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들어가는 말

올해에 우리나라는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때가 되면 선거철이 되고 선거철이 되면 투표를 하고, 투표를 하고나면 새로운 권력층이 생겨난다. 그리고 나면 국민은 그렇게 치열하게 열망했던 정치적 희망은 사라지고, 정치권력에서 소외되고, ‘정치적 메시야’에게 실망했다고 하면서 또 다시 다음 선거철을 기다리는 일을 거듭해 왔다.
아마도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 형편이 아닐까 사료한다.
선거철이 되면 교회 안팎에서 기독교 신앙을 내세우며 소위 말하는 ‘정치적 메시야’들이 등장한다. 교회는 이런 ‘정치적 메시야’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정치적 메시야’를 선택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제각기 권력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고 나면 정치 권력에서 소외 되고 그리고 다음 선거철을 기다리는 일을 되풀이 해 왔다. 그러는 동안에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서 곱지 않는 눈초리와 비판을 받으면서 한국 교회 발전과 성숙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교회는 정치철학과 제도나 교회의 정치적 태도에 대한 자기 성찰 없이 교회가 직접 ‘정치적 메시야’를 내세우고 싶은 욕망에 빠지기도 했고, 사실 오늘도 소위 말하는 ‘기독교 정당’을 통해서 ‘정치적 메시야’가 되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달리고 있다.


II: 정치적 메시야와 한국 교회

1) ‘정치적 메시야’와 정치

오늘 양대 선거철을 맞이하는 우리 사회는 집권을 향한 정치인들과 정당들의 이합집산을 바라보고 있다. 새로운 ‘정치적 메시야’를 만들어 세우고 집권을 위한 공약(公約)들을 만들어 내고 정치인들의 물갈이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국민들에게는 실현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책임 없이 꿈같은 공약들을 쏟아내고 있다.
국민들은 새로운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희망으로 새로운 꿈을 꾸면서 지연과 학연, 그리고 혈연과 이해관계를 앞세우고 투표를 향해 나가고 있다. 고령사회로 접어들고, 사회적 약자들이 양산되고, 젊은이들의 꿈이 사라지고, 사회적 갈등이 여러 가지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이번 양대 선거가 국민들이 대망하는 ‘정치적 메시야’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희망, 국민들의 기대가 어떻게 채워질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금 그러한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검증 없이 그들이 내세우는 정치적인 공약이 언젠가는 이루어져서 내가 지닌 희망도 함께 이루어질 날이 오리라고 바라면서 투표장으로 나갈 것이다. 쏟아져 나오는 공약(公約)들이 문자 그대로 ‘공약(空約)’이 되고, 다음 세대가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걸머지게 될는지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한국 사회는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환상으로 시작했다가 깨어지고 또 시작하고 깨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정치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 정치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보이면서 정치 발전이 사회와 역사, 그리고 국민과 생활 발전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또 하나의 거대한 선거에서 승자독식이라는 잔치를 벌이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2) 선거에 임하는 한국 교회 현주소

한국 교회도 이러한 사회의 선거풍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다.
사회정치보다 못한 교회정치가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한국 교회는 양대 선거에 대한 사회와 국민에 대한 책임감이나 철학도 없이 또 다른 이합집산을 벌리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는 ‘기독교 정당’을 만들면서까지 선거에 끼어들고 있다. 기독교 정당을 만드는 이유가 한국 사회와 국민을 위하여 기독교적 정치철학으로 뒷받침되고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다수 비 기독교인들에게서도 기독교 정당의 필요성이 공감대를 형성하였을 때에야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서구에서 기독교 정당들이 등장하여 정치 현실에서 권력을 차지하고 잃기도 하면서 그 나라 사회와 국민들을 위한 정치철학을 구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런 기독교 정당들이 과연 기독교적인 정치철학을 얼마만큼 성취하였는지에 대한 공과는 훗날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그러기 전에 우선 서구사회에서 기독교 정당의 기치를 내걸었던 정치집단들이 그 정치적 세력을 넓혀가기 보다는 잃어가고 있는 현실이 기독교 정당에 대한 공과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적 가치관과 철학이 생활에 녹아있는 서구사회에서도 기독교 정당이 이러한데 그러한 역사적 뿌리와 생활철학으로 자리 잡고 있지 못한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기독교 정당’은 교회와 기독교만을 위한 정당(政黨)이 되어서는 그 존재 이유가 없다. 이는 결국에 가서는 교회가 정치권력으로 타락하고 다른 종교를 기초로 하는 정당들을 대두하게 만들어서 한국 사회와 국민 전체에 분열과 갈등, 그리고 자칫하면 ‘정치적 폭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나라의 이상과 공동체에서 비 기독교인들을 소외시키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를 때, 기독교 정당은 어떤 것을 선택하며 정치를 해 나갈 것인가? 기독교인들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면 목적을 이룬다고 생각한다면 교회는 정당의 권력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3) 교회와 권력

