렐루야!" 하는 게 목사 아닙니까? 그럼 내려가서 그 말대로 100% 살지는 못할지라도 흉내라도 내야 될 것 아닙니까? 흉내를 낼려면 돈에 대해서 욕심을 내지 말아야 되고, 권력에 대해서 명예에 대해서 좀 초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단상에서 설교한 것에 비해서 단하의 태도는 너무너무 추하다는 겁니다.

저는 어제저녁 정필도 목사님의 설교에 쇼크를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자주자주 나를 기를 죽입니다. 한번은 그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나는 낮 시간 집회는 10시에 시작하면 12시에 마치는 것을 공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12시 시계 보고 주부들이 얼마나 바쁩니까? 가급적이면 그 시간 넘기지 않으려고 저는 생각을 하고 마치고 내려오니까 말하기를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중도에서 탁 끊어버리고 은혜받으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다가 중도에서 끊어버리느냐”고 역정을 내었습니다. 내 평생, 설교하고 내려와서 그렇게 혼나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만 제가 그때 큰 걸 배웠습니다. 저는 교인들의 사생활의 입장을 자꾸 생각해서 부담스럽지 않도록 해주려고 하는 마음인데, 은혜가 있어야 산다고 하는 강한 신념을 가진 지도자는 다른 일은 조금 손해 보아도 좋다. 은혜받아야 산다는 것을 강하게 주입시키기 때문에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제저녁에 보니까 자신의 지갑을 다 털고 뭐 다했다고 하는 통에 제가 완전히 기가 죽었습니다. 저는 정 목사님처럼 못합니다. 저는 내 자녀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내 지갑도 좀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교회가서 날마다 달라고 하겠어요. 어릴 때부터 전도사님들, 목사님들이 성도들이 성미 갖다 주는 것만 기다리고 앉았다가 갖다주면 밥해먹고 하는게 너무 보기 싫어서 내가 목사 안 하겠다고 도망친 사람인데, 나는 떳떳하게 내가 받을 만큼 받고 내가 저축할 만큼 저축하고 그럴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기의 가진 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 하나님이 내놓으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200억 헌금할 때 저는 1억 1천만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 목사님 같은 분의 메시지를 간증겸 해서 들을 때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의 세계를 맛봅니까? 우리 목사들은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명예에도 돈에도 이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노회를 가든지, 총회를 가든지, 그 자세를 유지해야 되잖아요. 참으로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총회에 모여서 총회장을 서로 안 하려고 해서 싸움이 벌어지는 장면을 보여주어야 그게 정상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대학생들을 5년 동안 지도하면서 은혜를 받은 대학생들이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1년에 한번씩 총회를 하는데 회장을 서로 하라고 아우성을 치는 통에 교통정리 하는데 보통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결국 회장되는 사람은 고집이 약간 세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풍토가 노회장 할 때나 총회장 할 때 나타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상황이 거꾸로 가고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추태가 교단 안에서 벌어지니 여러분 이게 뭘 의미합니까? 오늘날 한국교회가 질적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아무도 그 밑바닥을 읽을 수 없습니다. 보통 심각한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는 것입니다. 온갖 잡된 이방문화와 막 쏟아져 들어오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성벽을 쌓아서 차단해야 합니다. 주님의 성전을 보호해야 합니다. 경계선을 그어야 합니다. 두 세계를 분명히 구별시켜야 합니다. 이게 갱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벽을 쌓겠다고 느헤미야처럼 고통을 감내하면서 나서는 지도자들이 그렇게 많지를 않은데 이번 수련회를 보면서 참 감사하는 마음은 이렇게 많이 모이리라고는 생각을 안했습니다. 9월달부터 목회계획 세우느라고 얼마나 바쁜 때입니까? 마음은 있어도 참석 못 할 일이 너무나 많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모일까, 저는 약간 회의적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여러분들이 한자리에 한마음으로 모여서 첫 시간부터 은혜 받고 뜨거워지는 것을 볼 때 느헤미야처럼 성벽을 쌓기 위해서 왕궁도 버리고 정말로 모든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하고 이미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있는 동역자들이 많이 있음을 새삼 발견한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느헤미야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많은 사람들에게 옳은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그의 열정과 능력, 이것을 배우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혼자 일 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자신의 명령만 따르라고 하는 그런 입장에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끝마친 다음에 백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2장 17-18절에 보면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입니다. 열정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을 지피는 불씨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이 말을 듣고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감동을 받아가지고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하고는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능력있는 리더십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하는 능력을 가질 때에 가능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저는 평신도를 깨운다는 철학을 가지고 목회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 면에 있어서 상당히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도 혼자하면 안 됩니다. 교역자 혼자 뛰는 교회는 소망이 별로 없는 교회입니다. 모든 평신도 가운데 훈련받은 자들이 사역자로 세워져서 함께 뛰어야 합니다. 이게 건강한 목회입니다. 자주 듣는 말이지요. 목회자는 리더십을 책임지고, 사역은 평신도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리더십과 사역을 전부 독차지하고 혼자 뛰겠다고 하는 것은 전부 죽는 것입니다. 요즘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기업이 어디 있습니까? 목사는 평신도의 가슴에 주님의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서 목사와 함께 동사할 수 있는 사역자로 발굴하는 것이 목사의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리더십을 장악하는 것이 목사의 일입니다. 이 리더십으로 인해서 많은 평신도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서 사역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 목사의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교단 일이든지 한국교회 일이든지 세계교회 일이든지 누구하나 독불장군처럼 혼자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건전한 리더십을 아직 기초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갱신협의회가 참으로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을 수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 모두가 혼자 뛰겠다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으면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에 있는 많은 건전한 동역자의 가슴에 함께 뛸 수 있도록 동기부여 하는데 힘을 합해야 합니다. 이게 건전한 리더십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자”나 “여러분이 하십시오”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자"입니다. "우리가 일어나서 성을 쌓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와 이와 같은 열정이 모든 교회 성도들, 특별히 지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우리 한국교회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성벽은 반드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질적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와 교단과 또 전반적인 기독교의 분위기가 얼마나 저하되었는가? 무슨 말을 하면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것은 뒷전입니다. 항상 계산부터 먼저 합니다. 얼마나 병이 든 모습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옳으냐 그르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입니다. 주님의 명령인가 아닌가 입니다. 이게 중요한 우리의 관심사인데 그건 뒷전에 놓고 계산부터 먼저 합니다. 나한테 어떤 유익이 있겠는가? 손해는 없는가? 이런 식으로 계산하는 머리만 돌아가니까 교회가 질이 안 떨어질 수 있습니까? 세속화 안 될 방법이 있어요? 지도자들의 머리가 그렇게 돌아가면 어떤 면에서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해득실을 먼저 따지고 겁부터 집어먹고 고통이나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될 일에는 슬슬 도망치고 그렇게 하면, 나 자신도 움직일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하등의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설교를 잘한다 해도 설교를 위해서 설교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도자로서 설교하는 것은 못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특별히 저 자신을 놓고 다시 한번 우리 마음가짐과 태도에서 잘못된 것을 느헤미야를 통해서 바로 고침받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느헤미야가 주는 교훈은 반대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지혜를 배웁니다. 느헤미야를 보면 굉장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선한 일에는 반대가 반드시 따릅니다. 곡식을 심은 논에 가라지가 자라듯이 호사다마(好事多魔)의 원리가 항상 따르기 마련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은 변화를 비판합니다. 변화를 그들은 위협이라고 간주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가 그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입니다. 본능적으로 발전과 성장을 거부합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빌 헐이라는 사람이 전통과 전통주의를 이렇게 구별했습니다. 우리는 보수주의계열에 있고 지금까지 전통을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전통은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전달되는 거룩한 선조들의 사람들의 믿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전통주의는 ‘교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지도자들의 죽은 믿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교단의 중요한 흐름을 보면 전통이 살아있는지, 전통제일주의가 살아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다시 한 번 깊이 반성하고 그 맥락을 다시 한 번 찾아서 점검을 해야 합니다.

