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목사라며 병원심방을 가서 여러 분이 계신 병실에 들어가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맑은 물을 다 더럽혔다고 말할 수 있는 때도 지나간 것 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독교인들의 추문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 그래서 일부 기독청년들은 ‘목사들이 이래도 계속 교회를 다녀야 하는가’, 아니면 ‘이번 기회에 성당으로 가야 할까’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어느 여자 집사는 주일예배를 드리려 집을 나오는데 믿지 않는 남편이 “당신 오늘 교회 가서 목사에게 칼 맞지 않고 무사히 집에 돌아올 자신 있냐?”라고 말하는데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한다.

이제는 어느 교인들, 혹은 몇몇 장로들이 아니라, 목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국민들이 볼 때 목사가 기본 상식에도 못 미치는 행동을 할 때에 부정적 여파는 ‘나비효과’가 아니라 ‘폭풍효과’로 나타난다. 이번 목사끼리의 칼부림 사건 후 그 여파를 주일예배 출석률과 교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도는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교회에 대한 호감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는 이 때, 다시 얼음물을 스스로 붓고 말았기에 더 참담한 심정이다.

이제라도 먼저 우리 목사들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 거룩한 슬픔과 진정한 회개의 열매를 하나님과 교인 및 국민들에게 보이면서 이런 고백을 해야 한다. “한국목사들의 개혁이 한국교회의 개혁이다!” 즉, 목사들이 좀 더 죽고 십자가 뒤로 숨겨져 보이지 않아야, 한국교회와 예수님의 복음이 다시 살게 될 것을 고백하고 행해야 한다.

특히 상대적으로 교인들이 많고 재정이 풍부한 교회 목사들과 노회, 총회, 연합회에서 직분과 명예가 남다른 목사들의 ‘윤리의식’과 ‘공인의식’의 회복이 절실한 비상시대임을 인지해야 한다. 눈에 띄는 자리일수록 옷깃을 더 여며야 하는 법이다.

동시에 총회적으로 사역할 목사 선택에 대한 기준 강화도 필요하다. 어느 정치계파라는 이유로, 지역이 어디이고, 어느 학교 출신이냐에 따라 표를 몰아주거나 사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또한 신학교에서는 그 어느 과목보다 목회자로서의 기본 인격 및 감정조절능력을 배양하는데 우선적 결단이 필요함을 공감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회복을 위한 결단의 시간도 필요하다. 이번 칼부림 사태에 대해서도 교단적인 목사회개연합기도회, 포럼, 성명서 및 캠페인이 지속적으로 필요한데 생각보다 너무 조용하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안일한 대처만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 교단적 결단이 미흡하여 혹 자생적 목회자 단체나 평신도 연합단체에서 이런 사역을 먼저 한다면 이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그 누구를 비난하며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목사들이 아니라 이번 사태처럼 국민과 교인들의 저울에 달아 함량이 부족한 모습을 보일 “다음 대상은 바로 내 자신이다!“라는 심정으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볼 때 지금의 이런 아픔들은 한국교회 미래가 점점 더 건강하며 정결해지는 과정 속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 까닭은 타민족 기독교에 비하면 한국 기독교는 130년 이라는 짧은 기간에 너무 조숙해졌고 지나치게 비만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픔들까지 자신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주관하셔서 한국교회의 불필요한 지방 덩어리와 몸무게를 줄이시며 한국교회적 다이어트를 이끄셔서 다시 거듭나게 하시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 그래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지역교회에서 자신을 바쳐 헌신하고 희생하는 수많은 목사들에게 한줄기 희망과 위로를 맛 볼 수 있는 앞날이 되기를 기도하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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