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많이많이 보고 싶어요.
엄마, 이젠 편히 쉬세요. 엄마가 그리울 땐 항상 올게요.
착하고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테니 엄마, 꼭 지켜보세요. ○○○”

기독교인 공동묘지에 갔다가, 뗏장에 흙이 묻어있는 것으로 보아 장례 치룬지 얼마 안 된 묘지 비문을 보았다. 고인이 40세이니 자녀들이 10대일 것 같다. 어머니 앞에서 어리광 부리며. 어머니의 돌봄이 필요할 것 같은데, 너무 일찍 엄마를 잃었구나 하는 안타까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인명은 재천이라 어찌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한 가지이지만...

그날, 홈페이지에 이 글을 소개하며, 부모를 생각하자는 글을 올렸다. “주무시는 부모의 얼굴을 들여다보세요. 나를 낳으시고 이렇게 길러주시면서, 지난 세월만큼이나 주름살이 깊었지? 때로는 기쁜 일도 많았지만 근심 걱정에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세상 떠난 뒤에는 보답할 수 없어요.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드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세요.” 이런 글이었다.

총회신학교 은사이신 김명혁 목사님은, 강의를 시작하면서 성경말씀을 암송하시고는 기도를 해주셨다. 좋은 추억이다. 김 목사님이 어린 아들을 병으로 잃은 안타까운 이야기나, 북한에 살아계시는 어머니 이야기는 우리를 많이 슬프게 했다.

그가 11세 때(1948) 평양에서 월남했다. 부친이 신의주제2교회 목회를 하다가 평양으로 이사했는데, 공산 치하에서 기독교인으로서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했던 어머니는 병원을 했다. 명혁이는 그 시절에 부모를 따라 신앙생활에 철저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새벽기도를 했고, 주일에는 등교(평양제5인민학교)를 거부하고 예배에 참석한 일로 벌을 받거나, 급우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했다. 부모님이, 나라 장래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 아들만 서울 이모에게로 내려 보냈다. 그 길이 가로막혀 버릴 것은 생각도 못했다.

서울대학과 총회신학교를 나와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북한 가는 인편에 어머니께 편지를 올렸다. 헤어진 지 20년(1967년),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의 친필 답장을 받았다. “내 아들 명혁 에게. 9월5일 네 편지를 전해 받았다.그 순간, 외로이 자라 성인이 된 내 아들 명혁이 얼굴이 떠올랐다. 훌륭하게 자란 내 아들. 보고 싶구나. 손이라도 꼭 한번 잡아보고 싶다. 내 기쁨을 지면상으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명혁아, 나는 네 말대로 오래오래 살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 몽중엔들 잊을 소냐. 내 아들 명혁이, 부디 건강하기를 축원한다. 9월 28일 어머니”

목사님은 그 때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떨리는 가슴으로 한 자 한 자 읽었습니다. 너무나 짧은 사연이었지만, 그 편지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 없는 짧은 사연이었지만, 혈육의 정과 아픔, 기쁨과 슬픔, 안타까움과 소원을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피맺힌 사랑이 깊고 진하게 마음에 배어왔습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피맺힌 절규였습니다.”

마음에 이런 그리움과 슬픔을 담고 있는 존경하는 김 목사님, 비록 강의시간일지라도 목사님의 표정과 언어에서 큰 구멍이 뻥 뚫려 있는 허허로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노인 장수시대를 산다. 요양병원이 많아서 편리한 것도 있지만 치매로 고생하는 이가 많아서 부모나 자식이나 큰 고생을 한다. 자식들은 여러 가지로 힘들고 어려운 고생을 하면서도, 부모가 세상 떠난 후에는,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한다. 아름다운 모습, 인정이 넘치는 모습이다. 

효도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하나님께서도 효도 계명에는 축복을 언약하셨으니 ‘약속 있는 계명’라 한다. “제 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셨다.

송강 정철의 <훈민가> 이다.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사라실가
하늘 가튼 가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 구남이 할머니-소록도남성교회 © 황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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