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예원교회 김원배(63) 목사에겐 두 명의 스승이 있다. 에큐메니컬 진영을 대표했던 고 강원용 목사와 복음주의 진영을 대표했던 고 옥한흠 목사다. 두 사람의 공통점을 김 목사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 율법과 도덕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독히도 못 견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목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지향점이 같았지만 방법은 달랐다. 강 목사가 평신도들의 의식 개혁을 통한 사회구조 변혁, 이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추구했다면, 옥 목사는 각 사람을 제자로 훈련해 교회를 바꾸고, 이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고자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전자는 신앙의 위기를 초래했고, 후자는 세상 속 영향력의 약화로 나타나고 있다는 게 김 목사의 진단이다. 그는 “지금은 둘의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충하는 제자훈련의 새로운 모델이 나와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 교육원장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 상임총무를 역임한 김 목사가 3년 전 목포로 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교단 정치에서 일선 목회로 방향을 튼, 그에겐 일대 사건이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목회자에겐 누구보다 예수와의 뜨거운 만남이 필요한 것을 절감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옥 목사를 몇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게 ‘나의 미래’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독일에서 공부한 그는 독일 출신의 신학자 칼 바르트 이야기를 꺼냈다. 바르트에게는 젊은 시절 영향을 받은 두 명의 스승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나우만과 크리스토퍼 블룸하르트. 목회자였던 두 사람은 1, 2차 세계대전 이후 무너진 독일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기독교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나우만은 독일 사회의 명망가가 됐고,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다. 반면 젊은 시절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블룸하르트는 그 정신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는 슈트트가르트의 노동자들이 제국의회의 노동자 탄압법에 거세게 반발하자 노동자들 편에 섰다. 그 결과로 그는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지방의회 의원이 돼 가난한 이들 편에 선 정책들을 개발했다. 그의 설교를 접한 바르트는 “마치 예수님이 설교하는 같았다”고 평했다. 바르트가 사회주의에서 돌이켰던 것도 블룸하르트의 영향 때문이다. 그는 이후 “나우만은 과거, 블룸하르트는 미래”라고 회고했다.

강원용-옥한흠, 프리드리히 나우만-크리스토퍼 블룸하르트를 겪으며 김 목사가 내린 결론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의 예수가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갈릴리는 역사적인 예수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한 곳이자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을 만난 곳입니다. 사도행전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목포를 갈릴리라고 봅니다. 두 가지 전통을 잘 접목시키는 게 제 남은 삶의 마지막 과업이죠.”

교단 정치의 한복판에 섰던 그가 야망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와 한신대 총장에 추천됐을 때 그 역시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것을 얻었다. 이 모든 것들이 목회를 위한 준비과정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목회를 하면 잘할 것”이라는 옥 목사의 권유에 힘을 얻어 목포로 향할 수 있었다. 이후 부임한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자 옥 목사가 서울서 터를 잡길 권했지만 그는 ‘갈릴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옥 목사 사후 제자훈련에 대한 그의 뜻은 더 확고해졌다.

“이제 곧 예원교회 60여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본격적인 제자훈련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제자훈련을 통해 그들을 완전한 예수의 제자로 만든 다음엔 정치, 경제, 사회의 각 영역 속으로 뚫고 들어가 변혁의 삶을 살도록 할 것입니다.” ‘제자훈련의 광인(狂人)’ 옥한흠 목사처럼 ‘갈릴리 목포의 예수 광인’이 되겠다는 게 그의 다짐이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