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8일 정오. 진주 장날이었던 이날 한 교회에서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종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남녀노소 구분 없이 2만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진주 지역의 3·1만세운동은 이처럼 한 교회에서 울려 퍼진 ‘그 종소리’에서 시작됐다. 훗날 ‘그 종소리’는 정의의 소리요, 독립의 우렁찬 함성이었다고 평가를 받았다. 진주지역 3·1만세운동의 신호탄이었던 ‘그 종소리’가 93년 만에 다시금 진주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진주교회가 1919년 3월 18일에 있었던 진주지역 3·1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렸던 종탑을 복원하고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갖고 있다.
진주교회가 1919년 3월 18일에 있었던 진주지역 3·1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렸던 종탑을 복원하고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갖고 있다.

진주교회(송영의 목사)는 일제 강점기 진주의 3·1만세운동 시작을 알린 종과 종탑을 복원하고, 기미 독립만세의거 재현행사를 가졌다.

진주교회가 이처럼 진주 3·1운동 종탑 복원사업에 앞장 선 이유가 있다. 당시 진주의 3·1만세운동을 촉발시킨 종소리가 바로 진주교회 종이었기 때문이다.

진주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부여된 종을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지난해부터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진주교회를 중심으로 종탑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조헌국 장로·이하 종탑추진위)가 구성됐고, 지난해 9월부터 진주교회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복원사업 기금에 동참하면서 사업이 본격화 됐다.

종탑추진위는 1919년 3월 18일 3·1만세운동의 그 시작을 알린 신호용으로 사용된 진주교회 종과 종탑을 복원하고, 3월 15일 종탑복원 예배 및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열었다. 이어 18일 주일 정오에는 지역 국회의원과 시장 등 지역 기관장, 진주교회 전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복원된 종을 타종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종소리는 만세의 함성을 되새기는 의미와 동시에, 93년 만에 자주독립을 염원한 선조들의 애국애족이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진주의 하늘에 힘차게 울려 퍼졌다.

종탑복원추진위원장 조헌국 장로는 “진주 3·1만세운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의 애국애족의 운동”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바로 진주교회 종소리였다”며 종탑복원의 의미를 설명했다. 조 위원장이 말한 진주의 3·1만세운동이 기독교에서 시작됐다는 말은 역사에 근거한 것이다. 진주 3·1운동 이후 당시 일제고등경찰이 상부에 보고한 문서인 <고등경찰관계적록> 36면에 “3월 18일 진주장날에 예수교 예배당에서 울리는 정오의 종을 신호로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약 1만여 명이 운집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해방 후 최초 관찬기록인 1959년에 발행된 <경상남도지> 800면에는 “1919년 3월 18일 진주장날 교회 종소리가 정오를 기해 우렁차게 울리었으니 정의의 종소리이며 독립의 우렁찬 소리였다”는 기록이 있다.

1919년 당시 있었던 진주의 3·1만세운동은 서울 다음으로 가장 많은 2만여 명이 참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주일간 연인원 3만 9000여 명을 기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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