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지역교회에서 목사 없이 목사 기능은 가능할까?, 목사는 누구인가?" 우리시대의 교회와 그 지도자인 목사들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이며 왜곡된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이것은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문제로서 다시 한 번 짚어 볼 필요성을 느꼈다. 이 글의 제목을 본 독자들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본인에게도 참 흥미로운 주제이다. 왜냐하면 본인의 조부는 1900년대 초기부터 지역교회 조사(전도사)이셨고, 미국 선교사와 함께 사역한 낙도 순회 전도자이었으며, 대한성서공회의 권서로서 쪽복음을 판매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전도사직을 은퇴하고 지역교회의 장로로서 섬기셨다. 아울러 부친은 본 교단(예장합동)에서 전도사 시절부터 50년 사역을 하시고 은퇴한 목사이셨다. 이런 배경 때문에 나는 목사직에 대한 유별난 관심과 고민, 다양한 생각들을 갖고 있다.

 

(본론)  1. 성경이 말하는 목사

에베소서 4장에 나타난 교회 지도자 은사의 목적과 목표(11절-13절)을 살펴보자. 앞 단락 1절부터 6절까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강조한 후에 7절에서 10절까지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이 교회를 건강하고 바르게 세우시기 위해 주신 지도자 은사를 말하며 11절부터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분명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하나됨은 기계적이거나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 되면서도 다양하게 각자의 직분과 은사를 따라 사역하고 섬기는 역동적인 것이 교회의 일치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은사를 말한 본문은 로마서 12:3-8절과 고린도전서 12:4-11절 및 오늘 본문이다. 로마서 은사는 교회 내부의 다른 지체를 섬기는 상황에서의 은사이며, 고린도전서는 어떤 일이나 영적 현상에 초점을 둔 것이고 에베소서는 성도를 세우는 관점에서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직분과 관계된 은사이다.

하나님이 왜 영적 지도자를 교회에 세우셨을까? 모두 다 구원 받은 위대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백성인 점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또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분의 돌보심을 받는 백성이고 한 마리 양이라는 것도 같다. 그러나 평등하지만 동일하지 않다. 다름이 있다. 이 다름은 그들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교회와 다른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세우시고 돌보시어 교회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주권과 영적 질서를 따라 주신 권위, 리더십, 은사, 직분의 다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교회주의, 형제교회, 반교직 사상>은 교회 지도자를 신격화하거나 특정계층으로 구분 짓는 것, 아니면 영적 지도자를 일반 성도보다 우선하며 근본적으로 그들과 다른 직분으로 이해하는 것과 똑같은 극단적이며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어떤 지도자 직분이 은사로 주어졌는가? 1)사도, 2)선지자, 3)복음 전하는 자, 4)목사이며 교사로 말한다. 사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주님이 직접 부르셨고 특별한 은사와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빠짐없이 전하는 사명으로 무장시키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적과 복음의 소명을 받아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고 다스리도록 파송을 받았다. 이들은 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해당되며 조금 넓게 보면 바울과 바나바, 실라 등을 포함된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목격하고 부활하신 주를 증거하였다. '선지자'는 신약성경의 기록이 완성되지 않은 초창기 교회 시대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며, 죄를 깨닫게 하고 교회를 훈계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극심한 박해와 직분 오용 그리고 성경 기록의 완성으로 인해 후에 교회에서 사라졌다. '복음 전하는 자(전도자)'는 안수 받은 자들로 바울이 전도 여행에 데리고 다닌 사람들이며, 사도들이 이미 세운 교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보내졌으며 한 군데에서 정착하여 있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다시 부름을 받으면 옮겨갔다. 선교의 차원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 빌립, 디모데, 에바브라 디도 등이 이에 해당된다.  '목사이며 교사'의 해석에 대해 이견이 있지만 헬라어 구조를 볼 때에 각각 다른 은사가 아니라 목자이며 교사의 한 직분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넷 중에서 앞 세 가지는 신약교회를 처음에 세웠거나 설립을 위한 사역에 관계된 은사이다. 목사이며 교사만 특정지역에 이미 세워진 지역교회 공동체를 양육하고 돌보며 인도하는 사람이다. 교사는 오늘날 주일학교 교사가 아니다. 이들은 또한 자주 장로, 감독이라고도 불리었다. 오늘 날 이 시대 지역교회의 평신도 장로와는 분명 다르다.

