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차] 내 안에 채워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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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차] 내 안에 채워야 할 것
  • 김순철 목사
  • 승인 2014.08.1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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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9) 교갱협 제19차 영성수련회 새벽기도회

누가복음 8:40~56

요즘 아이들의 수련회를 보면 캐리어가 등장합니다. 과거의 수련회는 조그마한 가방 하나면 되었습니다. 속옷은 3,4일 버티면 되고 칫솔 하나 챙기고 성경책과 필기도구 정도만 가지고 갔습니다. 그것이 다였습니다. 좀 성실하고 부지런한 아이들은 속옷 한 벌 정도는 더 챙겨 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3,4일 수련회를 하는데 옷을 열 벌을 가져갑니다. 캐리어에 가득 차 있습니다. 헤어드라이기, 거울, 스프레이, 폼클린징 등 잡다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개회예배를 드리는데 성경이 없습니다. 왜 성경이 없냐고 물으면 안 가져왔다고 합니다. 옷은 4일 있는 동안 열 벌을 입으면서 성경은 가져오지 않습니다. 넣을 데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큰 가방을 가져왔는데 성경은 넣을 데가 없어서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수련회에 학생들을 보내놓고 위로차 방문했더니 한 아이가 신발 세 켤레를 가져왔습니다. 왜 세 켤레가 필요한지 물으니 오고가는 차에서 신는 신발, 다른 학생들 앞에서 내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힐, 그리고 씻을 때 신는 슬리퍼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없습니다.

가끔은 제 스스로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내 마음에 무엇을 품고 무엇을 준비하고 살아가는가? 우리 스스로도 한번쯤 질문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 주제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품고 목회하고 계십니까?

저는 아직 50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목회도 그렇게 길게 하지 않았습니다. 94년도에 결혼하고 바로 단독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전남 무안군 해제면 대사리라고 하는 시골입니다. 성도라고 해봐야 15명입니다. 모두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십니다. 이분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일하러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십니다. 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아침에 11시 예배를 위해서 10시 30분에 차임벨을 울려줍니다. 그런데도 교회 건너편에서 그대로 밭을 매고 있습니다. 15분 전에도 울려줍니다. 여전히 밭을 매고 있습니다.