이런 전통제일주의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결국 느헤미야를 반대해서 일어났던 산발락과 도비야의 역할을 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들이 얼마나 느헤미야를 괴롭혔는지를 압니다. 성벽을 쌓지 못하게 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봅니다. 비웃습니다. 악성루머를 터트립니다. 위협하고 정치적인 모략을 하고, 나중에는 안 되니까 달래고 달래도 안되니까 선지자들에게 돈을 먹여서 거짓예언을 해서 그 영혼을 두렵게 만듭니다. 가지각색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을 해서 성벽을 쌓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산발락과 도비야. 그러면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그 지역에서 수십 년, 백 년이 넘도록 기득권을 누려온 실력자들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실력자들이었습니다. 경제권을 갖고 있는 실력자들이었습니다. 성벽이 없음으로써 그들은 유대인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상대하고 마음대로 회유할 수 있었고, 자기들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 유대인들과 얼마든지 상거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쌓여지고 예루살렘 성벽이 닫혀지고 열리고 하는 이런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구조물이 생기면, 이제 유대인들은 자기들끼리 밀착하고 자기들끼리 주체성을 되찾게 될 것이 뻔하지요. 그리고 그들은 자연히 성전에 모여서 예루살렘 성문을 닫아놓고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고, 유대인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긍지를 살릴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성문 닫아걸고 안식일을 지키며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또 가나안의 잡족들과 차별성을 더 드러낼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옛날에 적당히 거짓말하면서 바꾸고 주고받던 모든 이해관계가 다 무너져버립니다. 산발락의 입장에서 볼 때 장사가 바닥날 판국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병이 들면 들수록, 유대인들의 주체성이 희미하면 할수록 산발락은 유리한 겁니다.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쌓여져서 유대인들의 신앙이 다시 불붙기 시작하면 그들은 피해를 보니까 죽자 하고 막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대를 놓고 느헤미야는 실제적인 싸움을 벌였습니다. 느헤미야가 가르쳐준 중요한 교훈은 몇 가지 있습니다. 반대자들을 어떻게 다루느냐? 첫째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다루었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를 읽으면 어려운 일을 만나고, 반대를 만나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쓸 때마다 느헤미야가 간단하게 기도문을 쓰고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지혜를 얻었습니다. 반대자들의 의중을 미리 읽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반대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잠잠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해답을 얻었습니다.

