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그리’ 정신을 회복하고 당당하고 씩씩하게 겨울을 맞이하자

조선시대의 명필 석봉 한호(1543∼1605)는 여러 일화를 남겼다. 석봉은 집을 나가서는 돌다리에 글씨를 쓰고, 집에서는 질그릇이나 항아리에 글씨 연습을 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까닭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아들은 글씨 쓰는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자만에 빠진 석봉을 깨우치려는 어머니의 지혜였다. 석봉의 어머니는 끼니를 거르며 행상을 해서 종이와 먹을 모자라지 않게 사다 주었다. 석봉의 글씨 연습을 위한 정성이었다. 어머니의 정성과 헌신이 그를 명필로 만든 것이다.

석봉은 글씨를 잘 써서 외교문서를 비롯한 국가의 여러 문서를 도맡아서 썼다. 선조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고, 그가 쓴 석봉천자문은 목판으로 인쇄·출판되기까지 했다. 조선 천자문의 표준 교본이 되어서 전국 서당에서 사랑을 받았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 보물 제1659호로 지정됐다.

천자문은 본래 6세기에 중국 양나라의 주흥사가 지은 책이다. 모두 다른 한자 1000자를 사용해서 한 구절이 네 자로 된 사언고시 250개 구절로 된 시를 지었다. 글씨 연습을 위한 교본으로도 널리 사용되었지만, 동양의 사상을 잘 담아서 한문의 입문서 구실을 톡톡히 했다.

천자문에 ‘한래서왕 추수동장(寒來暑往 秋收冬藏)’이란 구절이 있다.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니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저장해 둔다”는 말이다. 사계절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감에 따라 뿌리고 가꾸고 거두고 갈무리하는 삶의 변화도 자연스레 뒤따라 일어난다는 뜻이다.

요즘 한국교회의 앞날을 염려하면서 ‘추수동장’이라는 구절을 자주 생각한다. 굳이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기다리지 않아도 한국교회의 계절이 겨울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미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는 2050년의 한국교회 교인 수를 300만∼400만명으로 예측하면서 ‘늙고 작은 교회로 변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부지런히 거두어들여야 하는 때를 맞이한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소중한 것을 갈무리해야 하지만, 무엇을 거두어들이고 무엇을 갈무리할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다가올 찬란한 봄을 꿈꾸며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야 한다. 소중한 결실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서 먼저 옥석을 구분할 눈을 키워야 한다. 가을이 깊어 가면 낙엽이 지듯이 무성했던 잎들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다. 어떤 잎은 아름다운 단풍으로 만추를 자랑하지만, 어떤 잎은 칙칙한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진다.

어떤 이는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스스로 추한 민낯을 드러내고, 어떤 이는 성장의 결실을 사유화하다가 스스로 추락하고 있다. 세습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서 수십만명의 선교열정에 찬물을 부은 이도 있고, 민주화에 헌신한 수만의 눈물을 일신의 안락한 노후와 바꾼 이도 있다. 개인의 영광을 구하며 법은커녕 윤리도 도덕도 무시하는 이도 있다.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가슴에 찬 서리가 내린다.

본래 한국교회는 가난했다. 구한말에도, 일제식민지 시절에도 가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맨손으로 월남해서 새 터전을 꾸미기 위해 가난을 감수했다. 가난한 백성들 속에서 전도하며 선교했다. 이제라도 ‘헝그리’ 정신을 회복하고, 당당하고 씩씩하게 겨울을 맞이하자. 다가올 겨울을 두려워하지 말고 온몸으로 맞이하자. 쇠퇴기에 맞는 목회를 개발하면서, 새 봄을 꿈꾸자. 다음 세대가 위축되지 않고 다시 설 수 있도록 새 터전을 준비하자. 낙엽도 새 싹의 거름이 될 터, 가슴을 펴고 겨울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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