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이 자유로운 때가 있지만 어떤 때는 권력이나 어떤 세력의 반대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는 1880년대에 처음으로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했고, 그렇게 세워진 교회들은 나라를 강탈한 일본에 의해 모진 탄압을 받았다. 그 때, 성경대로 믿음을 지키던 성도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렇게 믿음을 지켰던 성도들 이야기다.

많은 교인들이 일본의 강요를 거부하고 신사참배와 천황숭배를 거절했다. 그 일로 감옥에 갇힌 여자들까지도 고문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다.

조수옥 권사의 간증이다.

평양형무소 여자감방 3곳은 기독교 신자들이 감방장을 맡고 있었다. 1호 안이숙 선생, 3호 조수옥 전도사, 5호 최덕지 전도사였다. 최덕지 전도사는 주일만 아니라 매일 3회씩 예배를 인도했다. 물론 공식 예배를 허락되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옆방 신자들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다 함께 예배합시다.”하고 찬송가를 선창했다. ‘영혼의 햇빛 예수여 가까이 비쳐주시고 이 세상 구름 일어나 가리지 않게 하소서 주 없이 살수 없으니 언제나 함께 계시고 주 없이 죽기 두려워 밤에도 함께 하소서...’ 눈물 배인 애절한 찬송이었다. 여러 방에서 찬송이 터지면 간수들이 달려오며 소리치고 욕했지만 찬송은 그치지 않았다. 이어서 조 전도사가 성경을 암송하고 기도를 드렸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아멘!”을 외쳤다. 매를 맞아도, 입을 틀어 막혀도 심령에 솟구치는 찬송과 기도를 막지 못했다.(심군식, 조수옥 권사의 생애)

김두석 선생(동래의신학교 교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교직을 물러났다.

당장 생활이 곤란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딸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가면서 얻어먹는 밥, 굶어 죽더라도 받아먹지 않으리라.” 하고 딸과 함께 기도했다. 모녀가 거룩한 삶을 작정한 것이다. 김 선생은 주기철 목사가 계시는 마산문창교회서 찬양으로 예배를 섬기고 있었다.

평양여자신학원에 입학했다. 거기서 주기철 목사와 안이숙 선생을 만나서 순교정신을 굳혔다. 마산으로 내려왔다가 경찰에 붙잡혔고, 부산 도경 감옥에 갇혔다. 거기서도 주일이면 11시 예배를 혼자 드렸다.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암송한 후에 기도를 드렸다. 어떤 때는 터져나오는 찬송을 주체할 수 없어 큰소리로 불렀다. 간수가 곤봉과 채찍을 들고와 구타했다. 그래도 날마다 아침과 오후 3시 그리고 저녁예배를 드렸다. 여자 간수가 어떤 때는 최전도사의 두 손을 뒤로 묶고 입도 틀어막았다. 그래도 기도하고 찬송했다.

언니가 찬송가를 적어 보낸 우편엽서를 받았다. ‘어둔 것 후에 빛이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노곤한 후에 쉬임있네 고통한 후에 쾌락 있고 십자가 후에 면류관과...’ 구구절절 읽고 또 읽고 찬송하며 울었단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착고에 매여 찬미하고 기도했던 것처럼 그렇게 믿음을 지켰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지진이 일어나고 몸이 풀렸던 것처럼, 하나님이 이들을 지켜주셨다. 참으로 정금 같은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신실한 성도들이었다.

그 때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셨던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를 할 수밖에 없는 교회를 사임했다. 그리고 교회를 순회하고, 지하교회 성도들을 만나서 신차참배거부운동을 폈다. 주일이면 혼자 산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다. 기도와 찬송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고는 산천을 향해 설교를 했다. 한국 교회를 향한 애타는 말씀선포였을 것이다. 평양형무소 갇혀있을 때 폐병을 앓다가 해방으로 출옥했다.

1945년 8월 17일.

형무소를 나온 한상동 목사와 출옥성도들 그리고 마중 나온 교인들이 모여 소리 높여 찬송했다. ‘예수의 이름 권세여 엎디세 천사들 금 면류관을 드리고 만유의 주 삼세...’ 교회의 승리를 찬양하며 거리행진에 나섰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성도에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 하겠네’ 일제 때나 6.25 후에 순교자들을 기리며 불렀던 역사적 찬송가이다. 앞서 가신 성도들의 순교신앙을 따르는 순결한 믿음, 굳센 믿음의 회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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