교회갱신을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자들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반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해서 우리와 하나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갱협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산발랏이나 아비야, 도비야라고 지칭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갱신을 하자고 할 때 그 갱신의 의도를 잘못읽고 반대를 한다든지, 비판을 한다든지 노골적으로 대적을 할 때에는 일단은 영적 싸움을 벌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다룰 때 성경이 가르쳐주시는 방법대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느헤미야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무릎을 꿇고 싸우든지, 서서 싸우든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하라고 합니다. 무릎을 꿇고 싸우면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이깁니다. 서서 싸우면 보기에는 힘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나중에 지기 쉽습니다.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침묵해야 할 때를 알고 소리 내어야 할 때를 압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피해야 할 때를 알고 맞서야 할 때를 분별합니다.

느헤미야가 반대자들을 다룰 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교훈 두 번째로 당당하게 맞서야 될 때는 맞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성벽을 쌓는데 왜 겁을 내야 합니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지, 또 우리가 제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누구냐?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가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칙 아닙니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동역자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느헤미야가 이 소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느헤미야가 반대자를 놓고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판을 받을 때 우리가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겁을 집어먹고 미리 손을 터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무너지면 개교회가 아무리 잘 되도 소용없습니다. 잘 알아야 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 호소문을 읽어보셔서 알겠지만 기독교가 천주교에 비해서 사회 앞에 이미지가 말이 아닙니다. 꽃동네의 오 신부님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천주교는 뭔가 세상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있잖아요. 그리고 신부들은 다 하나의 유니폼 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들 개개인의 것은 노출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신부면 신부의 이미지가 얼마든지 좋은 방향으로 정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맘대로 옷 입고 다니고 내 맘대로 행동하지 않습니까? 말이 아닙니다. 일반인들이 볼 때 오죽하겠습니까? 지금 천주교신자는 계속 늘어납니다.