저는 속으로 ‘차임벨을 울리면 얼른 씻고 교회에 올 것이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11시 예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으면 밖에서 소란스럽게 몸을 털털 털면서 시간을 잘못 봤다며 들어옵니다. 그것을 매주 반복합니다. 그때가 28살이었습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그런 모습을 보니 오장육부가 꼬여서 도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꼬락서니를 보고 얼마나 화가 나던지 “당신이 권사냐, 당신이 집사냐? 그 직분 개에게 주라”며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교인들이 왜 교회에 오느냐?” 너무 기본적인 질문 아닙니까? 여러분도 다 알고 계십니까? 교인들이 왜 교회에 옵니까? 저는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왜 저런 모습이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저 교인들, 세상에서 네가 아니라도 얻어터지고 피투성이 되어서 살다가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아니냐?’라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전쟁터 같습니까? 성도들은 신앙을 위해서 피 터지게 싸웁니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 같고 매일매일 안일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 같은데, 피 터지게 싸우다가 주일이 되면 그래도 하나님 얼굴 보면 위로가 되고 말씀 들으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주간 내내 세상에서 피 터지게 싸워서 지치고 상처받은 성도들을 또 때립니다. 왜 밖에서 승리하지 못하느냐고, 왜 지고 오느냐고 때립니다. 그러면 얻어맞은 교인들은 밖에 나가서 무엇을 할까요? 무슨 힘이 있습니까? 무엇으로 싸우며 무엇으로 이기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실 때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뭘까?’ 그리고 그때부터 교인들이 바뀌어야 될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의 시각이, 태도가, 메시지가 바뀌어야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부터 메시지의 주제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도 주시고 지금도 사랑합니다”라고 위로하며 격려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너무 기복주의적 설교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목회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목회는 먹회다”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그들이 세상에 가서 싸울 수 있는 에너지를 먹일 수 있는 것이 목회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를 먹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야단칠 때에는 눈 하나 깜짝 안하던 그들이 사랑과 은혜를 먹으니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말을 하면 우리 교회 어려운데 전도사님이 밖에 가서 보조 좀 받아오라는 것이 사고에 박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선교를 하기 위해 한 달에 만원이라도 선교하자고 하면 보조를 받아야 할 교회인데 무슨 선교냐고 했던 분들이 3년 만에 3만원을 선교에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너무 감동적이었고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었습니다. 아니 금액이기 전에 그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2000년 1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제 동기들이 강도사 고시를 두 번 봤던 동기들입니다. 가을에 인허를 받아야 하는데 강도사 고시 다시 보느라고 1월 달에 인허를 받았고, 총회에서 가을에 안수를 주기로 결의했는데 제가 속해있는 노회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노회 어르신 목사님께서 “1년 채워부러”라는 한마디로 2000년 1월 7일에 안수를 받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짧은 기간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목회하기 싫습니다. 며칠 전에 선배 목사님과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딜레마에 빠진 것 같습니다. 뭔가 새로워져야 할 것 같은데, 제 자신도 교회도 앞이 안보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목회하기 싫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만둘래?”라고 물으시면 감사하다고 할 것 같은데 그 말씀을 안 하십니다. 선배 목사님께서는 기본을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기본이고 본질입니다. 기본이고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야이로가 등장합니다. 12살 딸이 병들어 죽게 됩니다. 지체 높으신 분이 시골 촌뜨기 선배에게 도움을 청하러 갑니다. 어렵게 부탁했습니다. 집에 와서 내 딸을 살펴달라고 이야기합니다. 허락을 받고 이제 집에 가기만 하면 딸이 나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습니다. 그런데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방해합니다. 그 여인으로 인하여 잠시 머물러 있는 동안 집에서 소식이 오기를 딸이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립니다. 왜 하필이면 저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아서 방해를 하는지 원망스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저 여인이 만지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시지, 붙들고 말을 해서 시간을 지체하시는지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야속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저 여인도 맘에 들지 않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또 다시 그에게 찾아옵니다. 우리 삶속에 절망적이 상황들은 늘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갈릴리를 건너가는데 풍랑이 옵니다.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죽어갑니다. 이것이 절망적인 상황 아닙니까? 한 가정의 가장인 나사로가 죽은 상황을 어떻게 극복합니까? 차기 왕으로 선택받았지만 끊임없이 도망다녀야 하는 다윗은 어떻습니까? 지도자로 선택받았지만 해도 해도 불평만 하는 백성들을 향한 절망적인 모세의 상황은 어떻게 극복합니까? 곤고해 집니다.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목회도 그렇고 삶도 그렇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아직 50이 안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도 저는 굉장히 가난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5.18을 맞았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에 칠판 한쪽 구석에 김순철이라는 이름이 지워질 날이 없었습니다. 등록금을 안낸 사람 명단입니다. 어느 때는 아예 지워지지도 않은 채 다음 달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교무실로 불려갑니다. 큰 출석부로 머리를 맞으면서 공짜로 학교 다닌다고 혼났습니다. 비참한 가난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의지가 강했거나 머리가 좋았다면 공부라도 했을 텐데 공부도 못했습니다. 희망도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목회를 시작하는데 15명 놓고 목회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올 때마다 반복했던 후회, 원망, 불평이 있었습니다. 제가 단 한 번도 부모님께 말은 못했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능력이 없으면 낳지를 말고,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 상처 되는 말을 하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감사한 것은 내가 만약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면서 가난을 몰랐다면 과연 이 성도들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성도들이 “목사님, 돈이 없어요”라는 이야기를 할 때에 그 성도들의 마음을 여러분들은 이해하십니까?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납작 보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하루 일당을 받아오면 그것을 사서 쌀과 섞어서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초등학생인 저는 학교를 다녀오면 밥도 하고 연탄불을 갈고, 콩나물국을 끓이고, 두 동생을 씻겨야 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교인들이 돈이 없다고 하면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됩니다. 교인들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어릴 때부터 훈련하게 해주심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했던 저의 가난함은 성도들을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한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얻느냐고 물어봅니다. 이 사람은 영생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고 돌아갑니다. 결국 그는 영생에 관한 질문을 했지만, 그 마음에 영생에 관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이 많음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가끔 성도들이 목회자는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는 줄 알고 대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 부러운 분들이 많습니다. 대형교회에서 훌륭하게 목회하시고 많은 공부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는 시골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분들이 조금은 부럽습니다. 남들처럼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겠는데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학벌도 짧습니다. 성질도 좋지 않습니다. ‘내가 과연 목회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해도 되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시골 목사의 자격지심이겠죠.