그럼 왜 세우셨을까? 어떤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본문에 나타난 지도자 직분의 은사 목적에 대해 세 가지로 말한다. 4:12 (개역개정)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표준새번역)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어 성경의 구조를 보면 단 하나의 목적만 존재한다. 그것은 처음에 등장하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고 그 다음 두 가지는 그 목적이 아니라 성도를 온전케 한 목적의 결과이다. 즉 지도자 직분의 은사의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도를 완전케 하는 것이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게 무엇인가?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는 '온전케 됨'이란 번역은 우리말로 정확한 번역이 어려운 단어이다. 어원은 「카타르티소」인데 이 단어의 뜻은 "정돈한다, 원 위치에 다시 가져다 놓는다, 재정비한다"이다. 마치 군인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정비를 하는 것이나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수술을 위해 완벽하게 몸과 마음 및 도구가 준비되어 있는 상태 아니면 어부가 바다에 나가기 위해 어구를 재정비하고 최상의 상태로 자신을 갖춘 상태가 바로 이 단어의 이미지와 관계된 모습이다.

12절에서 이 단어는 「카타르티스모스」즉 정골(整骨)이란 단어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뼈가 어긋나 있는 상태를 다시 바로 잡아 그 뼈가 제 자리에 있도록 해주는 것을 뜻한다. 교회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인 몸으로 보고 각 지체를 알맞게 연결시켜서 몸이 그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고 모든 지체가 한데 어우러져 조화롭고 건강한 몸으로서의 상태와 기능을 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오늘날의 지역교회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핵심적이며 우선이 되는 사역이다. 이 사역은 교회의 본질과 사역을 결정지을 정도로 중요하다. 수많은 일들, 예를 들면 심방, 교육, 상담, 설교, 행사, 회의, 재정 등을 위해 목회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역인 모든 성도를 하나님의 성숙한 백성으로서의 사역을 위해 준비시키는 사역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역은 이 사역에 종속되며 이 사역을 위한 도구이고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뜻과 수준대로 무장시키는 것이다.

그럼 목사가 성도를 온전케(구비, 준비, 무장) 했을 때 그 결과는 무엇인가? 성도들이 교회에서 봉사의 일을 하며,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는 것이다. 개인적인 구원의 차원을 넘어서 이 땅에 지역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에 헌신하여 그것을 성취하는 위대한 성도되는 것이다. 봉사의 일은 교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직분이나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다. 구원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 자녀된 성도들이 지속적인 양육과 훈련을 통해 다른 지체와 교회를 섬기는 사역을 하는 것이다. 사역하지 않고 교회만 다니거나 예배에만 참석하는 성도는 성경적인 교회 생활을 하는 게 아니다. 