지난 1월엔가 2월엔가 목사 20여 명이 공동으로 비자 받아서 미국에 가서 전부 증발해버렸답니다. 그러니까 미국 대사관에 가보세요. 비자가 나오는가? 서류 완벽하게 꾸며 갑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들 단기 썸머스쿨을 보내려고 완벽하게 준비해서 비자를 신청했더니 서류도 안 보고 씨익 웃기만 한대요. 여러분, 이런 망신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캐나다에 유학가려고 하던 우리 교회 부목사가 비자를 못 받아서 할 수 없이 영국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수치스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교회 장로들이 저를 찾아왔어요. 그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저에게 상담을 요청하기에 들어주었습니다. 그 교회 장로들의 주된 관심사는 교회 안에서 실권 있는 보직을 갖는 것입니다. 즉 돈을 많이 쓰는 보직입니다. 선교부나 교육부나 도장 가지고 목에 힘주고 으시댈 수 있는 그런 자리입니다. 이것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데 꼴불견입니다. 그래도 실권 자리는 하나인데 여러 사람한테 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에게 주고나면 그 자리를 들어가려다가 못 들어간 장로는 그 때부터 야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한직으로 밀려난 사람은 그야말로 이를 갈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저에게 상담한 장로님은 은퇴를 하신 분인데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고 묻기에 "저도 모르겠습니다" 했습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추태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데 세상 같으면 차라리 어떤 방법이라도 동원하고 기라도 죽이고, 힘이 없으면 밟아놓기라도 하겠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 더욱이 장로들이 그런 일을 하는데 어떻게 치료합니까? 대부분 교회마다 그 꼴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부임하기 전에 그 교회에 ‘삼김’이 있었답니다. 장로들 중에 세 김씨가 있어가지고 실권을 쥐고 흔들고 말 안 들으면 칼부림을 치고 그랬답니다. 제가 섬기던 선배 목사님은 49세에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그 교회에 와서 5-6년 목회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유명한 분입니다. 얼마나 신령한 분인지 모릅니다. 영적인 것, 지적인 것을 완전히 구비한 지도자입니다. 그 분이 그 교회에 오셔서 저보고 그래요. "나 시집 잘못 왔어."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그 교회 당회에 들어와서 하는 꼴을 보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는데 어떡합니까? 당회에 들어가면 두 시간, 세 시간을 장로들이 싸우는 꼴을 구경을 해야 되니 목사가 얼마나 기가 막혀요? 그 싸움 중에 유명한 싸움은 저를 부목사로 올리는 것을 놓고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는 이북사람들이 세웠습니다. 그러니 고향에 대한 애착도 있고 그렇겠죠. 그러나 저는 남쪽 사람입니다. 교육목사, 교육전도사 때는 괜찮아요. 그러나 정식으로 부목으로 임명하려고 할 때는 문제가 된 겁니다. 목사님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지역감정으로 싸우면 안 된다. 담임목사면 몰라도 부목사인데 왜 지역감정으로 싸우느냐?" 그래서 그 목사님 편을 드는 장로님 몇 분이 계세요. 그 다음에 상당수는 반대입니다. 얼마나 장로들끼리 싸우는지... 그런데 목사님은 끝까지 자기주장을 관철하겠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절대 양보하지 못한다 그래가지고 결국 관철을 해서 제가 정식으로 부목사가 되어서 2년반을 섬기다가 결국 나왔습니다.

여러분, 이런 곳이 교회라고 상상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 비일비재죠? 그러니 이런 교회 풍토를 놓고 나 몰라라 하고 팔장을 끼고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성벽을 쌓으라고 하는데 욕먹기 싫고 싸우기 싫고 고통을 감수하기 싫어서 나 몰라라 해요?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의교회가 아무리 저 혼자 잘되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교회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사람들이 점점 교회를 떠나고 젊은이가 떠나는데 한 교회 잘된다고 주님이 영광 받으십니까? 그러니까 오늘 이 자리에 주님이 우리를 모아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부터 회개하자고 하죠. 어제저녁에 얼마나 가슴 깊은 회개의 시간이었습니까? 오늘 새벽에도 얼마나 가슴깊이 회개했습니까? 흐리멍텅하니까 13년 동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주시지 않았다. 우리에게 얼마나 심각한 메시지입니까?

끝으로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너진 성벽을 쌓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목적은 말씀의 부흥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성벽을 다 쌓았습니다. 대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모아서 인구조사를 다시 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벽 쌓고 확인했어요. 이제는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일이 끝납니까? 아닙니다. 만약에 이것으로 일이 끝난다고 한다면 느헤미야는 성벽 쌓은 것을 가지고 자기 공로를 자랑하다 끝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쌓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수단이며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 다시 황폐한 이스라엘에 돌아와서 이방사람들하고 섞여 살면서 100여 년 동안 버티면서 영적으로 말할 수 없이 침체되고 메말라있는 백성에게 말씀의 부흥의 불길이 다시 불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8장, 9장으로 넘어가면 성벽을 다 쌓은 다음에 인구조사를 끝내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모인 자리에 느헤미야는 에스라를 초청해놓고 말씀을 듣고 읽게 하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 가운데서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통곡하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고, 말씀을 깨닫는 기쁨 때문에 춤을 추기도 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남녀노소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성령의 감동을 가슴으로 체험하면서, 온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동안 세속화되었던 모든 더러운 찌끼를 전부 흩어내고, 잘못된 모든 부분들을 도려내고, 냄새나는 모든 부분들을 다시 성령의 기름으로 치는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목적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교회갱신이 목적입니까? 교회갱신이 목적이라면 희망이 없는 거죠. 교회갱신은 수단입니다. 교회갱신이 어느 정도 되고 성벽이 쌓아지면, 이제는 교회가 질적으로 떨어지고 세속화 된 곳이 하나하나 정리가 되면, 하나님께서 드디어 말씀의 은혜, 성령의 역사를 교회에 부어주실 것을 우리는 기대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교훈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하고, 정치하는 것은 다르다고 많은 지도자들에게 그 이중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봅니다. 성경적으로 하자고 하면 순진한 사람 취급하고, 항상 이중적인 생각으로 사람을 보고 안건을 토의하고 이중적인 생각을 굴리면서 한국교회 운운하고 있는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하고는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또 그런 풍토에 짓밟혀서 어떻게 우리의 짧은 한 생을 보냅니까?