어느 후배 목사님이 저에게 부럽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후배 목사님이 부럽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이 쟁쟁합니다. 전화해서 등록금 얼마 필요하다고 하면 통장으로 입금해 주었습니다. 제주도로 교역자 수양회를 가서 2박 3일 마치고 돌아오는데, 그 후배 목사님은 동생에게 전화해서 이틀 더 놀고 싶다고 돈을 보내라고 하니 바로 보내 주었습니다. “나는 자네가 부럽네”라고 하니 그 후배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목사지만 기도를 못합니다. 뭔가가 필요하면 기도를 해야 하는데 전화가 먼저 생각납니다.” 제가 그때 깨달았습니다. 가난하게 살고 가난하게 목회하는 제가 분명히 배운 것이 있습니다.

저의 형제나 부모님도 처갓집도 도와줄 형편이 안 됩니다. 그런데 형편이 어렵다고 단 한 번도 공부하지 못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필요하면 전화기를 들고, 저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전화를 합니다. “4년 만에 총신대 신대원을 가게 되었으니 책임져 주십시오” 하면서 떼를 썼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셨습니다. 문득 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골로새서 3장에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하나님은 그것을 제게 주셨습니다.

여러분, 풍랑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해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실 때에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죽어버린 나사로로 인하여 어려운 상황에 처한 누이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시니 문제가 해결됩니다. 끝없이 도망 다니는 다윗도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해도 해도 변함없이 불평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모세도 지팡이를 던지게 하셨던 하나님 때문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벽에 부딪힌 것 같다고 선배 목사님께 말씀드렸더니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창조질서대로 쉼부터 시작해라.” 쉼이라는 것이 뭘까요?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환경, 내 상황,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물을 퍼내고 노를 젓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으로 해결되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풍성함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어떤 마음일까요? 돈 때문에, 교회의 크기 때문에, 자랑할 만한 학벌 때문에 기가 죽는 마음이 아니라 상황이, 목양이 어떻든 주님만 바라보는 그 마음만을 품으라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이로는 불평할 수 있고, 원망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가정에 찾아가셔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이야기하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먹을 것을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해결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살아 계신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목회가 힘든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본질입니다. 내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니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일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해야 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것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저는 목회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를 왜 이 강단에 세웠는지 모겠습니다. 잘하는 분 세워서 잘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못하는 사람 세워져서 미안합니다.

제가 인생에서 가장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딸을 못 낳았습니다. 최근에 제 아이가 앨범을 뒤적거리는데 우연히 옛날 사진을 저도 보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가 젖먹이 아들이 아플 때면 조그마한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서른도 안 된 새댁이 캄캄한 산길을 넘어가야 했습니다.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 열이 나서 칭얼대는 상황에서 아이를 업고 산을 넘어가야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앨범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업고 가면 해열제라도 탈 수 있는 보건소가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15명밖에 안 되는 시골 교회였지만 제 목회관은 거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분들과 부대끼면서 눈물을 흘리며 목회관이 정립되었습니다. 잘하지 못하지만 그렇게 지금까지 목회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시편 16편 3절의 말씀입니다. 제가 힘들 때마다 이 말씀을 되뇝니다. 이것이 제 목회관의 출발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은 그들에게 있도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마음, 이 마음을 품으시고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승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승리하는 하루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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