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티노블 선교사의 조선회상(2)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
누가 죽을 때를 알며 또한 생명을 잠시라도 연장시킬 수 있는가.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는 것이니 순종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다윗왕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병들어 위독할 때 금식하며 기도했지만 이레 만에 죽었다. 그는 ‘아이가 살아있을 때에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했다. 인력으로는 어찌 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 가운데 가족을 한국 땅에 묻었던 분들이 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더 노블(W. A. Noble)이 두 아이를 잃었던 이야기다.
노블 부부는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기 위해 제물포에서 증기선을 탔고, 대동강에 들어가서도 나룻배를 두 시간이나 탔다. 그 여행길에 둘째 아들 시릴(Cyril)이 탈이 났다. 서울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아팠고, 여행길에 상태가 심해졌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비쩍 말라서 뼈 골격이 낱낱이 드러났다. 아기가 회복되길 애타게 바라며 기도했다. 만성 설사로 고통을 겪었던 때가 1896년 10월이었고, 11월 4일 숨을 거두었다. 출생 11개월 만이었다.
매티 노블의 일기다. “아기는 죽어가고 있었다… 아더가 아기를 좀 안아주자 울어댔다. 난 아기를 팔에 안고 내 무릎 위에 뉘였다. 우린 숨죽이고 아기의 거친 호흡을 지켜보았다. ‘은 탯줄이 풀리고 금사발은 깨어졌다. 우린 널 시릴이라 이름 지었지. 우리 사랑하는 어린 아들 시릴, 네가 오래 살며 위대한 일을 하길 바랬지. 천사들이 널 데려간 후, 네가 없는 우리 집은 너무 외롭구나. 그러나 아기야, 너를 향한 사랑은 우리 가슴 위에 새겨 있단다. 하나님께서 우릴 본향 집에 데려가 너와 함께 살게 하실 때까지.”

2년 후에는(1898) 아들 메이(May)도 세상을 떠났다.
“우리 아기 메이가 3주 전, 이질에 걸렸다. 하루에 30번, 28번씩 변을 보았다. 이질은 서서히 설사로 바뀌었고 지금은 합병 증세를 보이고 있다. 사랑스럽고, 잘 참는 꼬마 환자는 몹시 쇠약해졌다. 메이는 말라리아가 끔찍하게 만연한 이 집에서 말라리아도 같이 걸렸다. 난 밤마다 아이 곁을 지켰다. 조선과 조선인은 우리에게 지독하리만큼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8월 18일 목요일 밤 9시경, 천사들이 왔다.” 또 하나의 아기별은 이렇게 평양에 묻혔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했었는데 아더 부부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 하나님께서 한 편으로는 매티 노블 부부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셨다.
타이타닉을 타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것이다.
1912년, 안식년에 미국으로 가려고 3월 19일 평양을 출발했다. 기차로 시베리아와 유럽을 횡단하여 런던에 도착했다. 수요일에 대서양을 건너는 타이타닉을 탈 예정이었다. 그런데 일행 한 사람이 중국에서 분실했던 트렁크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함께 지체하게 된 매티는 예정했던 타이타닉에 승선하지 못하고 토요일 배를 타기로 했다. 예정대로 출발한 타이타닉은 항해 중에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고 말았다. 승객 1503명이 사망했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미국에서 매티 가족을 기다리던 교인들은 사고 소식을 듣고 모두 슬픔에 빠졌다. 어떤 자매는 조선 선교에 부름 받은 그들을 버린 하나님은 신뢰할 수 없다며 시험에 빠졌다. 그랬던 그들이 며칠 후에 무사히 도착했으니 얼마나 기뻐했을까.
‘조선인은 우리에게 큰대가를 치르게 했다’며 마음 아파하든 노블 부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합소서’ 두 아들을 화재로 잃은 벤쟈민 슈몰크 목사가 쓴 찬송시이다. 주권자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부르는 찬송가 아닌가.

▲ 1906년 광주북문안교회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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