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나라는 역사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역사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수면 밑에 잠복해 있다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드러난 형국이다. 국가를 앞세우는 진영과 민족을 앞세우는 진영의 첨예한 대립은 국민 분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논쟁의 결과는 이쪽저쪽 상관없이 상처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이념의 차이로 주고받는 상처는 높은 가을 하늘의 평화로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안타깝게도 역사문제에서 보듯 진영논리가 한국교회 안에도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년전부터 목회자들의 마음에 금을 내고 있는 대형교회와 소형교회를 상호 적대시하는 논리가 호기(好期)를 만난 듯하다. 빈익빈 부익부의 결과를 도출하는 자본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아픔을 수반한다. 대형교회와 소형교회를 갈라 대결구도로 놓는 현실은 우리나라의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깊은 고민을 가지게 한다. 과연 하나님 나라의 논리, 이름하여 복음의 논리가 교회를 가르는 규모의 논리를 극복해 낼 것인가?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달란트 비유를 설교할 때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그 달란트의 수량에 의해 주님의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받은 은사와 재능과 직분에 충성하기만 하면 주님께 칭찬을 받는다고 전하였다. 이 비유에서 많으냐 적으냐의 수량 문제가 중심이 아니라 주인과의 관계가 중심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크냐 작냐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충성이냐 불충성이냐로 접근하는 원리를 읽을 수 있다. 종은 주인과의 관계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은혜롭고 아름다운 관계는 좋은 열매를 남길 것이고 깨어진 관계는 못된 열매를 맺게 되리라. 남들이 보기에 부족해도 충성할 수 있음을 믿는다. 남들이 보기에 어설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믿는다.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교회는 사람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논리에는 은혜가 깃들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속성이 있다.

고린도교회는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복 받은 교회였다. 은사가 남달리 풍성하였으며 똑똑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를 선호하는 목회자와 성도는 없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진영논리에 의한 파당이 형성되어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우선시해야 하는 고린도교회는 개척자 바울을 추종하는 파와 아볼로와 게바를 추종하는 무리가 존재하였고, 심지어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명분으로 파당이 형성되었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작태인가? 사도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을 쳤다. 사도 바울은 파당의 논리 곧 진영논리를 극복하기 위해 지체의식으로 표현된 한몸의식, 형제의식을 강조하였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12:25~27)

진영논리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지 못한다. 가뜩이나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로 인하여, 온 국민이 몸살을 앓는 현실에서 교회 또한 진영논리에 휘둘려 주님의 소원에 귀를 닫을까 두려워지는 요즘이다.

필자는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성장하여 지하실 교회에 부임한 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한 몸 의식을 견지하기로 마음을 먹고 달려왔다.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가지고 한 영혼의 소중함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있다. 어지러운 영계(靈界)를 바라보며 나 역시도 진영의 논리에 빠져들까 경계한다. 은혜로우신 주님께서 우리 한국교회에 새로운 은혜와 부흥의 시대를 열어주시기를 간구한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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