교회는 정치권력과는 다르다. 그러면서 교회는 현실정치에서 초연 한다거나 무시하거나 반대로 정치권력화하거나 정치권력으로 기독교적인 정치이념을 실현해 나가는 것은 아니다. 교회와 정치에 대한 철학과 이상, 그리고 참여와 비판의 문제가 역사와 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변천을 거듭해 온 것은 사실이지마는 그러나 교회는 정치권력으로 하나님나라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꿈을 꾸어서는 안된다.
권력은 그것이 정치권력이든, 교회권력이든 권력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마력이 있어서 교회가 권력으로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정치적 메시야’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러한 유대인들의 열망에 동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마 22:21)라는 말씀으로 정리해 놓았다. 때로는 역사적으로 이 말씀이 로마서 13장 1절의 말씀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두 왕국’ 개념으로 발전되고 사용되기도 했지만 이 말씀은 교회가 어떤 형태의 권력의 힘으로 하나님나라 공동체와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유혹에 대한 엄숙한 경고로 받아야 할 것이다.

4) 정치제도의 역사적 변천과 ‘기독교왕국’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대의정치가 성서적 정치제도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성서시대는 엄격한 신정주의 제도로 시작하여 신정이 주도하고 왕정이 따르는 시기를 거쳐서 왕정이 주도하고 신정이 따르는 정치제도 시기를 거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외국의 절대왕정시대로 마감하고 있다.
기독교역사에서 한편으로는 절대왕정시대가 일찍이 무너진 자리에 로마의 교황이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기독교왕국(Christendom)’을 이루었던 서방기독교 역사가 있었다. 다른 편으로는 황제가 교회의 수장으로 오랫동안 정치권력을 행사했던 동방기독교의 정치역사가 있었다. 
정치제도의 발전상 새로운 신정시대라고 할 수 있는 교회가 정치권력까지도 행사했던 중세시대가 이어졌고 그 정점에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있다. 그는 교황이 황제를 면직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신정시대의 정치를 추구했다.(From Irenaeus to Grotius - A Source Book in Christian Political Thought - p.242)
르네상스를 거치며 종교개혁시대를 맞이하면서 루터의 ‘두 왕국’ 철학이 정치제도로 간주되고 뒤를 이은 칼빈은 제네바에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상 아래에서 ‘두 왕국’ 이론을 정치제도로 보았다. 이어서 교회와 정치는 권력의 향배를 놓고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왕정과 대의정치제도를 수립하기도 하면서 점차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주류를 이루면서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수립되었다. 미국의 건국과 더불어 오늘날 종교와 정치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는 민주주의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성립된 대의민주주의가 정치제도 발전의 완성에 서 있다고 하기에는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는 오늘의 정치현실을 보고 있다.
오늘 한국의 정치나 교회는 하나 같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안에서 정치철학보다는 선거승리를 위한 갖가지 현상들이 판을 치고 있다. 득표를 위하여 선거철마다 내거는 공약은 그때그때마다 다르게 등장하여 한때나마 국민들을 우롱하고 현혹한다. 이러한 한국의 정치현실 앞에서 교회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일컫는 선거와 투표가 과연 하나님나라의 진리와 정의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인정될 수 있는지 없는지부터 그 신학적 성찰을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5) 민주주의와 한국 교회

