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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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혜원 기자
  • 승인 2009.11.2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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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왕국

▲ 공지영 저, 창비, 2009-06-29, 294쪽, 12000원
힘겹게 마지막 장을 넘겼다. 질감은 거칠거칠한 종이임이 분명했지만,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양 책 한 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한바탕 악몽을 꾼 기분이다. 을씨년스런 도가니에 갇혀 오돌오돌 떨고 있는 어린 짐승들의 형상이 어른거린다. 혼신의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지만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건 희미한 신음소리뿐. 세상에 들리지 않는 비명은 체념이 되어 영혼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의 차는 흰 안개의 터널로 들어섰다. 백발마녀의 머리카락같이 가느다란 안개의 결이 촘촘히 그의 차를 감싸기 시작했다. 왜 였을까? 그는 오래전 여름 낚시터에서 물에 빠져죽을 뻔한 기억을 떠올렸다."

인호가 무진시에서 처음 조우한 것은 지독한 안개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의 등쌀에 밀려 청각장애아동을 위한 학교인 '자애학원'의 기간제 교사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온 몸에 스멀스멀 감기는 안개 속으로 인호는 차를 몰았다. 희뿌연 안개가 백발마녀의 머리카락이 되어 그의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칭칭 감아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안개는 진실을 흐릿하게 만든다. 안개 속에서는 투박한 진실을 둘러싼 모종의 음모도 흐릿해져 좀처럼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자애학원의 적막한 운동장에서 인호는 이제 막 학교를 빠져나가는 청색 승용차와 파삭거리며 과자를 먹는 조그만 소녀를 본다. 이 광경이 비극의 정점임을 인호가 알게 된 건 한참 후였다.

"그가 멈추어선 곳은 여자 화장실 앞이었다. 쇠소리 같은 비명이 와악! 와악! 튀어나오고 있었다 … (중략) … 잠시 후, 비명소리는 멎었다. 그는 그 옆의 남자 화장실 문을 밀어보았다. 문은 쉽게 열렸다 … (중략) … 그렇다면 여자 화장실의 문은 누가 잠근 것이 틀림없었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육중한 석조 건물을 지배하는 법칙은 '야만'이다. 야만의 세계는 힘이 모든 것을 움직인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하고 유린하여 그들의 욕망을 채운다. 이 세계에서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인호는 수위에게 화장실에서 비명소리가 났다는 말을 전했다. 수위는 빙그레 웃었다. "아하, 애들이 그냥 심심하면 비명을 지르고 놉니다." 그 야만이 어떤 방식으로 자행되는지 모두 알고 있다. 그저 침묵할 뿐이다. 침묵의 카르텔은 견고하게 그 왕국을 보호한다.

"며칠 전에 그 애가 학교에서 성추행을 당했대. 교장한테 말이야 … (중략) … 학교 화장실로 끌려들어가서 … 거의 성폭행 직전까지 간 모양이야."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안개 속 현실은 끔찍하게 추악했다. 아이들의 손짓이 통역사의 입을 통해 언어라는 몸뚱이를 획득해 나가자 어른들은 몸서리를 쳤다. 언어의 틀에 담긴 진실은 날개를 달고 안개를 휘저어 놓았다. 이제 가해자에게 엄한 처벌을 내리고 상처 입은 아이들을 보듬어 주는 것만 남았으리라.

그러나 날개가 부러져 진실이 추락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교양 있고 선량한 무진 시의 지도층 인사이자 신실한 기독교 성도를 향한 굳건한 신뢰는 진실을 삼켰다. 안개는 다시 짙어졌고, 침묵의 담은 더욱 높아졌다. 진실이 흐릿해진 틈을 타, 이웃들은 진실의 껍데기를 벗겨 가해자에게 씌웠다. 진실이 주는 불편함을 외면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우리 장로님들 두분, 그들은 우리가 차마 하나님 아버지 모시는 이 자리에서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그런 짓을 했다고 지금 감옥에 갇혔습니다 … (중략) … 이제 이 예배가 끝나면 여러분은 무진 시민들에게 대답해야 합니다. 거짓으로 우물거리지 말고! … (중략) … 우리가 알기에 그들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 (중략) …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소설이라 다행이라 여겼다. 치솟는 눈물을 꾹꾹 누르면서도 허구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그 눈물이 머쓱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책 말미 ‘작가의 말’ 서두에 쓰인 문장을 보자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가슴팍을 스쳤다.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어떤 신문기사 한 줄 때문이다’ 소설「도가니」는 2000년 광주 인화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소설로 그린 작품이었다.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가해자들은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분노와 씁쓸함이 엉겨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진실은 이리도 무력한 것인가. 이렇게 버림받아 초라해진 진실은 이 사회 곳곳에 얼마나 많이 숨어 있나. 내가 불편해 외면해 버린 진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도가니」의 충격에서 허우적대던 지난 9월 22일, 신문 한 켠에 위치한 기사가 내 눈길을 끌었다. '보육원장 부자, 원생 상습 성추행' … 아직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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