  "봉사의 일"을 우선 좁은 의미에서 '사역',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세상 속에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만인 제사장을 말하며, 모든 사람이 제사장으로서 사역할 것을 말하고 있다. 목사만 사역하는 게 아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른 지체와 세상을 향해 상호사역을 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교회에서 오랜 세월 동안 소수의 교역자들만이 사역하거나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그런 잘못된 풍토가 있었다. 신약교회의 목사를 구약 제사장제도와 혼동한 폐단이다. 심지어 구약 제사장조차도 이스라엘 백성을 섬기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적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들이다. 다만 율법의식 차원에서 그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만이 제사 직무를 수행한 점만 다를 뿐이었다. 아울러 사역은 교회 공동체와 세상에서 하는 모든 섬김이 해당되지만 가장 본질적인 사역은 복음 전파로 사람을 살리는 것과 교회에서 다른 지체를 세우는 것이다. 전부 사람 또는 생명에 관계된 것이다. 교회 내부의 식사 당번, 헌금위원, 대표기도, 안내 등은 그 도구이며 과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사역 때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진다는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만인제사장이 되어 상호 사역(서로를 세우는)에 헌신할 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따라 다른 지체를 세우고 섬김으로써 다 함께 영적으로 성장하고 교회가 성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는 그 구성원인 각각의 지체들이 좋은 성도되는 데 달려 있다. 내가 나쁜 그리스도인인데 좋은 교회가 있을 리 없다.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 교회만 바꾸려하고 계속 교회를 떠도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교회는 쇼핑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헌신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장이다. 내게 좋은 교회는 성경에 없다. 이런 교회론의 인식이 없는 교회는 수천, 수만명이 모여도 인간집단이나 사교모임 또는 조직과 일을 통해 잘 돌아가는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상호사역의 관계성과 교회를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의 의식을 가진 성도와 그런 교회들이 주님이 세우신 참 교회이다. 현대교회는 이것을 포기하고 변질시키고 있다. 왜? 팽창과 비만을 통해 자기 세력을 과시하고 자기들의 천국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목사를 통해 성도들이 온전케 됨으로써 그들이 섬기게 되며, 교회를 세우는 구체적인 목표가 잇따라 13절에 나온다. 앞에서 목사를 세우신 한 가지 목적과 그 결과를 원론적으로 말했다면 13절은 그 결과의 구체적인 목표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교회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다. 예수님을 믿고 아는 신앙은 서로 하나 되게 만든다.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우리가 예수님 그분을 믿고 알며 체험하여 영적인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 정상적인 성도와 교회라는 증거이다.

하나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한다. ‘온전한 사람'의 뜻은 "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 성장한 인간이 되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은 남성 단수형으로 전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이룸을 가리킨다. 그 교회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이 이 중요하고 본질적인 성도의 모습에서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공동체의 이상적인 상태이다. 물론 ‘완전한’은 '완전'보다는 '성숙'의 의미를 포함한다(고전 2:6, 2:13-3:3, 14:20; 히 5:13-14). 다음 절의 어린 아이와 대조적인 것으로 '성숙한 성인'에 강조점이 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 그들이 섬기는 사람이 되며 교회가 건강해진 증거는 무엇일까? 그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이 마치 한 사람이 된 것처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목사에게 부여된 과제로서, 목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을 향해 성도들이 하나 될 수 있도록 사역해야 한다. 그 사역을 통한 연합과 일치의 최종 목표는 어디일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완전한 영적 성숙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년기를 벗어나 영적으로 성숙한 수준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통해 주님의 통치가 내 모든 삶에서 실현되는 수준이다. 

 

2. 왜곡된 목사직

우리시대의 목사직은 다양한 형태로 왜곡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목사직을 구약 제사장직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신구약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무지 또는 비성경적인 권위와 신령한(?) 독재라는 미명으로 우민주의를 교회에서 펼치려는 일부 목사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성경적 분별력이 없는 일반성도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겁을 먹거나 맹종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목사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촉복권과 저주권이며 목사는 하나님의 사자이고 주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이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더 이상 이런 거짓되고 허황된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일고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기에 이에 대한 내용은 생략한다. 

