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언론은 경쟁하듯이 최순실 비리를 캐내고, 뉴스는 온통 이 사건으로 채워지고 있다.

모든 비리의 몸통은 국민이 위탁한 권력으로 최순실의 뒤나 밀어주고 더 나아가 그녀의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린 박근혜 대통령이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5%로 곤두박질치고 90%에 이르는 사람들이 대통령을 불신하고 있다.

이처럼 요동하는 정치상황에서 한국교회는 국가에 대한 지금까지의 자세를 철저히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동안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한국교회의 흐름을 보면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무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정치화이다. 두 극단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현상이다.

정치적인 무관심은 정교분리라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신앙이 다분히 이분법적이고 이원론적인 성향에 치우친 데서 나온 결과물이다. 많은 교회들이 신앙과 삶을 교회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 가두면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그저 전도의 대상일 뿐, 하나님의 통치의 뜻을 따라 개혁하고 변화시켜서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못한다.

이런 가운데 교회가 생각하는 국가의 역할이란 단순하다. 외적과 악으로부터 사회를 안전하고 지켜서 교회로 하여금 평안 가운데 경건활동을 하도록 방패막이가 되는 것이다. 국가의 역할이 이런 안보론에 치우친 결과, 교회는 겉으로 정교분리를 표방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무조건 보수정치의 편에 서고 그들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되어왔다. 오랫동안 박정희 대통령의 편이 되었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의 후광을 등에 업고 등장한 박근혜를 무조건 지지하면서 그녀의 견고한 후견인 역할을 해왔다. 10월 24일 박대통령이 최순실 사건을 호도하고 덮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개헌안을 내놓자, 한기총과 한교연은 바로 그날 신속하게 지지성명을 내었다. 예민한 정치 사안에 어찌 그리도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 청와대의 은밀한 요청이 있었는지 아니면 자발적인 충성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회가 얼마나 정치화되어 있는가를 보게 해준다.

이것이 개혁주의신학에 선 교회의 모습인가? 칼빈은 정치와 교회의 역할분리에 치우친 루터의 ‘두왕국설’과 달리, 두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해하면서 교회의 정치적인 책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실제로 제네바시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섰다. 루터의 ‘두왕국설’과 맥을 같이 하는 ‘정교분리’는 우리 개혁주의신앙이 아니다.

또한 국가의 역할은 안보나 경제성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국가권력의 우선 역할은 오히려 정의실현에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국가의 의무는 공의를 행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돌아보고 공정한 재판을 통해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IV,20,9) 한국교회는 다시금 이 ‘사회적 정의’라는 시각과 잣대를 우선하여 국가권력을 책임 있게 선택하고 비판하고 책망할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혼탁한 상황에서 칼빈이 던지는 말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나는 왕들의 사나운 방종에 대하여 그들이 의무를 좇아 항거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며, 오히려 미천한 일반대중에 대한 군주들의 폭정을 눈감아 준다면 그들의 위선을 극악한 배신행위라고 선포할 것이다.” (IV,20,31) “만일 그들의 명령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이라면, 그 명령을 존중하지 말라. 이럴 때 집권자들이 가진 위엄에 조금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IV,20,32) 이처럼 그릇된 위정자에 대한 시민불복종의 정당성을 언급하면서 기독교강요가 마쳐지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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