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인문학>의 저자 이지성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지배계층이 존재한다. 지배계층은 보통 두 부류로 나뉜다. 깨어있는 지배계층과 타락한 지배계층. 깨어있는 지배계층이 실권을 지고 있는 나라는 미래가 밝다. 그들의 기본 정신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락한 지배계층이 실권을 지고 있는 나라는 암울하다. 그들의 기본정신이 탐관오리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지배계층은 국민에게서 나오고 타락한 지배계층은 잠들어있는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말했다.

얼마 전 리서치기관에서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비종교인들에게 가장 매력 없는 종교는 기독교로 나타났다. 개신교인들은 종교적 열심이 가장 높은 반면, 삶은 가장 매력 없어 보인다는 뜻이다. 또한 몇 년 전 종교사회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이웃을 위한 봉사의 면에서는 개신교가 가장 잘한 것은 있었지만 사회적 신뢰도는 가장 낮았다.

한국교회가 선교 100여년 만에 세계가 놀랄만한 부흥의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허황된 성장의 뒤안길에는 수많은 부작용의 피해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목회자들의 기독교윤리 문제들이 세상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신학교수 겸 목사가 자신의 딸을 학대해서 살해하고 시신을 1년 가까이 유기하고, 기도로 부활시키겠다는 사이코패스적인 범죄는 영성 없는 지성이 얼마나 무서운 흉기인가를 우리는 목도했다.

교단 최고 지도자들은 입버릇처럼 개혁주의 장자교단, 세계 최대 신학교를 운운했지만, 개혁신학의 정체성은 사라져 버리고 삶이 없는 낡은 교리만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이제 자랑스러워했던 세계적인 신학교는 고등종교 실업자를 양산하는 집단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세상은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지만, 새로운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영적 시스템의 변화는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최대 장자교단은 교권의 힘과 거짓된 하나님 추종자들에 의해서 탐욕의 장으로 바뀌어 진지 오래다. 다음세대 영적지도자를 길러내야 할 신학교 현장은 정치적 이전투구의 현장으로 바뀌어 버려서 “과연 합동교단의 미래와 신학에 소망이 있을까?”하는 자조적인 질문을 해본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허망하고 더러운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이 더러운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될 때 그 복음은 거짓 복음일 뿐이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의  <성공주의 목회를 포기하라>에서 “목회자의 소명은 하나님 말씀을 깊은 의미에 따라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명예와 성공을 찾기 위해 매혹적인 종교의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했을 때 유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성전의 권력자들이었다. 로마 정부의 허락 하에 성전의 모든 일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종교는 권력의 도구요 치부의 수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긴 했지만 단지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아픔은 무엇인가? 교회는 성장시켰는지 모르지만 존중받고 신뢰받는 목회자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기형적인 성장과 복음은 교회와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킨 부끄러운 영광일 뿐이다. 이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영광을 기다리면서 거짓된 성공신화의 모래위에 교회를 세우려 했던 부끄러운 영광을 떨쳐버리자. 주님이 세우고자 원하셨던 교회의 본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도 교회는 이 땅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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