둘째는 또 다른 극단의 반동으로 주로 무교회 주의나 만인 제사장주의의 왜곡된 확장 및 현 한국교회의 목사에 대한 환멸과 반발로 목사직 자체를 성경적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오로지 기능과 직책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이들은 목사직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목사를 기능으로만 이해한다. 그래서 목사의 성경적인 리더십과 영적 권위, 직분에 따른 질서를 거부한다. 원칙과 현상은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성경적인 원칙이 우리의 현실 때문에 왜곡되거나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 성경이 목자(목사)를 말하며 교회 공동체에 세우신 영적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도록 부름 받았고, 그들에게 주신 소명과 은사, 리더십, 권위가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물론 위의 왜곡된 형태는 아니지만 목사직의 수행 형태와 환경도 고민할 대목이다. 목사직의 성경적인 원칙말고도 그 목사직을 수행하기 위한 형태와 환경은 신약시대의 그것과 너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의 원칙이 왜곡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변화와 자유로움은 가능하다. 시대와 문화 따라 그것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형태나 환경이 원칙을 변형시킨다면 그것은 본말이 뒤바뀐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판단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목사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리고 그들과 끊임 없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가능하다. 이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목사는 자기 삶의 최우선, 최고의 순위를 성도의 돌봄과 양육에 두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시대의 자비량 목회는 고민할 대목이 많이 있다. 자의적인 선택이든 아니면 타의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든 이 원칙이 지켜질 수 있으면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 속에서 이것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두 마리 토끼 잡으려다 다 놓칠 수 있으며, 우선순위의 충돌도 있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정체성과 본질, 삶을 동시에 균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럼 교회 공동체에서 목사 없이 목사 기능이 가능할까? 기능만으로 이해한다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누구나 목사 노릇(기능)을 할 수 있으면 목사를 왜 부르시고 세우시겠는가? 또 목사로 부름 받지 않은 사람이 목사의 기능을 행한다고 목사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목자처럼 다른 지체를 돌보고 세우는 게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이지만, 목자로 부름 받아 영적 지도자로서 교회에서 사람을 세우며 교회를 섬기는 독특한 직분인 목사는 그것과 분명 다르다. 목사는 기능이나 은사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목사 없이도 교회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목사직을 통해 하나님이 뜻하신 바가 그 교회 공동체에서 결핍될 수밖에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다른 직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장로나 섬기는 자(집사)가 없는 교회도 존재할 수 있지만 그에 해당되는 빈 자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결론)  목사와 목사직은 분리되지 않는다. 목사 없이 목사 기능이 수행된다고 그 사람이나 공동체 자체를 목사라고 하지 않는다. 목사로 부름 받을 뿐 아니라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따라 목사의 기능과 직무를 수행할 때 목사는 목사된다.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목사로 부르시며 목사로 사용하시길 원하신다는 신약의 모든 증언은 잘못된 것이다. 기능은 부르심 그 다음이다. 그러나 통상 부르심에 걸맞는 은사와 기능이 주어진다. 그럼에도 기능만으로 목사라고 우리는 인정하거나 부르지 않는다. 목사로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이나 목사가 아닌 사람이 일시 목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고 그것을 성경의 일반적인 증언이라고 보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견해이다. 모든 사람이 목사(자)가 아니며 하나님은 그렇게 부르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목사에 대한 원론적인 정의나 성경의 원칙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목사들의 현실과 자화상이 너무 수치스러운 현실 앞에서 나를 포함한 목사들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양무리를 돌보고 세우며 섬기는 목자로 회복되길 바란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성경적이며 능력 있는 목자는 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는 사람이며, 이를 위해 예수님처럼 비록 자기 생명을 다 내어주지 못해도 그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은 없는 이 시대에서 유리 방황하는 양무리들을 껴 안으며,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온 들판과 산을 헤매며 밤을 지새는 그런 목자가 참 목사이지 않을까? 사람 숫자, 건물크기, 재정, 명예, 돈, 권력의 욕망에 붙들려 끝없이 타락하고 변질된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더 큰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한 영혼을 예수님처럼 돌보고 세우며 섬겼다면 어찌 주님이 그를 향해 착하고 충성된 내 종이라고 칭찬하시지 않겠는가? 목사다운 목사되기만 간절히 기도한다.

(추신 :  목사 단어가 성경에 없다고 강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목사란 단어는 번역의 문제이지 분명 신약성경에서 목자, 장로, 감독 등으로 불려지는 지역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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