그러므로 말씀의 부흥이 와야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남 욕할 것 없어요. 우리도 다 침묵하면서 동조한 사람들이니까 똑같이 냄새나는 사람들입니다. 성벽을 쌓고 말씀의 부흥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 일만교회 운동보다도 우선하는 것이요, 세계선교보다도 앞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사를 보세요. 병든 교회가 그 세대를 책임진 예가 있습니까? 교회 수가 많다고 해서 그 세대를 책임진 예가 있습니까? 일만교회 운동보다도 더 우선되는 것은 우리는 성벽 쌓고 말씀의 부흥을 다시 하나님께 구해서 얻는 것입니다. 세계선교 부르짖는 것보다 더 우리에게 우선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세상과 구별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앞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만 되면 일만교회 운동은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만 되면 세계선교도 그렇게 요란하게 신경 안 써도 다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왜 이 자리에 불러 모으셨는지 다시 한번 깊이깊이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교회갱신협의회 등록하라고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억지로 강요해서 등록하는 사람은 들어와도 별 볼일 없어요.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서 성벽을 쌓으라는 명령을 주시니까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이 등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벽쌓은 다음에 하나님이 반드시 이 한국교회에 보내주실 말씀의 부흥, 성령의 새로운 바람, 이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등록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옵니다. 반드시 말씀의 부흥이 옵니다. 저는 다니면서 놀라운 일을 많이 봅니다.

1996년 선교한국 집회에 2주전에 제가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5천 5백 명의 젊은 대학생들이 한양대학교 체육관에 모여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 때 온도가 34도까지 오를 때입니다. 얼마나 찌는 더위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5천 5백 명의 남녀 학생들이 그 체육관 안에서 밤낮없이 뒹굴면서 은혜 받으려고 사모하는 그 모습을 제가 보면서 너무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무슨 이변입니까?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놓고 자타가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마당에 한쪽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을 보세요. 거기에 모인 젊은이들은 일반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고 선교 헌신자를 발굴하는 집회입니다. 2년마다 한번씩 모이는데 2년 전까지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이 5천 명이 넘어요. 그런데 이번에 5천 5백 명이 모였어요. 헌신자가 몇 명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 젊은이들이 복음을 위하여 21세기에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곳이면 여리고와 같은 난공불락의 도성에도 생명 걸고 찾아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선교마인드를 가진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렇게 뜨거운 집회를 하고 있는 곳이 한국교회입니다.

여러분 똑똑히 보세요.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코스타 집회를 아시죠? 미국, 일본, 중국, 구라파, 러시아, 호주, 뉴질랜드, 각 나라마다 유학생들이 가있는데 그 유학생들을 위해서 1년에 한번씩 특별히 집회를 열어줍니다. 많은 목사님들과 강사들이 무보수로 전부 자기 돈을 써가면서 집회 인도를 합니다. 이번에 일본에 950명 모인 학생들, 제가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뜨거운지, 일본을 복음화 시키자!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교회가 오늘날 이만큼 세속화되고 힘을 잃어버리고 지도자들이 동서남북을 가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이런 형편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뭐냐? 이것은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대해서 소망을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한국교회에 꿈을 갖고 계시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21세기가 되고 남북이 통일되는 날,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온세계를 복음화시키기 위한 큰 계획을 한국교회를 놓고 갖고 계신다는 것을 저는 마음에 느낍니다. 그런 계획이 없다면 이런 이변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꿈을 가지고 오늘도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계시는데, 교회 지도자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너무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이 시대를 그냥 흘러보내면 다음의 세대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큰 교회를 하든, 작은 교회를 하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를 통해서 진정한 리더십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배우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이 어려운 일, 반대와 방해를 무릅쓰고 성벽을 쌓고 그 성벽 안에 있는 성소를 거룩하게 보존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함을 다시 회복시키고 세상과 구별시키고 하나님 앞에 옷 벗고 나설 때에 위로부터 말씀의 부흥, 성령의 새로운 역사가 이 한국교회에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는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