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구마모토 현은 연쇄 지진으로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보고 있다. 마치 지옥 같은 상황이지만 주민들이 보여 주는 배려와 질서의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이재민들의 피난소인 스나토리 초등학교에서 아침 식사로 죽을 배급하고 있었다. 1차 배급을 한 후 원하는 사람에게는 한 번 더 죽 배급을 하겠다고 했으나 다시 찾아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여덟 식구의 가장인 노하라(45)씨는 죽 두 그릇으로 전체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렇게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마실 물을 공급 받기 위해 선 줄이 300m가 넘었다. 적어도 두세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새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량보다 더 많이 달라는 사람도 없어 질서요원이 한 명도 필요 없었다. 이런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나 그들의 앞선 질서의식은 배우고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그와 같은 의식과 문화가 있다. 태안 기름유출 사건, 세월호 사건 등 각종 재난 때 범국민적인 봉사참여와 모금운동을 목격했다. 특히 그 현장에서 수많은 기독교인과 교회들이 아픔에 동참하며 보여 준 배려와 질서의식은 “한국교회, 아직 살아있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힘들고 어려운 처지가 됐을 때의 배려와 질서의식은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 내 식당에서 정해진 배식시간 전이나 후에 와서 식사를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 봉사요원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거나 식사가 부족하다고 하면 거침없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 교회 이름이 적힌 승합차를 운전하면서 과속, 정지선 무시, 신호위반을 서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급기야 접촉사고가 났을 때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해대는 교회 중직을 본 그 교회 교인은 “차라리 교회 차량이 아니었으면 부끄러움이 덜했을 텐데”라며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일반식당에서 교인들과 같이 식사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그 식당의 종업원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다. 그런데 종업원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음식 맛이 없다고 큰소리로 주인을 부르며 소리 높여 책망할 때가 있다. 조용히 예의를 갖춰 말해도 될 터인데 배려의식이 아쉽다.

소수이기는 하나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들이 너무도 쉽게 일반 법정의 문을 두드린다. 그들에게 노회와 교단법의 판결은 이미 휴지조각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보다 내가 먼저 “회복은 다시 시작할 때 이뤄지며 도전은 언제 시작하더라도 결코 늦지 않다”는 고백을 외치며 다시 일어나야 할 때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먼저 내 말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며, 내 행동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다면 아직 소망은 있다. 교회 안과 밖에서 내 얼굴이 좋은 내용의 전도지가 되고, 내 삶이 움직이는 교회가 된다면 회복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자신에게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배려했기 때문이요 구원질서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배려와 질서의식이 자신의 언행을 통해 드러나고 우리들 각자의 성품이 됐으면 한다. 그래서 어느 날 믿지 않는 사람이 “오랫동안 당신을 보았는데 참으로 배려있는 분이네요. 혹 내가 종교를 갖는다면 당신이 믿는 기독교를 믿고 싶어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하고 소망해 본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