여기서 우리는 민주적인 대의주의가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의 대변자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근본적인 물음도 물어야 한다. 거기에 기독교 정당은 과연 기독교적인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타당하고 필요한 도구인지도 근본적으로 물어야 한다. 이어서 기독교정치인들만이 기독교적인 이상과 정의를 실현시키는 정치를 이루어낼 수 있는지 없는지도 근본적으로 물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 존엄성을 지키는데 우위에 서 있는 제도임에는 틀림없다. 시민 민주주의는 독재정치에 대하여,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제도의 발전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승리는 기독교적 정치철학과 제도의 마지막 제도적 승리라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근본적으로 물어야 한다. 여기에 기독교 정당과 기독교정치인들을 기독교적 정치이상으로 지지하는 것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정치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없는지도 물어야 한다. 많은 기독교정치인들이 현실정치 판도 안에서는 각기 다른 정당과 정책을 추구하면서 권력의 정점을 향하여 일치보다는 비판과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 정당이 출현하여 모든 기독교정치인들이 정치적 이념과 공약의 차이를 버리고 한 정당으로 뭉쳐야 할지 아니면 거기에서도 이상과 방법에 대한 제도적인 인식과 접근의 차이로 인해서 또 다른 기독교 정당들이 생겨서 서로 비판과 경쟁을 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지 아닌지도 물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현실로 존재하는 여러 기존 정당들과 그 안에서 선거에 임하여 투표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정치적 갈등과 정치적 폭력과 부정에 대하여 기독교적 양심과 정의가 양립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물어야 한다.
만약에 정치와 종교, 특히 기독교적 이상이 충돌할 때에 교회는 어떤 입장을 선택해야 하는지도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기독교 정당이 서구정치사회에서도 소수가 되는 경우가 많고, 집권하였을 때에도 종교적인 가치관보다는 정치적 현실에 의거하여 비판되고 정권을 잃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에 다른 종교와 그 이상을 추구하는 정당의 출현도 가능한데 이러한 것이 과연 기독교적 정치이상을 구현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도 물어야 한다.
기독교 정당과 정치인들이 기독교적인 정치 이상과 가치를 온전하게 구현시킬 수 없을 때에 교회는 그런 기독교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대해서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 지도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처럼 정치 현실은 복잡하고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있다. 그리고 집권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언제라도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는 정치현실에서 기독교 정당과 정치인, 그리고 교인들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선거와 투표에 임하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도 물어야 한다.
이렇게 선거와 교회의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교회가 선거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뛰어들어 정치현실에서 자기 목소리을 내어서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나라의 진리와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가져오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나라의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는 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6) 선거와 한국 교회

다가오는 양대 선거라는 현실은 투표로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고 권력을 결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회피할 수 없는 이 선거제도 안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정당과 정책을 지지하고 나설 것인가?
인물을 위주로 한다고 했을 때에 과연 어떤 기독교정치인이라도 다른 정치인들보다 하나님나라의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는데 자신을 위한 권력의지에 대한 추구보다 앞서 나갈 것인지를 확인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동시에 어떤 기독교정치인이라도 다른 정치인들보다도 한국 사회와 국민을 위한 대의정치에 앞장서 나갈 것이라고 확인하기 어렵다.
정책을 위주로 한다고 했을 때에도 기독교 정당과 정치인들의 정책이 다른 정당과 정치인들의 정책 보다 하나님나라의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고 한국 사회와 국민의 삶의 자유와 질을 향상시켜 나갈 것이라고 확인하기 어렵다.
지나간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한국 교회가 개인적으로든지 또는 교회적으로든지 또는 일부라고 할지라도 특정 정당과 정치인들에 대하여 쏠림으로 일부에서 정치목사가 나오고 교회가 권력기관과 밀접한 관련를 가지고 때로는 이차적인 권력행사를 한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과연 기독교적 이상을 이 사회와 국민들 안에서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한국 교회는 이런 현상에 대하여 역사적인 교훈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교회와 정치가 어떤 형태로든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에 국민들로부터 지지보다는 지탄의 대상이 된 경우들을 초래했다는 것도 되풀이해서는 아니 될 교훈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지지를 해야 한다는 것과 기독교 정치인이 행사하는 정치이상과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정책들이 어떻게 민주적인 대의에 입각하여 제한받고 수정되고 다수의 합의를 이끌어 내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기독교정치인라고 해서 권력의지 없이 정치한다고 할 수 없다면 그 개인의 권력의지가 얼마나 하나님나라의 진리와 정의로 세례 받아야 하는지도 문제이다.

7) 양대선거와 한국 교회의 기회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투표를 해야 한다.
올해의 양대 선거에서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한국 교회가 한국 정치와 투표에 임한다면 한국 교회는 또 한번의 국민적인 의심과 질타의 대상이 아니 된다고 보장할 수 없다. 현실이 이러하니 차라리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 정당에 투표함으로써 기독교적인 정치 이상을 실현하자는 것도 결국은 한국 교회 전체가 치명적인 국민의 비판과 반대에 봉착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은 이번 양대 선거와 투표에서는 지난날과는 다른 차원 높은 정치의식을 발휘할 결정적인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기독교적 이상을 내세운 정치인들이 선거에 교회를 이용하고 또 반대로 교회가 그런 정치인들을 이용하는 식으로는 한국 사회와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이번에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한국 교회와 기독교는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로 인해 한국 교회와 기독교 자체가 한국 사회와 한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배척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미래를 가로막고 전도의 문은 물론 하나님나라의 진리와 정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구원역사를 왜곡시키고 퇴보시키는 크나큰 정치적 부정을 불러들이게 된다.
이제부터라도 한국의 기독교 정치인들과 한국 교회 안에 있는 정치지향적인 사람들은 권력을 위하여 교회와 기독교라는 간판을 투표에 이용하지 말고 더욱더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정책과 소신과 인격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기독교적 이상을 그 정치 현실에서 이루어내려는 정치철학으로 이번 선거와 투표에 임하는 것이 보다 책임 있는 기독교정치인이요 교회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정치를 발전시키는 일에 공헌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올해의 양대 선거와 투표에 임하는 기독교인들의 정치의식도 지금까지 한국정치의 근본악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연과 학연, 그리고 혈연이라는 끈보다는 누가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이상을 그 정치현실에 반영시켜 나갈 수 있는가를 헤아리고 선거에 임하고 투표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땅에 떨어진 교회와 기독교 정치인들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너무 드러나게 편향적이 되었고 교회지도자들이 이런저런 모양으로 선거와 투표에 영향을 주면서 정치권력의 중심이나 주변에서 또 다른 권력층처럼 행세해 왔던 정치적 부정을 청산하여야 할 것이다.
2012년의 양대 선거에 임하는 한국 교회와 기독교정치인, 그리고 교인들의 자세는 보다 정치적으로 성숙되고 대의적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최대한 존중하고 교회와 선거를 정치권력의 도식에서 승화시키는 방향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이번 양대 선거에서 한국 사회와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자세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요 한국 국민과 사회가 교회를 보는 입장이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교회는 때때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이사의 권력을 탐하는 잘못을 범해 왔다. 나아가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든, 가이사의 것을 물론하고 교회의 것으로 그 중에서도 교권을 거머진 교회의 정치 야심가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유혹을 받아왔다. 그 결과로 교회는 하나님의 것도, 가이사의 것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는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그 의미도 권력도 축소되고 말았다. 개신교회는 천주교회와 달리 역사적으로 정치권력에 대한 입장을 달리해 왔다. 한국 교회가 일부에서 그런 중세기적인 천주교회의 정치적 입장을 답습하려고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나 하는 염려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어왔다. 성직자들이 정치에 직접 나선다고 세상이 하나님나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때로는 교권을 가지고 세속권력 위에 군림했던 중세기에 정치적인 성직자들의 끝없는 타락이 국민들로 하여금 교회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게 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더욱 엄격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역사에서 소위 말하는 정치적 메시야들이 많이 일어나고 사라졌다. 그들의 정치적 구호에 종교적 열정을 담아서 한 때에 세상을 풍미했을지는 몰라도 이 땅에 정치가 하나님의 진리세계가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는 부정적이다.
교회의 정치 참여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며, 어디까지 가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고 그런 논쟁에서 명분은 명분이고 실제로는 정치적 권력에 대한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해 왔던 것이 한국 교회의 정치 참여의 현실이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렇기 때문에 한국 사회와 국민으로부터 기독교 정당과 정치 참여에 대한 비판을 자초하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올해 양대 선거에서 한국 교회는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버리고 기독교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교회를 등에 업고 권력의지를 추구하지 말 것을 엄숙히 말하고 사회에도 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인 여러 갈등이 첨예하게 휘몰아치는 정치 현실에서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보다 신앙적인 자세로 선거에 임하도록 하고, 종국에 가서는 떨어진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III: 나가는 말: 한국 교회 정치에 변해야 산다

한국 교회는, 정치권력이든 교회권력이든, 권력의지와 권력자체에 대하여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는 경고를 엄숙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가 이러한 소리를 외치지 못한다면 옛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할 것이다. “예언자라는 자들이 나의 백성을 속이고 있다. 입에 먹을 것을 물려 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전쟁이 다가온다고 협박한다.” (미 3:5. 새번역)
한국 교회지도자들이 그 입에 무엇인가를 물려주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는 일들이 정치에서 선거와 투표에서도 그런 식으로 된다면 한국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기서 신학자 E. Juengel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정치신학의 성공여부는 기독교 신앙이 진실을 말할 능력과 의무감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에버하르트 융엘. 정기철. 25쪽)
올해의 양대 선거와 투표에 임하는 한국 교회의 성공여부는 한국의 민주주의 정치 발전에 있어서 이러한 진실을 말할 용기와 책임을 지켜나갈 능력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소리쳐 알려야 할 것이다. 여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교회가 비록 정치권력을 쟁취했다고 해도 진정한 정치적 승리라고 노래할 수 없는 것이다. 올해 양대 선거에서는 또 한 사람이나 집단의 ‘정치적 메시야’를 세우거나 그 권력에 교회를 걸지 말고 하나님나라의 진리와 정의를 향하여 한국 사회와 국민전체를 아울려 나갈 수 있는 자세로 선거와 투표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올해의 선거에서 한국 교회와 교인, 그리고 기독교 정치인들이 이런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에 대한 책임을 잘 감당하는 진정한 정치철학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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